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화 소주성에 나타난 수상한 객
흑기는 명원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감찰원이 무력을 동원해 지방 정무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걸 황제가 싫어해서였다. 하지만 군산회라는 신비하고, 심지어는 비밀리에 황권에 대항하는 조직이라면 범한이 어떤 수단을 동원하든 경국 황제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었다.
강남로 총독 설청 역시 범한의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다. 경도에 직접 허락을 구하려 한다면 때를 놓칠 수 있어서였다.
오늘은 명씨 가문 큰 노마님의 장례 절차에서 출관과 매장이 이루어지는 날이었다. 그리고 500에 이르는 흑기가 잠행으로 큰 강을 건너와 어느 곳을 쓸어버리는 날이기도 했다.
장지로 가는 행렬이 이미 포월루 아래쪽 거리를 지나가고 없을 때였다. 범한은 일부 권문세족들이 조심스레 행렬에서 이탈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이들 강남 인사들은 명씨 가문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아 참여한 것이었다. 한데 흠차 대인의 체면까지 감히 깎을 수 없어 운구 행렬이 성문 입구에 다다르자 알아서 대열에서 이탈해 되돌아갔다.
“의기양양하여라······.”
대권을 손에 쥐고 있는데 어찌 민심 따위가 두려울까! 범한은 득의양양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권력이란 게 정말로 마약과 같다는 걸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서양 철학에서든, 소설에서든, SNS 게시판에서든 절대적인 무언가를 가진 사람이 절대적인 무언가가 되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데 범한도 잘 알다시피, 그 자신은 결코 부패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정신적 경계가 비교적 높은 수준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범한은 세 차례나 탄식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마다 누군가가 등장해 묻지 않던가?
“대인께서는 어찌하여······.”
한데 안타깝게도 왕계년은 반년이나 더 지나야 경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니 옆에 있는 등자월이 그 역할을 대신했는데. 하루 종일 이상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던 등자월이 때를 봐서 겨우 한마디 던졌다.
“대인······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범한이 웃으며 침을 퉤 뱉었다.
“기분이야 당연히 좋지요. 노부인이 깔끔하게 죽어줬지, 또 이 높은 데서 무덤으로 들어가는 걸 보게 돼. 어찌 안 기쁠 수 있겠습니까!”
등자월은 이게 뭐 그리 즐거워할 일이냐고 생각했다. 그래서 간언이란 걸 한답시고 입을 열었는데.
“강남의 백성······.”
겨우 두 마디 했는데 범한이 싸늘하게 웃으며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그런 말은 재탕하는 게 아닙니다. 민심이니 민의니 그딴 게 다 뭐라고. 저들은 몇 달도 안 되어서 깡그리 잊어버릴 거예요. 어질고, 선하고, 좋은 거 다 부질없어요. 딱 며칠 생각하고 나면 집에 음식이며 기름이 떨어질까 걱정이나 하고 있을 걸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 쌀이 떨어진 게 더 중요한 일 아닙니까. 백성은······ 백성은 잊어버리는 걸 세상에서 제일 잘 하는 부류의 사람이라고요.”
이는 범한 자신의 신분을 두고 한 말이었다. 바로 온갖 풍상을 겪고 이제는 황실의 금고가 되어버린 섭가 말이다.
과거의 섭가는 지금의 명씨 가문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명성, 역량, 백성에게 베푼 은덕을 살펴보면 명씨 가문보다 열 배는 더 훌륭했다. 그러다 하늘에게 버림을 받아 가문이 망하고 사람마저 죽게 되었는데도 천하 만민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대체 누가 섭가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해줄 수 있을까!
등자월은 순간 깜짝 놀라 잠자코 있었다. 제사 대인의 옛 고통을 건드렸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감히 입을 더 놀릴 수 없었다. 그리고 제사 대인이 왜 매번 민의며 민심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냉소적으로 굴며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신하된 입장이니 황제 폐하의 신하 노릇만 할 수 있을 뿐이죠. 저들 백성들의 신하가 아닙니다.”
백성을 위해 일한다는 정신과 완전히 상반되는 말이었다.
