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화 나를 감히 죽일 수 있을까요? (2)
계단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껏 놀란 사천립이 입을 떡 벌렸다. 상문 낭자는 걱정하는 모습으로 감찰원에 둘러싸여 있는 탁자를 잠시 쳐다보고는 이내 의문이 담긴 시선을 난간 옆에 서 있는 범한에게 돌렸다.
“모두 내려가 있거라.”
범한은 난간에 기댄 채 고개도 돌리지도 않고 싸늘하게 분부를 내렸다. 들고 있던 부채가 모양이 변형될 정도로 꽉 움켜쥐고 있는 걸 보니, 아마도 결심을 내린 듯했다.
앞서 호위들이 돌격했을 때, 범한의 외침에 그들은 모두 어떻게든 뒤로 물러났다. 이것만 봐도 호위 무사들은 범한의 명령에 복종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이 호위를 포함한 모두에게 내려가라고 명령을 내리자 모두 침묵으로 반대의 의사를 드러냈다.
대종사가 살인을 하려는 마당이니 그 누구도 감히 범한만 남겨둘 수 없던 것이었다.
범한이 몸을 돌려 고달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설마 이제는 내 명령을 듣지 않게 된 건가요?”
고달의 심장이 두근, 하고 뛰었다. 범한 대인의 저 익숙한 웃는 얼굴, 웃음 속에 담긴 독려의 의미를 보고 있자니 순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범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저 살인 미소를 날리는 때는 정말로 화가 나 있거나 무슨 결심이 섰을 때인데.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내 분부 없이는 그 누구도 여기에 올라오면 안 됩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근처 거리를 몽땅 비워요. 이유 없이 다치는 사람이 나오면 안 되니까요.”
고달이 가슴 속의 답답한 공기를 내뱉고는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 모두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고달은 입구에 서 있는 사천립이 내려가려 하지 않자 그도 밀어서 아래로 내려보냈다.
범한 곁을 지키던 호위 무사들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훗날까지도 길이길이 기억하게 될 장면을 보게 되었다.
범한이 탁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범한은 기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일그러뜨린 부채를 다시 펴서 부채질을 하며 탁자를 향해 걸어갔다.
참으로 차분하면서도 멋스럽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사실 이쪽에 있는 탁자에서 저쪽에 있는 탁자까지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이 열 걸음을 걷는 동안 범한은 생사의 갈림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한데 기이하게도 삿갓을 쓴 자가 있는 탁자와 가까워질수록 범한은 오히려 마음이 평온하고 맑아졌다.
탁자 옆에 도착한 범한은 삿갓을 쓴 객의 두 눈을 응시했다. 매우 무례하게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라 그에게는 두려움 따위는 없어 보였다. 상대방이 손을 들어 대충 휘둘러도 자신을 죽여 버릴 수 있는데 말이다.
삿갓을 쓴 객은 담력이 큰 강남로 흠차 대인이 흥미로웠는지 미소를 짓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 * *
아래층으로 내려간 고달은 새로운 방어진을 짰다. 그리고 제사 대인의 명령대로 근처 백성들을 모두 피하도록 했으며, 부하에게 서둘러 총독 관저로 가 병사를 데려오도록 했다. 비록 저 위에 있는 절세의 강자에게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그래도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려 했다.
그 후 포월루 근처에 있는 건물 꼭대기로 올라가 조심스레 몸을 숨겼다. 그리고 언제든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맞은편 포월루에서 일어나는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고달은 잡상(雜像: 지붕 위에 달린 동물 모양의 조각상) 뒤에 숨어 포월루 꼭대기 층을 살피기 시작했다. 안에서 대화하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눈에 보이는 내부 상황에 고달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 * *
텅 비다시피 한 포월루의 꼭대기 층에서 범한과 삿갓을 쓴 객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탁자 옆에 앉아 있었으며, 한 사람은 탁자 옆에 서 있었다.
주 선생이란 자는 범한 눈에는 별거 아닌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눈에 거슬렸는지 범한은 손을 휘휘 내저어 그에게 한쪽으로 비키라고 했다.
사실 군산회 회계 주 선생은 적잖이 놀라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고분고분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 구석으로 가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자 범한이 앞섶을 뒤로 젖히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호탕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범한과 삿갓을 쓴 객은 이제 허리를 굽히면 맞닿을 거리에 있게 되었다. 친밀해 보였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도 위험하고 무서운 상황이었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고달은 놀라 죽는 줄 알았다. 범한이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어서였다.
