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화 성에 가득 내린 서리와 그 아래 깔린 검은 진흙탕 (1)
설청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범한이 명원에 심어둔 자가 대체 누굴까? 궁금했지만 물어보기도 뭐해 설청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 후로 강남 지역의 최고위층 두 사람은 말없이 명원에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소식이 왔다. 총독 관저의 고문이 설청에게 다가가 한동안 속닥거렸다.
한동안 말없이 있던 설청이 범한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측에서 자네가 예상치 못한 방법을 내놓은 것 같으이······. 내가 병사를 움직여야겠네.”
범한이 아주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설청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병사를 움직이는 건······ 자네 수하들의 안전을 위해서네. 자네가 명원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걸 막기 위해서가 아니고 말이네.”
말을 마친 설청은 더 상세히 말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경황이 없는 얼굴로 서둘러 서재를 나섰다. 범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 밖에 있던 계년조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다.
원래 소식을 더 빨리 가져온 쪽은 감찰원이었다. 그런데 이곳이 총독 관저다보니 정보를 전달하는 데 있어 오히려 총독 쪽 사람보다 늦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명원에서 발생한 일을 들은 후 범한도 설청 총독처럼 입을 살짝 벌리고 얼굴에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범한이 탄식을 했다.
“기발하군. 나 보다······ 더 기발해.”
범한은 순간 황당한 기분이 욱하고 치밀어 올라 욕을 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삼켜버리고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점차 평온을 되찾은 범한이 지시를 내렸다.
“등자월에게 모두 철수시키라고 전하게.”
“저들이 공격해도 받아 주지 말고, 욕설을 퍼부어도 대꾸하지 말라고 하게.”
계년조 관원이 명령을 이행하러 나가자 범한도 총독 관저 겸 관아인 곳의 대문을 나섰다. 그사이 범한의 눈에 비친 건 허둥지둥하는 광경뿐이었고, 속사정을 모르는 관원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들은 총독 대인께서 왜 갑자기 소주성 시찰에 나서려 하시는지, 왜 성내에 있던 모든 무관을 총독 관아로 모이라고 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범한에게는 저들과 함께 공무를 논하는 데 참여할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잠시 뒤에 있을 일 때문에 파란이 일면 설청 대인을 달래느라 고생하게 될 게 뻔했고, 또 자신에게는 처리해야 할 다른 일이 있어서였다.
마차에 올라탄 범한이 미간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갑자기 호위 고달에게 두서없이 말을 툭 던졌다.
“사실 상당수의 경우, 일이 어떻게 흘러간 건지는 사람이 죽은 순서를 보면 됩니다.”
고달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로서는 제사 대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거였다.
범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정말로 그 사람을 죽여 버리고 싶었어요. 한데 내가 죽이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죽어버렸으니, 우리에게는······ 문제가 되겠죠.”
“누가 죽었습니까?”
고달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강남 백성들 눈에 그 집 제일 큰 어른은 빈곤한 백성을 수도 없이 많이 구한 분이에요. 큰 노마님 말입니다.”
범한이 미소를 지은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감찰원이 명원으로 쳐들어온 굴욕감을 참지 못해서, 또 작은 범 대인이 여러 날 압박한 걸 견디지 못해서 오늘 오전에 분한 마음에 목을 맸답니다.”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이 자살을 했다고?’
고달은 깜짝 놀랐다. 그도 경도에서 온 사람이었지만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이 강남에서 어떤 위신과 지위를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죽음으로 억울함을 호소하겠다는 거군!”
범한이 웃으며 욕을 했다.
“명청달은 정말 악랄하군! 제 어미보다도 악랄해!”
* * *
사실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은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물론 이런 건 말할 가치도 없지 않은가. 이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이 아무리 요 몇 년 새 하루가 다르게 늙고 기력이 노쇠해지고 있다고 해도, 또 강남 일대에서는 여한이 복을 없이 누렸다고 해도, 그녀에게는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명씨 가문은 강남에서는 훌륭한 명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게를 열어 백성들에게 죽도 나눠주고 어려운 서생들에게 도움도 주고. 그들은 수도 없이 많은 선행을 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에게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은 자상한 눈으로 세상을 굽어살피시고 온몸에 사랑을 담은 찬란한 옷을 입으신 신선이었다. 그래서 강남 민간에서, 심지어 오지에서도 그녀를 위한 생사당(生祠堂: 선정과 선심을 베푼 이를 위해 살아생전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짓는 사당)을 짓기 시작할 정도였다.
최근 들어 그녀는 감찰원의 물샐 틈 없는 압박을 막아내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일찌감치 대응책까지 마련해 둔 터였다.
오늘 새벽, 감찰원 밀정이 명원을 수색할 거란 소식에 노부인이 크게 노해 욕을 내뱉었다.
“명원이 건립된 이후 관아에서 수색을 받은 적이 있는 줄 아느냐? 총독 대인도 이곳에 들어오면 예를 갖춰주시거늘. 빌어먹을 감찰원 놈들 같으니!”
그녀의 거처는 명원 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던 터라 감찰원이 시끌벅적하게 수색해도 그곳에서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굴욕감에 분노가 치밀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한마디 해버렸다.
“이제는 우리 집안을 욕보이기로 한 것이냐!”
그녀 곁에 서 있던 이는 명씨 가문의 명의상 주인이자 장자 명청달이었다. 어두운 낯빛을 하고 있던 그는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알고 있던 터라 작은 소리로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떠났습니다. 한데······ 넷째도 제게는 형제가 아닙니까.”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이 싸늘하면서도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아들을 쓱 바라보며 생각했다.
