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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80화 (480/1,108)

480화다리 힘이 풀려서

거리에 있던 사람 중 첫 번째로 입을 다문 이는 범한이었다. 범한은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이는 성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반이 날아간 건물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자기 얼굴을 거칠게 때리며 지금 이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며 자기 설득에 나섰다.

정신이 돌아온 감찰원 관원들과 호위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들 눈에는 가득 들어 찬 놀라움과 두려움 외에도 무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기색도 껴있었다. 바로 ‘제사 대인께서는 어떻게 살아 돌아오신 거지?’, 라는.

이 문제는······ 범한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등자월!”

아픈 사람처럼 붉게 충혈된 눈을 한 범한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기침을 하며 말을 이어 갔다.

“좀 비켜봐요!”

등자월은 반은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래서 범한이 두 차례나 불같이 화내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제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대답했다.

범한이 손짓으로 등자월을 앞에 불러 놓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만약······ 만약이라고 했어요. 누군가가 투항하면, 그 사람을 어떻게든 보호해야 합니다.”

경악한 등자월이 고개를 들어 제사 대인을 바라보았다.

범한의 눈에 두려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자를 데려오고······ 아니다. 흑기에게 바로 경도로 데려가라고 해요.”

범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당신네 어른들 일이니 어른들끼리 노시라구요! 이런 정신적인 고통은 더 이상 못 참겠어요!’

등자월이 범한의 명령을 접수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반이 잘려나간 꼭대기 층을 바라보고는 침을 꿀꺽 삼키고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인, 대체 누구였습니까?”

범한이 등자월에게 눈을 부릅떴다.

“고달이 사고검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등자월은 2처 출신의 심복인지라 곧장 반박했다.

“감찰원 보고서에 똑똑히 쓰여 있었습니다. 사고검은 아직 동이성에 있다고······.”

범한이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대로했다.

“건물 잘려나간 걸 봐요! 상대방은 대종사라고요! 그런 자의 행적을 우리 까마귀들이 지켜볼 수 있을 거 같아요?”

등자월은 범한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이에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말을 타고 서둘러 성 밖으로 나가 흑기와 합류했다.

등자월이 떠난 후에도 범한은 거리에 서 있었다. 화원으로 돌아가기는커녕 부하들과 호위들에게도 함께 있어달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찰원 쾌마로 보고가 들어왔다.

“보고드립니다. 이미 성문을 나섰습니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보고드립니다. 이미 정자를 지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 하나가 말을 몰고 질겁한 모습으로 도착했다.

“보고드립니다. 이미 7리 언덕을 지났습니다.”

7리 언덕은 소주성으로부터 단순히 7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다. 이미 경도로 돌아가는 관문이 된 터라 그 거리가 20여 리에 달했다. 삿갓을 쓴 객이 짧은 시간 안에 20리를 걸어갔다는 건 믿기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의 신분을 떠올려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건물 반 층을 날려버린 절세의 강자가 소주성을 떠난 게 확실해지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호위 고달이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낸 후 범한에게 다가가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막상 말해 놓고 생각해 보니 바보 같은 말이었다. 이에 고달이 서둘러 아뢰었다.

“서둘러서 경도에 비밀 보고서를 올려야 합니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늦게 도착할까 무섭군. 그래도 쓰기는 써야겠지.”

“등적문!”

범한이 계년조의 다른 구성원의 이름을 불렀다. 전에 하서비 보호 임무를 수행했던 6처 검수 출신으로, 등자월이 곁에 없을 때 범한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었다.

범한은 옆에 고달이 있는데도 바로 냉랭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총독 관아에 통보하게. 내일 다시 명원으로 갈 거고, 명씨 가문의 사병들을 내가 모두 거둬들일 거라고 전하게.”

옆에서 듣고 있던 고달은 살짝 오싹했다.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이 지나간 직후인데도 제사 대인은 가장 먼저 그 일을 이용해 이득을 챙길 생각부터 해서였다.

