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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79화 (479/1,108)

479화 검에 무너진 사람과 건물

“대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잘한 것에는 얽매이지 말아야 하는 법! 천둥 같은 일격 없이 강남을 예년처럼 그대로 둔다면, 명씨 가문에서 얼마나 더 많은 이를 죽이게 될까요? 저 해적들 손에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죠? 당신이 국고의 손실을 메워줄 수 있습니까?”

범한은 섭류운에게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대신 대담하고 무례하게 섭류운의 코를 향해 손가락을 쭉 뻗어 삿대질하며 그를 꾸짖었다.

“그리고 군산회 말입니다! 나보다 더 깨끗한 것 같습니까? 당신 같은 신분의 사람이······ 무엇하러 굽신대며 그들의 일을 처리해 주는 겁니까! 당신은 이 나라의 종사입니다. 한데 왜 제가 아니고 저쪽에 서는 것입니까?”

범한은 마지막에 말을 교묘하게 돌려 섭류운의 마음을 공략했다.

그러자 섭류운이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며 천천히 입을 뗐다.

“군산회는, 자네가 상상하는 것 같은 게 아니야.”

범한이 비웃었다.

“당연히 잘 알고 있겠죠. 저 높은 곳에 계신 대종사님이니까. 그래도 결국에는 사람이니 즐기고 마음 편히 천하를 주유해야겠죠? 천하를 주유하면 행복할 겁니다. 하나 해도 지고 비까지 내리면, 그때도 행복하고 마음이 편할까요? 천하 곳곳에서 시중도 들어주고 숭배도 해주니······ 그러니 행복한 겁니다. 한데 온 천하를 가지고 당신을 모실 수 있는 자라면, 군산회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섭류운은 미소 지은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젊은이가 이리도 쉽게 자신과 군산회의 관계를 알아차렸을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간단한 이치였다. 고하는 북제가, 사고검은 동이성이, 황궁에 계신 그분은 경국에서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이 위풍당당한 섭류운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천하를 주유하고, 바닷바람을 맞고, 동산의 소나무를 어루만지고, 강과 호수를 건너고. 이 모든 걸 하려면 누군가가 보살펴주어야 했다.

대종사도 먹어야 하고 객잔에서 쉬어야 한다. 특히나 이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상투적인 아첨 수준은 눈에 차지도 않을 터. 고즈넉한 장원에서 지내며 산과 들에서 지내는 외로운 객과 교류하길 원할 것이다.

그런데 장원에서 지내려면 돈이 필요하고, 산에 있는 친구를 만나려 해도 여비는 필요했다. 여행이며 세계 일주를 하는 건, 사실은 가장 호화로운 삶을 사는 것 아닌가.

어엿한 대종사님이 노잣돈을 위해 길 위에서 강도 노릇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범한은 아직 할 말이 더 남아 있던지라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하나 당신을 돌봐주는 이들과 군산회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니······ 본관에게서 그들을 구하는 건 간단치 않을 겁니다. 군산회가 당신의 그 아낙네 같은 손을 상하지 않게 해줬다고 해서 설마 그 손으로 군산회를 위해 하늘을 떠받쳐줄 생각인가 보죠?”

말하는 동안 범한은 탁자를 짚고 있는 섭류운의 양손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백옥처럼 하얗고 주름이 하나도 없어 노인의 손 같지 않았다. 마치 규원에 콕 박혀서 햇볕도 쐬지 않고 자수나 놓는 아낙의 손 같았다.

여러 해 전, 섭경미가 오죽을 데리고 경국 경도로 왔을 때였다. 오죽은 섭류운과 첫 번째 대전을 치렀고, 그 일로 섭류운은 검을 버리고 산수(算手)라 불리는 격투 기술을 완성했으며 그 흔적은 손에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난 지금도 그는 그때의 손을 갖고 있었다.

범한이 자신의 손을 아낙의 손이라고 하자 가을날 물처럼 고요했던 섭류운의 눈동자가 점점 들끓기 시작했다.

협상의 관건은 상대방의 기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서는 것. 상대방이 높디높은 곳에 있는 대종사라 할지라도 말이다. 범한은 섭류운이 처음으로 진짜로 화낼 기미를 보이자 서둘러 화제를 전환해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어 갔다.

