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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71화 (471/1,108)

471화 성에 가득 내린 서리와 그 아래 깔린 검은 진흙탕 (3)

범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번 황실 금고 저택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밥그릇을 잡을 때는 용이 토해낸 여의주를 잡듯이 하고, 젓가락질을 할 때는 봉황이 부리로 쪼듯이 해야 하며, 밥을 8할 먹었는데 배부르면 남은 건 싸가야 하고······. 사람의 도리와 일을 하는 방식은 모두 밥 먹는 것과 같으니, 자세가 멋져야 할 뿐만 아니라 분수에도 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범한이 명청달의 두 눈을 주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나와 협의한 내용 중 사람은 내게 넘겼어요. 하지만 뒤에 나온 건 원래 내용에 없었는데······. 그 일을 내게 통보도 않고 독단적으로 했더군요. 그래서 지금 본관이 난처해진 거고요.”

묵묵히 듣고만 있던 명청달이 한참 후 나지막한 소리로 대꾸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명씨 가문이 제 수중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려면 앞길을 막고 있는 사람을 그만 쉬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는 대인께서 충분히 이해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이해하고 넘어갈 게 따로 있지. 본관의 윤허도 없이 멋대로 일을 벌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건 아예 다른 일이에요.”

범한이 계속해서 엄하게 타일렀다.

“내 수하를 명원에 들인 걸 가지고 이번 일을 깨끗하게 감출 수 있을 거라 여기면 안 되죠. 명심해요. 본관이 이번 일에서 너무 큰 대가를 치렀고, 강남 전체가 날 주시하게 됐다는 걸 말이죠. 그러니 어떻게 해야 이번 사태를 되돌려 놓을 수 있는지 생각을 좀 해보라고요.”

명청달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건 이 명청달의 잘못입니다. 그러니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 악독한 늙은 여우를 전혀 믿고 있지 않았다.

흠차 대인이 노여움이 살짝 풀린 얼굴을 하고 있자 명청달은 그제야 대담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대인······ 명원에서 갑자기 감찰원을 에워싸고 공격했던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일은 조사를 하셔야 합니다.”

그의 말에 범한이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명씨 어르신이란 자가 마음만 악독한 게 아니라 자신과 맞먹을 정도로 낯짝도 두꺼워서였다. 이에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을 외부인이 듣게 되면 얼마나 놀라워할지 궁금하군요. 떳떳한 명씨 가문의 가주가 감찰원에게 명원을 조사하라고 부추기다니 말입니다.”

그러자 명청달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그리 하지 않는다면, 대인께서 어찌 이 사람의 말을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염려 말아요!”

범한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내 신분과 지위가 당신과는 다르고, 당신이 내게 주 선생이란 자를 건네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고 해도 나는 당신과의 약속은 모두 지킬 겁니다. 그러니 여섯째는 내가 처리할 터이니 너무 조바심내지 말아요.”

“하오나······.”

범한이 명청달의 두 눈을 바라보며 압박을 했다.

“또 앞서 했던 말을 반복해야겠군요. 당신 때문에 본관이 곤란해졌어요. 지금 온 강남 백성이 본관을 씹어 먹으려 혈안이 되어 있지요. 그러니 어떻게든 이 일을 처리해 놔요. 그렇지 않으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 건지 잘 알 겁니다.”

명청달이 진정성이 있어 보이게 허리를 굽히며 범한의 명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그러고는 다시 소심하게 질문을 던졌다.

“한데 넷째는?”

범한은 침묵으로 답을 해주었다.

명청달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흠차 대인에게 자신의 약점을 더 많이 쥐어 줘야 그가 안심하고 자신을 명원의 주인으로 있도록 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감옥에서 넷째를 죽이려던 사건과 관련해서도 감찰원은 증인을 데리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언제든 그 증인을 이용해 자신을 죽이려 들 수도 있고 말이다.

범한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명청달을 쓱 바라보며 생각했다.

‘명씨 가문의 넷째 패를 지금 쓸 수는 없지! 감옥 급습 사건에 대해 추궁하지 않는다면, 넷째 어르신이란 이는 아무 소용도 없는 존재야. 그런데 막상 추궁을 하고 나면 그는 죽은 패가 되지. 한데 그렇게 죽어버리면 너무 아깝지 않겠어?’

“지금 명씨 가문 사람들은 감정이 너무 격해 있어요. 그러니 큰 노마님의 심복을 제거하는 일은 일단 서두르지 말아요.”

범한이 신신당부를 해놓고는 갑자기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은 당신이 나보다 더 잘하는군요. 내가 괜한 말을 했어요.”

그러자 명청달이 서둘러 공손히 받아쳤다.

“모두 흠차 대인께서 가르쳐주신 덕분입니다.”

“됐습니다.”

범한이 입꼬리를 쓱 올리며 명청달의 아부를 딱 잘라버렸다.

“마지막에 등장한 사나운 수단들은 본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 밖에······.”

범한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잠잠해지면, 하서비를 다시 가문으로 들이는 일에 착수해 줘요.”

명청달이 고개를 홱 치켜들고는 평온해 보이지만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 그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께서는 아직도 저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그런 실속 없는 말은 그만합시다.”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이 나를 믿지 않는다는 건 피차 아는 사실 아닙니까. 그러니 나에게 당신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고, 하서비야 말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거죠. 다시 말해, 그가 명원으로 들어가 있지 않다면 당신과 나 사이의 협의는 이뤄지지 않은 겁니다.”