흠차가 자객을 만났으니 큰일 중에 큰일이었다. 지금 강남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고 있으니, 그들은 분명 명씨 가문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이번 일을 빌미로 삼으면 명씨 가문을 더 약화시키는 동시에 죽은 큰 노마님 때문에 생긴 백성들의 원망도 줄일 수 있을 터. 고달은 제사 대인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고 탄복했다.

* * *

섭류운이 소주성을 떠났음을 확인하자 범한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했다. 한데 마음 한쪽에는 여전히 커다란 의문이 남아 있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이에 범한은 반이 잘려나간 꼭대기 층을 바라보며 우울한 얼굴로 욕을 내질렀다.

“다시 짓는데 은전을 대체 얼마나 들여야 하는 거야! 염병할 늙은이 같으니!”

범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어안이 벙벙해져서 그 누구도 감히 말대꾸를 할 수 없었다. 거리가 다시 조용해졌다. 그 누구도 제사 다인이 거리에서 욕을 내뱉을 줄 생각지도 못해서였다. 그것도 대종사를 향해서 말이다.

사람들이 이상한 표정을 짓자 범한은 절로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시 욕을 내뱉었다.

“이건 우리 집안 건물이라고! 다른 사람이 부숴놨는데 내가 욕도 못해? 그놈은 늙어빠진 염병할 놈이라고!”

고달은 마음이 복잡했다. 지금 당장 제사 대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래서 제사 대인에게 더 탄복하고 말았다. 그는 과연 담력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절세의 인물이었다.

조금 전 대종사를 홀로 상대하는 모습에 부하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탄복했다. 그런데 그가 예상을 뛰어넘어 살아나오고, 또 4대종사까지 저 멀리 쫓아버리자 부하들은 뼛속에 새겨질 정도로 제사 대인에게 탄복했다.

그런데 부하들을 최고로 탄복하게 만든 건, 뜻밖에도 범한이 거리에서 상욕을 해댄 것이었다.

부하들의 탄복과 찬사의 눈빛 속에서 범한이 혼잣말을 했다. 한데 그 말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범한이 몸에 힘이 풀려 거리에 털썩 주저앉으려는 건 그들 눈에도 보였다.

순간 꽃 같은 것이 지나가더니 웬 낭자가 범한을 부축했다.

모두들 알고 있는 낭자였고, 제사 대인의 홍안 지기였다. 그래서 부하들은 긴장하지는 않았지만 걱정은 했다. 이제 보니, 성인의 경지에 든 대종사에게 제사 대인이 내상을 입었던 것이라고.

이에 모두들 이 젊은 남녀를 따라 서둘러 화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시각 총독 관아의 병사들이 생각보다 늦게 나타났다.

몸을 살짝 기울이고 있던 범한이 낭자의 품으로 엎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담담한 향을 맡으며 원망의 말을 쏟아냈다.

“그 사람이 떠나니까 온 거군요.”

해당타타의 얼굴에 한줄기 미안함이 어리었다.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범한이 눈을 홉떴다.

“그 괴물을 누가 이길 수 있겠어요?”

해당타타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내상을 입었어요?”

“아뇨.”

범한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꼭대기 층에서 연기를 너무 오래 했더니, 다리 힘이······ 일찌감치 풀려버려서 그래요.”

* * *

소주성으로부터 약 20리 떨어진 계곡 앞. 별 특색이 없어 보이는 장원은 차분히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다.

점점 해가 서산으로 저물고 어둠이 짙어지자 400여 명의 흑기가 말에 재갈을 물리고 말발굽에 천을 감았다. 그런 후 한밤의 살신(殺神)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장원 포위를 마쳤다.

그리고 이내 한바탕 피비린내 나는 도륙이 시작되었다. 장원 밖에 있는 흑기가 안쪽으로 불화살을 쏘아대자, 안쪽에 있는 이들 역시 불화살을 당겼다.