“흑기가 손을 쓰기까지 아직 좀 남았는데······ 그 장원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로 신경 쓰인다면······ 주 선생부터 제게 넘겨야 하지 않을까요?”

섭류운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조소를 날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무지한 젖먹이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제는 내 제의를 받아들겠다는 건가?”

범한이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았다. 심장이 ‘두근!’, 하고 울렸다.

섭류운이 군산회의 회계 선생을 데리고 포월루까지 올 정도라면 애당초 그에게는 주 선생과 군산회 내부의 섭씨 가문 자손을 맞바꾸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거라고 범한은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그럴 의향이 전혀 없었던 건가?

“지금까지 그 어떤 조건도······ 협박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차분하고 성의가 엿보이는 눈으로 섭류운의 고졸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존경할만한 선배 분과 아예 협의도 않겠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이쯤 되자 섭류운도 드디어 표정이 변하며 탄식을 내뱉었다.

“과연 후안무치한 게······.”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당신께서 무력으로 압박을 하시기에 저는 목숨으로 압박을 한 겁니다. 그러니 후안무치하기로는 피차일반인 거죠.”

섭류운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범한은 두려워 심장이 떨렸지만 표정만큼은 차분했다. 그리고 식은땀 때문에 모양이 더 변해버린 불쌍한 부채를 펴들고 아무렇게나 부채질을 해댔다.

범한의 손에 들린 부채를 보고 있던 섭류운의 눈빛에서 잠시 조롱의 빛이 스쳤다. 젊은이가 속으로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알아차려서였다..

“네가 모든 걸 이해하고 모든 일을 통제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말거라.”

섭류운이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이다.”

이번에도 섭류운이 탄식하며 말했다.

“너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구나. 하지만 너무 머리를 굴리지는 말거라.”

이번에는 섭류운의 훈계였다.

“나중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테지.”

섭류운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삿갓이 그의 고졸한 얼굴을 가렸다. 섭류운이 거친 천으로 감싼 장검을 거꾸로 들더니 난간 쪽으로 걸어가 주 선생의 옷깃을 잡았다.

그 순간 범한은 무기력하고 아득한 기분이었다. 저 대단한 섭류운이 주 선생을 넘겨주러 온 게 아니라면 무엇 하러 억지로 참아가며 자신과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눈 건지.

섭류운이 고개를 돌렸다. 점점 희뿌연 해져 가는 그의 눈동자에서 어렴풋하지만 범한을 기겁하게 만들 살의가 뿜어져 나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느릿느릿 말했다.

“검을 뽑아라. 사고검 그 백치 흉내는 내지 말고. 네 녀석이 잊고 있었나 본데, 나도 왕년에는 검을 휘두르던 사람이었다.”

섭류운은 말을 하면서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순간 눈처럼 새하얀 칼날에서는 그 어떤 반짝임도 없었다. 새하얀 손이 빛이란 빛은 모두 흡수를 해버린 것만 같았다.

범한은 정신 집중을 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신을 더 집중하기 위해 있는 힘껏 혀를 깨물었다. 생사의 경계에서 지모니 지략이니 하는 것은 모두 쓸모없는 법. 두 눈을 부릅뜬 범한은 질겁하여 설산에 있는 거친 패도의 정기를 양 주먹으로 모두 끌어낸 후 일단 전방을 향해 한 방 날렸다.

한데 탁자에 맞고 말았다.

날카로운 괴성이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패도의 주먹 때문에 온몸을 떨기 시작한 범한이 공중에서 몸을 한 번 비틀더니 궁지에 몰린 땅개처럼 놀라운 속도로 검은 그림자를 남기며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범한은 거리 위에 와 있었지만 몸은 공중에 떠 있었고, 두 눈에는 겁먹은 기미가 가득했다. 살기등등한 검의 기운이 언제든 자신을 두 동강 낼 기세로 뒤에서 바짝 뒤쫓아 오는 게 느껴져서였다.

이에 범한은 온몸에서 힘을 쥐어짜고 다리를 더 열심히 움직였다. 입에서 피까지 토했지만 속도를 더 높였다. 공중에서 세 번 공중제비를 돌고 발끝으로 앞 건물의 푸른 깃발까지 차 탄력을 얻은 후 연기처럼 가볍게 거리에 착지했다.