그런데 현재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놓고 봤을 때, 범한이 불만을 가질만한 게 있을까?
일단 명씨 가문은 손바닥 안의 원숭이가 되었으니 강남은 안정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강북에 있는 하서비에게 다음과 같은 소식이 도착해 있었다. 일단 그는 며칠 전에 둘째 동생 쪽과 손을 잡았다. 경도 호부에 분 풍파도 잠잠해진 상태였다. 항주 쪽은 약초 채집이 급했다. 황실 금고의 3대 작업장은 경여당 대행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지하고 활기차게 물건을 생산해 내고 있었다.
관료 사회를 놓고 봤을 때, 우선 범한과 설청의 관계는 날로 긴밀해지고 있었고 황제 폐하의 범한을 향한 신뢰도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특히 명씨 가문의 일로 범한은 명예가 손상되었으니, 분명 황제는 자신의 사생아가 스스로를 낮춘 것에 대해 애석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자신이 대승을 거두는 국면이었다.
‘그러니 군산회는······.’
범한의 입가에 잠시 냉소가 흘렀다. 경도 진원에 있는 늙은 절름발이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범한은 이 일을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화근인 호랑이를 키우려면 그렇게 해야 하니까 말이다.
군산회를 완전히 섬멸하는 건, 우선 성공하기 어려운 일이다. 범한이 사방을 뒤지고, 가진 힘을 절반을 잃는 모험을 해도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경묘 2 제사인 삼석 대사만 봐도 군산회에서 버린 말이 아니던가. 그러니 아무리 이름만 있는 느슨한 조직일지라도 그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실력이 숨겨져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버지와 늙은 절름발이의 도움으로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워 군산회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해 강남과 황권을 안정화시켰다고 해보자. 그래도 황제 폐하는 범한에게 군사를 지휘해 싸우는 걸 허락하지 않을 텐데. 범한이 대체 뭘 더 할 수 있을까? 한창 젊은 나이에 어두컴컴한 감찰원 방에 처박혀서 늙어 죽을 때나 기다려야 하는 건가?
범한은 제2의 진평평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모순들에 대해서는 급히 박멸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모순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두고 천천히 꽃을 피우도록 하고 싶었다. 독을 머금은 꽃처럼 말이다.
물론 범한은 오늘 포월루에서의 생각이 늙은 절름발이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할 줄은 몰랐다. 늙은이와 젊은이가 대놓고 말할 수 없는 목적을 위해 아무도 모르게 노력을 하고 있던 것이다. 한데 아쉽게도 두 사람은 서로 의견을 나눌 의향은 없어 보였다. 혹시······ 서로 연루되는 게 싫어 그런 것일까?
군산회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겠다고 해서 군산회에 맞서지 않을 거란 의미는 아니었다. 군산회는 강남에서 범한을 몇 차례나 모함하려 했으므로 범한은 그걸 대갚음해 주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흑기가 산길을 통해 쥐도 새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몇 개월 동안 계산해 본 결과 유일한 허점은 군산회의 회계 주 선생이었다.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더군다나 명청달과 자신의 쌍방 감시 속에서도 아무도 모르게 도주했으니, 이는 곧 그가 군산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주 선생은 어쩌면 군산회의 진짜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한편 해당타타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라 범한의 미간에 옅은 걱정이 드리워졌다. 그 주 선생은 분명 매우 고강한 인물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게 분명했다.
범한이 난간에서 물러나 의자에 앉은 후 등자월에게 분부를 내렸다.
“총독 관저에 연락을 넣고, 체포 공문 발행도······.”
범한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
“주 집사의 용모파기는 명씨 가문에서 보내왔군요. 그걸 총독 관저로 보내고 양쪽에서 동시에 조사를 하도록 하죠.”
등자월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대인에게도 별다른 묘수가 없다니. 관의 힘을 빌려 외부적인 압박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라니. 그리고 등자월도 알다시피, 용모파기는 죽은 큰 노마님을 곁에서 모시던 여종이 그린 것이었다.
범한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주 선생이란 자를 산 채로 잡아 온다면······ 자월이 보기에도 너무 묘한 감이 있지 않아요?”
