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화 지금은 한 발짝 물러날 때
범한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만약 명씨 가문이 정말로 반란을 일으킨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말로 흑기를 소주로 불러들여 명원 사람들을 도륙해야 할까요? 그렇겠군요. 명씨 가문의 여섯 형제를 몰살시키면, 핏물이 강을 이루고, 시체가 들판을 가득 채우겠죠. 하나······ 그렇게 한들 내게 무슨 이득이 있죠?”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차례 정화 작업을 한 후에 조정의 힘을 빌려 명원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우겠지요. 그러면 반년도 안 돼서 온 강남 사람이 찍 소리도 못하게 될 겁니다. 조정은 명씨 가문의 거대 자산을 순조롭게 접수할 테고, 그러면 모든 건 황제 폐하의 계획대로 되는 거지요.”
범한의 얼굴이 순간 싸늘해졌다.
“하나, 그렇게 한들 내게 무슨 이득이 있죠?”
등자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사 대인이 ‘그렇게 한들 내게 무슨 이득이 있죠?’를 두 번 반복하고, 무의식적으로 황제 폐하의 계획과 대립각을 세우자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어 감히 무어라 대꾸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등자월도 잘 알고 있었다. 명씨 가문 사람들을 몰살시킨다면, 정말로 그런 무서운 풍파가 인다면, 명씨 가문에게 반역의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임에도 황제 폐하께서는 분명 승인을 해주실 것이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강남의 민심을 어루만지기 위해 감찰원도 엄히 제재를 받게 될 것이고, 결국 제사 대인에게도 안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었다.
조정을 위해 일하지만 명씨 가문의 가산을 국고로 귀속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본적인 이익부터 내놓아야 할 터. 그러니······ 범한이 그런 미련한 짓을 할 리는 없었다.
“이게 바로 내가 처음에는 하서비를, 그리고 명시 가문 넷째를, 마지막으로 명청달을 필요로 했던 이유랍니다.”
범한이 온화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갔다.
“강남의 국면은 혼탁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맑은 상태에요. 황제 폐하의 심복인 설청은 본관이 강남의 물을 흐리는 걸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는 중이고요. 명씨 가문의 재산을 국고로 귀속시키는 건 평화롭게 이뤄져야 하는데······.”
범한이 살짝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며 말을 이어 갔다.
“너무 급히 처리하면 황제 폐하께서는 언제든 나를 버리실 거고. 자월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분명 이해했을 거예요.”
등자월의 심장에 어마어마한 한기가 밀려 올라왔다. 그는 제사 대인이 하필이면 왜 자기 앞에서 황제 폐하를 언급한 건지, 게다가 왜 이런 금기시되는 이야기를 자기에게 해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나를 시험해 보시는 건가?’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은 그동안 군산회의 중요 인물이었어요.”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그녀가 있는 한 나는 명씨 가문을 평화롭게 거둬갈 수 없고요. 그녀의 죽음이 나를 곤란하게 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이 결과물을 받아들일 겁니다.”
범한이 등자월의 두 눈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줄곧 내 곁에 있었으니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내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는 걸.”
등자월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말없이 예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범한이 신풍관 꼭대기 층의 난간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상복을 입고 있는 거리의 군중을, 그리고 저 멀리서 바삐 일하고 있는 향 가게를 바라보았다. 소주성 전체가 죽은 노부인 때문에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귀족과 높은 사람이 이곳에 얼마나 많이 운집한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모두 영정을 모시는 곳으로 들어가 제를 올릴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뒤따라온 등자월이 아래쪽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명씨 가문을 대적하는 데 많은 방법이 있지만, 지금의 국면은······ 최선의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명청달이 맨 마지막에 쓴 수가 나를 곤란에 빠뜨렸다고 한 건데······. 나중에 다시 찾아오죠, 뭐.”
현 강남의 상황을 보면,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의 죽음에 의문의 여지가 가득했고 명청달은 범한과 뒷거래를 한 상태였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상황만 보면 명씨 가문은 신양 쪽에서 여전히 무언가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드러나지 않은 부분에서는 과거와 많은 차이가 생겼다. 일단 범한은 강남에 눌러앉아 황실 금고의 해외 밀무역을 대대적으로 밀어붙이는 중이었는데 명씨 가문의 견제가 줄어든 덕분에 훨씬 수월하게 일을 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범한이 지불한 대가는 뜬구름 같은 명성뿐이었다. 그리고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민심을 소란케 한 건, 범한이 봤을 때, 황제 폐하로부터 훈계는 듣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자업자득 같은 결과를 범한은 오히려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 여러 내막이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자신의 결정에 영향을 미친 내막과 관련한 정보는 등자월에게는 말해주지 않았다. 이를 테면, 왜 흑기를 소주성으로 움직이지 않았는지, 또한 왜 황제 폐하께서 자신을 버릴까 두려워하는지 같은 것 말이다.
범한이 봤을 때 지금 천하에 자신과 같은 젊은 권신이 등장해 거대한 권세를 지니게 된 건 매우 특별한 경우였다. 물론 아직까지는 황제 폐하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기는 해도, 제왕이란 언제든 마음이 돌변할 수 있는 사람 아니던가. 그리고 황제 폐하의 최근 몇 년 동안의 행보를 보면, 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줄곧 자신을 면밀히 주시하고, 자신과 군측이 관계를 맺는 걸 철저히 막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흑기를 소주로 들인다? 범한에게서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나왔다. 결과는 엉덩이로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그 정도의 강력한 수단을 동원하면, 많은 이들을 두려워 벌벌 떨도록 만들 것이다.