호위 여섯과 감찰원 검수가 어느새 범한에게 달려와 있었다. 그들은 인간 방패가 되어 범한 주위를 겹겹으로 에워쌌다. 죽음도 불사한 것이었다.

그 순간 범한은 자신이 온통 사람으로 둘러싸였으며 외부 상황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에 잠시 감동하기는 했지만 이내 온몸의 감각을 최고로 민감한 상태로 높여 놓았다. 언제든 도망갈 수 있도록.

하지만 길게 뻗은 거리는 고요하기만 했다. 그것도 괴이할 정도로 말이다.

범한은 경거망동하지 않고 호위 뒤에만 숨어 있었다.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무렵, 그제야 무언가 이상했던 범한이 부하들에게 작은 틈을 내라고 분부했다.

섭류운은 포월루에 없었다.

잔뜩 긴장해 반은 기절해 있는 부하들이 낸 틈으로 범한은 길게 뻗은 길의 끝부분을 바라보았다. 삿갓을 쓰고 무명옷을 입은 사람이 사람 하나를 들고 천천히 성문 밖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었지만 발걸음을 뗄 때마다 수십 장씩 이동하는지 그는 갈수록 멀어지고 있었다.

범한이 침을 꼴깍 삼켜 화끈거리는 목을 축였다. 그리고 잔뜩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에워싼 사람들을 뚫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 후 거리에 서서 저 멀리 있는 섭류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달도 맞은편 건물에서 내려와 있었다. 그가 무사한 제사 대인을 기쁜 눈으로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무사하시죠?”

범한은 떨리는 양손을 몸 뒤로 숨기며 억지로 차분하게 대꾸했다.

“당연히 무사하지요.”

말하는 내내 범한은 성문으로 사라지는 섭류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포월루 꼭대기 층에 고달이 낸 구멍 말고도 다른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범한의 주먹에 부서진 탁자 옆에는 굵은 기둥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기둥 위에, 그것도 사람 키의 반 정도 되는 높이에 두껍게 발린 붉은 칠이 갑자기 벌어지면서 구멍이 생기고 있었다.

그런데 범한이 도망가면서 버린 부러진 부채는 어디로 간 건지.

칠 위에 생긴 구멍은 무언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더 크게 벌어졌다. 그리고 처참하게 벌어진 상처처럼 기둥 내부에 있는 목질을 드러내 버렸다.

안쪽에 있던 목재에도 천천히 금이 가고 있었다.

금은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이 파고 들어가 어느새 거대한 기둥을 관통해 버렸다.

사실 이 기둥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포월루 꼭대기 층에 있는 모든 나무 기둥, 난간, 벽채, 진열장, 탁자에 사람 키의 반 정도 되는 높이에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금은 점점 길게 뻗어 나가더니 결국에는 하나로 이어졌다. 마치 누군가가 정교한 솜씨로 한 줄로 선을 그어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금은 먹물로 그린 게 아니라 검(劍)으로 그린 것이었다.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가장 먼저 넘어진 건 포월루 꼭대기 층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화분대였고, 화분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길게 뻗은 거리 위는 일찌감치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범한과 그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던 몇십 명의 심복 부하들만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일제히 위쪽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떡 벌어져 버렸다. 범한을 포함한 모두가 이내 놀라 공포에 질린 눈으로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새하얗고, 차 찌꺼기가 잔뜩 끼어 있고, 듬성듬성 빠져 있는 이를 드러낸 채로 말이다. 심지어는 하늘 가득 휘날리고 있는 나무 찌꺼기가 입으로 들어가고 있는데도 그들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포월루가 무너졌다!’

정확히 말하면, 포월루의 꼭대기 층이 무너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포월루 꼭대기 층의 절반이 단호할 정도로 완벽한 설계에 따라 깔끔하게 무너져 내려 하늘 가득 먼지가 휘날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던 건 먼지가 차츰 사라지고 나서였다. 포월루 꼭대기 층이 천검(天劍)에 의해 잘려나가기라도 한 듯 위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서 건물의 틀과 진열대만 남아 있었다.

잘려나간 면은 반듯하고 매우 깔끔했다. 정말로 거대한 검으로 가운데를 자른 것만 같았다.

물론 모두들 이게 확실히 ‘사람’이 휘두른 검에 의해 잘린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모두의 마음속에 첫 느낌이 되살아나 버렸다.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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