범한은 왼손에 들고 있던 찌그러진 부채를 거둬들였다. 그리고 삿갓을 쓴 객이 사용한 젓가락을 천천히 집어 들어 수저통에 도로 넣어두었다. 범한은 이 세 개의 동작을 아주 섬세하게, 천천히, 조심스럽게 수행했다. 젓가락이 수저통으로 돌아가자 범한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고 무슨 위대한 일이라도 달성한 것처럼 손뼉을 쳤다.
삿갓을 쓴 객이 자신을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곧 대화가 가능하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대담하군.”
삿갓을 쓴 객이 미소 지은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젊은이들 중에서도 너는 특출나군.”
종사의 말이니 외부에 알려지면 범한은 굳건한 위상을 갖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의 말에 조금이나마 안심한다거나 기뻐하지 않고 온화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당신께서는 저를 언제든 죽일 수 있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삿갓을 쓴 객이 차분하게 말했다.
“앞서 한 말은 아직 유효하다. 흑기를 철수한다면 살려는 주겠다.”
범한이 느닷없이 고개를 치켜들어 조소와 멸시가 담긴 눈빛을 내보였다.
이 세상에서 감히 저런 눈빛으로 삿갓을 쓴 객을 봐준 사람은 몇 년 만에 범한이 처음이었다. 이에 제아무리 정상급 실력자이기는 했어도 삿갓 쓴 객은 살짝 노여움이 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당신의 요구인가요? 그래서 떳떳한 대종사께서 이런 시골까지 흘러들어왔다고요? 다 늙으셔서 체면 따위는 생각도 안 하시겠지만, 우리 경국은 체면을 따지거든요.”
범한이 느닷없이 신랄한 말을 해댔다. 범한은 앞에 있는 자를 실력을 가늠할 수 없는 대종사가 아니라 대충 귀를 잡고 훈육을 해도 되는 감찰원 부하인 것처럼 취급했다.
삿갓을 쓴 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껏 이런 식으로 자신을 훈계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에 그는 한동안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범한이 사납게 탁자를 내리쳤다. 그리고 삿갓을 쓴 객을 기이한 얼굴로 바라보며 똑똑히 말했다.
“늙어 노망이라도 난 겁니까? 이는 군산회의 일입니다. 내가 흑기를 움직여 죽이든 말든 무슨 상관입니까! ······설마 그 장원에 당신을 먹여 살려주는 이들이 있기라도 한 겁니까? 이런 식으로 다짜고짜 나타나서 칼로 내 목을 겨누면 내가 당신 말을 들을 줄 알았습니까? 내가 이번에는 당신 말을 들어준다고 쳐도 나중에는 또 어쩌려고 그럽니까? 설마 당신을 먹여 살려주는 이들이 안 죽을 거라 생각하는 거예요? 어쩌면······ 더 빨리 죽게 될 겁니다!”
범한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무시와 비웃음이 한도 끝도 없이 섞여 들어갔다. 그러다 기어코는 삿갓을 쓴 이의 코에 삿대질까지 했다.
“정신 차려요! 지금이 때가 어느 때인데 이럽니까? 진즉에 칼자루도 제대로 못 쥐는 나이인데, 대체 자기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자신이 검의 신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안 죽을 줄 아나 보죠?”
삿갓을 쓴 객은 범한을 바보처럼 바라보고만 있다가 문득 스스로를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천하에서 만민이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존재인데. 일국의 군주도 자신을 공손히 대우해 주는데. 그는 지금껏 자신에게 불경하게 행동했던 사람을 떠올리려 애썼다. 지금 이 앞에 있는 예쁘장한 젊은이처럼······ 코앞에서 삿대질까지 해댄 사람을 말이다.
하지만 대종사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보니 약간 경악한 건 있었지만 그래도 바로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오히려 범한을 바라보며 쾌활하게 껄껄 웃기 시작했다.
“이 노인에게 감히 그리 말해주는 사람은 몇 년 만에 처음이군.”
그가 갑자기 목소리를 착 가라앉히고 싸늘하게 말했다.
“세 번째로 말하마. 병사를 철수시키지 않으면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말을 마친 객은 그동안 차분히 내버려 두었던 손으로 천천히 탁자를 떠받치기 시작했다.
이에 범한은 시선을 살짝 떨어뜨려 파리하게 늙어 있어야 하는 객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객의 손에는 주름이 하나도 없었다.
* * *
탁자 밑에 있던 검이 강력한 기에 이끌려 용이 울 듯 웅웅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왔다. 검 자루가 천천히 떠오르더니 반쯤 나온 눈처럼 새하얀 검신이 꼭대기 층을 비추기 시작했다.