최근에 경도 호부에서 일어난 풍파를 통해서도 범한은 더 많은 걸 명확히 보게 되었다. 황제 폐하는 장 공주의 세력을 제거할 결심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범씨 가문의 존재에 경각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호부의 국고 결손 사건을 가지고도 호부 상서 아버지를 물러나도록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명씨 가문의 일로 시끄러워진다면, 자신의 권력이 박탈당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권력? 말이야 쉽지. 그런데 이는 마약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맛을 들이면 벗어나기 힘드니까 말이다. 범한은 정신은 말짱했지만 손에 쥔 권력을 조금도 놓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만큼 권력의 맛에 길들여져 있어서였다.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고 누군가를 보호하려면 손에 권력을 쥐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 발짝 물러나고 두 발짝 나아간다 했다. 지금은 한 발짝 물러날 때였다. 그래서 일단 명성을 포기한 것이었다.
* * *
범한을 따르던 등자월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최근 국면이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8처 의견에 따라 제사 대인께서는 노부인의 영전에 향을 사르러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범한이 흠차 대인의 신분으로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을 문상한다면 현 국면을 완화하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범한은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등자월은 범한이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해가 안 가 살짝 어처구니가 없었다.
범한이 손을 뻗어 거리의 슬픔에 찬 백성들을 가리키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사실, 민심은 무섭지 않아요. 무서운 건 민심 위에 군림하고 그 민심을 이용하는 사람이지······. 그자들에게 만족감을 줄 겁니다. 백성들의 감정은 전체 국면에 영향을 주지 못하니까요.”
* * *
소주성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듣자하니, 큰 강 상류에 비가 많이 내려 사주 위쪽의 제방이 군데군데 무너져 조정 관원들의 관심 그곳에 집중되어 있다고 했다. 범한도 몸은 소주에 있었지만 관심만큼은 무너져 내린 제방에 가 있었다.
한편 양만리는 일찌감치 하운 총독 관아에서 일하고 있었고, 황실 금고의 은전과 국고의 돈도 모두 그곳에 도착한 상태였다. 이에 하운 총독이 보유한 은전의 양은 그 어느 때보다도 충분했다. 하지만 올해 제방 보수 공사가 너무 늦게 시작된 바람에 여름 홍수를 제대로 막을 수 있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강남에는 이제 갓 초여름 더위가 몰려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크게 내린 비 때문에 더위가 한풀 꺾이고 여분의 싸늘한 봄기운만 남아 있었다. 이에 강남 백성들의 울적함, 슬픔, 분노는 배가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큰 강 상류에서 집을 잃고 헐벗은 채로 떠도는 이재민까지 생각해 주는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명씨 가문 큰 노마님의 장례식이 곧 거행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이 모든 걸 냉정하게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등자월 말고도 총독 관아, 감찰원, 전운사의 부하들까지 범한에게 노부인의 영전에 향을 사르러 가는 게 좋겠다며 권유를 했다. 흠차 대인으로서 도량을 보여주어야 경국의 백성들이 조정에 경외심을 갖고 다시는 소란을 피우지 않을 것이라며 말이다.
하지만 범한은 고집스레 그 제안을 거절했다. 범한에게는 한낱 노인의 장례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죽음에 신경 쓰느라 큰 강 상류 지역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어서였다.
한데 흠차 대인의 도량을 두고 관원들은 탄식과 걱정을 하고 있었다.
‘설마 흠차 대인께서는 민간에 흐르는 암류를 감지하지 못하신 건가?’
* * *
월말, 명원에서는 곡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흰 천히 높이 걸린 넓은 곳에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이날은 장례를 치른 지 이레가 되는 날이었다.
7일장이 끝나면 바로 부고를 해야 했다. 경국의 장례 의례에 따르면, 7일 후에는 친지, 친구 심지어 적에게도 사망 소식을 알려야 했는데······ 생전에 원수지간이 된 사람에게도 부고 의례는 건너뛰어서는 안 되었다. 이 의식은 죽으면 모든 은원이 사라진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한 취지로 존재했다. 그래서 생전의 원수일지라도 부고를 듣고 직접 영전에 찾아와 조문하면 시시비비가 매듭지어지고, 그때부터는 음양의 도에 따라 둘 사이의 은원은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줄곧 소주성에 머물며 부고 의례를 기다리고 있던 높은 관원과 귀족들은 명원에서 흰 첩(帖)을 보내오자 속속 의복과 몸가짐을 정돈하고 명원으로 향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눈이 모두 화원(華園)으로 쏠려 있었다. 장례 의례와 명씨 가문 큰 노마님의 신분 및 지위를 고려했을 때 부고용 흰 첩이 화원의 흠차 대인 손에도 들어가야 해서였다. 그리고 흠차 대인이 대체 어찌 나올지는 그가 이 흰 첩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명원에서 흰 첩을 보내자 화원에서는 명씨 가문의 셋째 어르신만 공손히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차를 대접한 후 배웅해 주었는데, 화원에서는 흰 첩을 받지 않았다.
명씨 가문의 셋째 어르신이 화원 밖에서 불같이 화를 냈다.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한바탕 퍼부은 것은 물론 화원 돌계단 위에 침까지 뱉어버렸다.
그러자 하인이 튀어나와 물을 뿌리고 침을 깨끗이 닦아냈다.
천하만사와 만물은 모두 이치에 따라 흘러가야 하는 법. 그리고 일반 백성들이 마음으로 망자를 기리는 건 인지상정 아니던가. 그런데 흠차 대인이 망자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자 강남 백성들은 경악한 것으로도 모자라 분노에 휩싸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