사나운 연기가 치솟고, 사람은 죽고, 장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 * *

흑기는 감찰원 5처 소속으로 가장 강한 무력을 보유한 부처였다. 하지만 관아 관원처럼 업무를 보는 이는 없었으며, 경도 외곽에서 대기하며 진평평의 명령을 기다렸다. 훗날 감찰원에 젊은 제사 대인이 나타나자 흑기는 둘로 나뉘게 되었고, 근 500명에 이르는 수가 범한을 따랐다. 이는 진평평이 범한을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작년에 범한이 북제로 갈 때, 흑기는 국경 밖까지 호위를 했었다. 그리고 무도하강 밖에서는 상삼호가 소은을 구출하기 위해 파견한 군대를 몰살시켰는데, 이것만으로도 흑기의 무력이 얼마나 강한지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줄곧 강북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흑기에게 드디어 무력을 사용할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말을 산 아래에 세워두고 있던 흑기 부통령에게서는 흥분된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게는 단순한 업무이기 때문이었다.

현재 400명의 흑기를 지휘하고 있는 자는 5처 부통령으로, 성은 형씨에 이름은 없었다.

형 장군이 말 위에 앉아 활활 타오르는 장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얼굴을 눌러 쓰고 있던 검은 가면을 벗고 그 아래에 있던 미백색의 얼굴과 냉정하고 무표정한 눈을 드러냈다.

제사 대인이 내린 임무는 끝냈다. 한데 뜻밖에도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장원에 흑기에게 손상을 입힐 정도의 강대한 무력이 숨어 있었다. 가장 끔찍했던 건 장원에 있던 이들이 자신들이 죽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목숨을 걸고 대항하며 단 한 사람도 투항하지 않은 점이었다.

형 장군은 장원에 누가 있는지 알지 못했고 제사 대인의 명령만 이행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장원에 있던 이들도 불을 놓는 바람에 일부 공개 불가한 증거 대부분이 일찌감치 불에 타 없어져 버렸다.

그가 부하들을 이끌고 달그락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불타고 있는 장원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부하 기병들은 지금 치료를 받거나 현장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살벌한 눈빛으로 이 모든 걸 주시하고 있던 형 장군이 갑자기 눈꺼풀을 살짝 깜빡였다.

기병 다섯이 불속에서 검은 불꽃을 번쩍이며 나와서였다. 그 모습은 마치 말을 타고 나타난 저승사자 같았다.

다섯 마리의 말 위에는 전신에 검은 갑옷을 입은 기병 외에도 온 몸이 꽁꽁 묶인 사람들도 있었다.

형 장군은 오른손으로 얼굴을 눌러 기병이 자기 앞으로 오기 전에 가면을 다시 썼다. 그리고 얇은 입술을 살짝 벌려 싸늘한 소리를 냈다. 그것도 살짝 의아하고 놀랐다는 듯이 말이다.

“산 사람인가?”

기병 다섯이 형 장군 옆으로 다가와 보고했다.

“이 다섯은 우물에 숨어 있다 투항했습니다.”

형 장군은 겉으로는 싸늘하게 굴었지만 속으로는 의외의 수확에 기분이 좋았다. 그가 입술을 들썩여 싸늘한 웃음을 내보였다.

“제사 대인께서 기뻐하시겠군.”

죽음을 불사한 기세로 저항한 장원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모두 태워버린 전략 사이에서 산 사람을 확보하다니.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데 묶여 있는 다섯 포로를 바라보고 있던 형 장군은 기분이 조금 기괴했다.

“소주로 돌아간다.”

검은색 가면에 비춘 황금색 화염은 이채로웠을 뿐만 아니라 오싹한 느낌까지 주고 있었다.

가면을 쓴 형 장군이 싸늘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장원 밖에서 말 우는 소리가 울리며 어둠에 싸인 계곡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말발굽 소리가 살짝 어지럽게 나더니 흑기가 이내 다시 대열을 갖추었다. 세 줄로 길게 늘어선 흑기는 검은 물줄기가 되어 활활 타오르는 장원을 돌고 산기슭 길을 비스듬히 지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흑기가 유령처럼 산에서 나와 원래 있던 곳으로 복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흑기는 우연히 마주친 등자월 일행으로부터 제사 대인의 최신 명령을 받았다.

형 장군은 잠시 침묵한 후 기병 소대를 조직해 포로를 경도로 압송하도록 했다. 그런 후 한밤의 살신(杀神) 수백과 함께 조용히 강을 건너 다시 강북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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