“셋!”
삿갓을 쓴 객이 싸늘하게 숫자를 거꾸로 세기 시작했다.
그러자 범한이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를 쓱 바라본 후 외쳤다.
“하나!”
말을 마친 범한이 주먹을 날렸다.
이 일격에는 근 20년 동안 밤낮으로 힘들게 한 명상 수련, 이름이 없는 무공, 섭가로부터 배운 대벽관의 운기 방법, 해당타타로부터 배운 천일도 무상 심법이 담긴 정기가 담겨 있었다. 정기는 범한의 의지에 따라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힘과 살기를 싣고 주먹까지 도달해 사납게 목표물을 때려 부수었다.
주먹이 검 자루를 으스러뜨려버렸다.
그러자 꼭대기 층의 공기가 이유도 없이 출렁였다. 난간 밖에 있던 공기도 진동했는지 주위의 경관이 모두 왜곡된 형태로 보였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평범해 보이는 장검이 범한의 주먹질에 부서져 버렸다. 그러자 용이 울부짖는 것 같던 소리도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난간에 있던 주 선생은 이 놀라운 광경에 압도되어 처참하게 바닥에 기절해 버렸다.
범한은 가슴을 역류해 밀고 올라오는 선혈을 삼켰다. 그리고 삿갓을 쓴 객의 눈을 흉물스럽고 고집스런 모습으로 응시했다.
범한이 소리쳤다.
“등자월은 명령을 들으라!”
정기가 실린 고함 소리가 순식간에 거리 곳곳까지 흘러갔다. 맞은편에서 잠복 중이던 고달은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내 거리를 지키고 있던 등자월은 영문도 모르고 떨리는 목소리로 곧장 대답을 했다.
“네!”
범한은 여전히 삿갓을 쓴 객의 두 눈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사납게 말했다.
연화령(煙花令: 폭죽)을 쏘라고 전하라. 흑기에게 장원으로 들어가고, 반항하는 자는······ 봐주지 말라고 전하라!”
* * *
얼마나 지났을까, 고요했던 포월루 꼭대기 층에서 드디어 삿갓을 쓴 객의 복잡한 심경이 담긴 탄식 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말이 맞아. 다시는 인간 세상에 들어오면 안 되는 거였어. 한데 네가 죽이려는 사람, 네가 잡으려는 사람은 내가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구나. 이를 어쩐다?”
삿갓을 쓴 객이 천천히 탁자 옆에 있던 검을 들었다. 그리고 손을 뒤집어 검을 들어 올리며 나지막한 소리로 속삭였다.
“장검을 들고 동산을 나오니······.”
검의 기운이 점점 차올랐다.
범한이 무서워하지 않고 있다는 게 거짓이라면, 긴장하지 않고 있다는 건 더 큰 거짓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강한 정신력으로 얼굴의 모든 근육의 떨림을 통제했다. 그리고 삿갓을 쓴 객의 얼굴을 죽어라 노려보며 한마디 했다.
“당신은 감히 날 못 죽입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왜 내가 감히 너를 못 죽인다는 거지?”
“왜냐하면 당신은 사고검이란 그 백치가 아니니까요.”
범한이 탁자 위에 놓아둔 낡은 부채를 다시 꽉 움켜쥐며 말했다.
“4대종사 중 사고검이라는 그 몰인정한 백치만 감히 날 죽일 수 있거든요.”
삿갓을 쓴 객의 손은 여전히 칼자루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순간 범한은 상대방이 저 검을 뽑는 순간 자신의 몸과 머리는 분리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에 내면의 공포를 강하게 억누르며 똑똑히 말했다.
“그래서 당신이 왜 여기에 나타나신 건지 모르겠어요. 제 마음속의 당신은 부서진 반쪽짜리 배에서 노래를 부르며 마음껏 천하를 주유하고, 옷자락에 구름 한 점 묻히지 않는 고귀한 현인(賢人)이신데 말입니다. 이런 일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혀져 이렇게 어리석은 일을 할 무인은 아니시라고요.”
삿갓을 쓴 객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리고 범한은 눈이 어떻게 된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상대방의 눈에서 마음에 든다는 감정 같은 걸 보았다.
“물보라는 잠깐 피었다 사그라지지. 허나 천년바위와 견주어 다를 바 없다······ 선생 또한 이러하지 않습니까.”
범한이 상대방을 사납게 노려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당신이 섭류운이라면, 나를 감히 죽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