* * *
“생각해 보니 정말 묘하군.”
포월루 꼭대기 층에는 범한이 앉은 탁자에만 사람이 있었고 다른 곳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하필 범한이 말을 마친 순간 난간 쪽 탁자로 느닷없이 두 사람이 들이닥치더니 찬바람이 쌩쌩 도는 음성으로 범한의 말을 짧게 받아쳤다.
순간 챙, 하는 금속 소리가 울려 퍼지며 꼭대기 층에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고달을 필두로 한 일곱 호위는 어느새 유난히 긴 장도를 손에 쥐고 범한 앞에서 산(山)자 대형으로 서서 그를 엄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측면에서 십여 명에 달하는 감찰원 6처 검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장검이 있었지만 뽑아 들지 않았다. 대신 검은 칠을 해서 반짝임을 모두 없앤 살기등등한 기운을 뿜어내는 쇠뇌를 들고 탁자 앞에 나타난 두 사람을 겨누고 있었다.
텅텅 비어 있다시피 한 곳에 쥐도 새도 모르게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도 감찰원 6처의 검수를, 호위를, 그리고 이미 내상을 모두 치료한 범한을 속이고 말이다.
대체 어떤 경지에 오른 사람이기에!
한데 범한의 방어 능력도 만만치 않았다. 순식간에 두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졌으니까.
십여 개의 쇠뇌, 여기에 해당타타와 충분히 맞설 수 있는 일곱 호위, 그리고 또 일찌감치 9등급 경지에 올라선 범한까지. 이에 모두들 동이성의 운지란이 온다 해도, 북제의 랑도 대인이 온다 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눈앞에 펼쳐진 공격진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중 한 사람은 억지로 웃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고, 삿갓을 쓴 다른 한 사람은 온몸에서 싸늘한 기운만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도 이 많은 사람들이 아예 무시하듯 말이다.
삿갓을 쓰고 있던 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 이상한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꼭대기 층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그의 두 눈은 이미 죽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양 싸늘했다.
“주 선생을 바란다고? 이 분이 주 선생이네만.”
말을 꺼낸 사람은 쇠뇌와 대치 중인데도 봄바람 속에 앉아 있는 듯 자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 너머에 있는 범한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패기를 드러냈다.
“하나, 자네에게 넘기지 않을 거네.”
범한도 호위들의 옷자락 너머로 그 사람을 보고 있었다. 범한은 가슴이 살짝 떨렸지만 그래도 차분하게 입을 뗐다.
“당신이 주 선생을 보호하고 있었군요. 어째 해당타타가 돌아오지 않는다 했더니······. 사람을 내줄 생각이 없으시면서 무엇하러 저를 만나러 온 겁니까? 나는 불청객과는 대화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이 싸늘하게 말했다.
“거래를 하자. 흑기를 철수시키면, 내 너의 목숨만은 살려주마.”
‘너의 목숨만은 살려준다고? 이런 상황에서 고작 한다는 말이 너의 목숨만은 살려 준다고?’
바보가 아닌 이상은 자신감이 넘치기 때문에 한 말인데. 한데 상대방이 절대 바보가 아니라는 건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상대방은 현 상황에서도 자신을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실력자란 의미였다.
이에 범한은 오히려 웃어 보이며 물었다.
“해당타타는 무사합니까?”
그러자 상대방이 갑자기 괴상하게 눈을 희번덕거리며 대답했다.
“여자는 어지간해서는 죽이지 않는다.”
범한이 미소 지은 얼굴로 대꾸했다.
“그럼 잘됐네요······ 놓아주죠.”
갑자기, 그것도 뜬금없이 등장한 ‘놓아주죠’.
이 한마디에 감찰원 6처 검수들이 쇠뇌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맹독이 발린 쇠뇌의 화살 삼십여 발이 세 차례에 걸쳐 연속으로 발사되었다. 화살은 죽음의 빗물처럼 촘촘히 탁자 쪽을 향해 날아갔다.
주 선생이니 군산회 따위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일단 앞에 있는 저 두 사람을 죽이면 범한도······ 의기양양하게 굴어도 되지 않을까? 범한이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