명청달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지더니 호흡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청성이는 어렸을 적 저와 사이가 나빠 제게 원한이 깊을 수 있습니다. 흠차 대인의 명령으로 제가 양보를 한다고 해도, 어머니의 죽음으로······ 사람들의 감정이 격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청성이가 대인의 심복인 걸 모두 다 아는지라, 가문 안으로 다시 들였을 때 집안사람들이 반발할까 우려됩니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직접적으로 말했다.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데 이러는 겁니까? 온 강남 사람이 나를 증오하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고작 몇만 명 되는 당신네 일족의 반발이나 신경 써야 하는 겁니까? 현 시국은 당신이 만든 거예요! 그러니 가문 사람들의 반발은 알아서 해결하고, 내게는 결과만 가져와요! 과정은 당신이나 걱정하란 말입니다.”

명청달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건······ 정말 어려울 것 같은데요.”

“어려울 것 없습니다.”

범한이 비웃듯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본관은 당신의 처리 방법이 줄곧 마음에 들었어요. 한데 큰 노마님이 돌아가셨는데도 감찰원은 조사할 자격이 없기에 사람을 보내 무덤을 지켜보도록 했지요. 당신이 난처해지는 게 본관이 난처한 것보다 나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본관이 더 이상 참지 않게 된다면, 당신은 평생 괴롭게 지내야 할 겁니다.”

감찰원에서는 명청달의 약점을 충분히 확보해 두었다. 이에 명청달이 다시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범한에게 곤란한 일이 닥치기 전에 그부터 난도질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일이 이즈음 되자 명청달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노련한 계획 덕분에 자신이 가문의 주인 자리에 앉을 수는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그게 언제 터질지 모를 화산 꼭대기에 궁둥이를 디밀고 앉은 것뿐이란 걸 말이다. 특히나 자신이 마지막에 흠차 대인을 속이고 저지른 일 때문에 감찰원이 명씨 가문을 위협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범한의 화를 단단히 돋우기는 했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범한이 체면을 벗어던지고 대놓고 위협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노골적으로 위협이 들어오자 명청달은 범한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저지른 수많은 대역무도한 일 때문에 결국에는 상대에게 한방에 먹고 만 것이었다. 분노가 치민 명청달이 고개를 들어 흠차 대인을 바라보았다.

“대인, 계산을 참 잘하시는군요.”

이를 들은 범한은 분노는커녕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명 어르신은 계산하는 걸 좋아하는데. 지금 본관의 계산에 당했다고 여기고 있으니,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겠군요. 하나 본관을 너무 대단하게 보지는 말아요. 나는 그쪽 방면으로는 정말이지 재능이 하나도 없거든요.”

범한이 어조를 바꾸어 싸늘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욕망이 없어야 경지에 오를 수 있거늘. 한데 명씨 어르신은 원하는 게 너무 많아 도리어 본관에게 많은 기회를 준 겁니다. 소위 계산이란 것에 대해 본관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음모란 건 직접적으로 두려움을 줄 수 있는 힘만 못하다고 말이지요. 이리저리 계산만 해대면 엄한 목숨만 잃게 될 테니 말이지요······. 명씨 어르신,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좀 합시다. 좀 더 믿을만하게 일을 하란 말입니다.”

명청달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만 물러가 봐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지 않았습니까. 이를 테면, 본관을 향한 가문 사람들의 원망을 어루만져주셔야지요.”

범한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훗날 새로운 계획이 있으면 사람을 보내 알리지요.”

범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전했다.

“당신이 군산회를 꺼린다는 걸 나도 알고 있는데······ 한동안은 그들과 반목하지 말아요. 본관에게는 군산회 내에서 지위를 가진 명씨 가문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명청달도 지금은 달리 방도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던 터라 일단 그러겠노라 대답은 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의 뒷모습이 살짝 구부정해지더니 나이든 노인처럼 걷기 시작했다.

* * *

명청달이 떠나자 감찰원 계년조 우두머리인 등자월이 장막 뒤에서 나왔다. 어찌나 놀랐는지 얼굴에 드러난 기색은 감추려 해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제사 대인과 명씨 가문의 주인이 물밑 협의를 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게 된 것이었다.

등자월은 범한의 지시에 따라 자리에 앉았지만 그래도 입을 떡하니 벌린 채 멍하니 있었다. 한참 후, 등자월이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입을 뗐다.

“생각지도 못한 일입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생각지도 못할 게 뭐 있습니까? 명청달은 똑똑한 사람이에요. 이게 조정의 의중인 걸 알고 있었고, 조정에 맞설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수만에 이르는 명씨 가문 사람을 위해 생계를 지키고 싶었는데······ 그 점에서 자신의 어미와 좁힐 수 없는 견해차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나를 찾아오지 않으면 또 누구를 찾아갔겠습니까? 물론, 내가 그자를 얕보기도 했어요.”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 갔다.

“맨 마지막에 그런 수를 쓸 줄 몰랐으니까. 그 일이 터진 후 강남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주시하고 있어요. 설청 대인까지 크게 놀라셨고요. 그러니 조정의 향배와 상관없이 명씨 가문을 향한 압박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어요. 명청달은 한편으로는 관과 결탁해 가문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어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악독한 수단으로 천하 백성들의 마음을 선동해 가문의 단기적인 이익을 보호했지요. 역시나 실망하려야 실망할 수 없는 인물이네요. 한데······ 그도 딱 하나 놓쳤더군요. 그가 나를 이용한다면 나 또한 그를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문제는 내 뒷심이 그자보다 충분하다는 데 있어요. 그러니 그자는 결국 내게 이용만 당하게 되겠죠. 모두가 꼭 하나씩은 놓치고 있더군요.”

범한이 정색을 하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나와 설청 대인이 나눈 대화만 봐도, 사실 그분을 겁준 거였어요······. 여러분도 내가 명씨 가문을 쓸어버릴 거라 생각했지요. 사실 아예 불가능한 일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명청달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겁니다.”

등자월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제사 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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