‘마음이 저리 모질지 못한데 어찌 큰일을 할 수 있을는지! 감찰원이 강력하게 공격을 해오고 있는데, 경도의 판세가 뒤집히는 날까지 저 아이가 과연 집안을 이끌고 갈 수나 있을까?’
“마음을 더 모질게 먹거라.”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명청달은 어머니의 얼굴 가득한 주름을 잠시 바라보더니 얼굴에 효심 가득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감찰원이 오늘 명원까지 들이닥친 건 주 선생 때문입니다.”
명청달이 나이 많은 모친을 쓱 바라보고는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어머니께서 보시기엔······ 아닙니까?”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이 아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들의 말뜻을 잘 알고 있었다. 한데 주 집사는 명씨 가문의 집사장이자 군산회의 회계로 너무나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만약 감찰원이 그를 찾아낸다면, 이는 범한이 군산회의 많은 정보를 쥐게 된다는 것이었고, 이는 곧 황제 폐하도 간접적으로 알게 되신다는 뜻이었다.
명원을 보전하기 위해서든, 군산회의 안전을 위해서든, 주 집사는 반드시 죽어야 했다. 한데 문제는······.
큰 노마님이 가볍게 탄식했다.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주 선생은 장 공주께서 우리에게 보낸 사람이다. 그를 죽이는 건 우리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야.”
“이제 곧 여기까지 수색을 하러 들어올 겁니다.”
명청달은 무표정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싸늘하게 냉소를 날렸다.
‘군산회라고? 명씨 가문 같은 부유한 상인 가문이 그 정도 층위의 조직과 가까이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이제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지경이 되어 벗어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지 않은가. 명청달은 어머니가 장 공주에게 강하게 엮여 있는 것에 대해 줄곧 불쾌함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군산회는 더더욱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큰 노마님이 천천히 눈을 떴다.
“염려 말거라. 주 선생은 안전할 거다.”
노부인이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리며 의심스럽다는 투로 말을 이어 갔다.
“한데 한 가지가 계속 마음에 걸리는구나. 주 선생이 명원이 숨어 있다는 걸 흠차 대인이 어찌 알았을꼬? 그리고 찾지 못할 경우, 천하 사람들을 어찌 대하려고 그러는지, 원!”
명청달의 심장이 ‘두근’, 하고 뛰었다. 그가 얼굴에 어머니와 똑같은 의혹의 기색을 내비추었다.
큰 노마님이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그새 피곤해졌는지 힘없이 고개만 가로로 내저었다. 그녀의 새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더욱 노쇠해 보였다.
“피곤하구나.”
큰 노마님이 귀찮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감찰원 개들에게 내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고 전해다오.”
“염려 마십시오, 어머니.”
명청달이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부축했다. 그리고 이미 그녀를 부축해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듯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제부터 어머님의 휴식을 방해하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큰 노마님이 경악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순간 양심의 가책, 두려움, 흉악함을 담고 있는 아들의 눈빛이 그녀에게 들어왔다.
아들은 그녀의 입을 막고는 무서운 기세로 그녀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
큰 노마님은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두 손도 친아들에게 꽉 잡혀버려 하는 수 없이 있는 힘껏 발길질만 해댔다. 하지만 자그마한 두 발은 ‘탁탁’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 헛발질만 해댈 뿐이었다.
큰 노마님이 무한한 공포, 분노, 미움이 수없이 번뜩이는 눈으로 근처에 있는 여종을 있는 힘껏 쏘아보았다.
큰 노마님이 집안에 얼마나 많은 측근을 두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들 어디 갔는지 지금 그녀 곁에는 측근이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종은 큰 노마님을 잠시 바라보고는 바로 천천히 몸을 돌릴 뿐이었다.
목에 걸린 밧줄이 점점 더 세게 조여와 큰 노마님은 숨을 쉴 수 없었다. 가슴은 불에 덴 것처럼 아팠고 시야는 혼미해져만 갔다. 그제야 큰 노마님은 모두에게 배신당했음을 알아차렸다. 배신감과 함께 후회와 미움이라는 감정이 강하고 진득하게 왈칵 올라와 입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음을 더 모질게 먹거라.’
‘큰일을 하려면, 당연히 희생품이 필요한 거란다.’
죽기 직전이 되니 자신이 했던 모든 말들이 한꺼번에 귓전을 맴돌며 그녀의 심장에 내리꽂혔다.
툭 튀어나온 그녀의 두 눈은······ 친아들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명청달은 최대한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녀의 양손을 꽉 붙잡았다.
오랜 시간이 지났을 수도, 어쩌면 아주 짧은 시간일 수도 있는 그 순간.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는 노부인이, 어둠 속에서 강남을 십수 년 동안 조종해 왔던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답답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몸에서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가 싶더니 두 발을 무기력하게 의자 아래로 툭 떨구고는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 * *
감찰원의 명원 수색은 순조롭지 못했다. 사람들이 대놓고 막는 건 아니었지만 등자월은 명원 사람들의 눈에 실린 노기가 점점 짙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아무도 모르게 감찰원 일행을 감시하고 있는 명씨 가문의 호위 무사들과 고용된 사람들은 언제든 무기를 빼 들 태세였다.
수색 작업은 부드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종일관 상자를 뒤엎고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는 일이 빈번하게 반복되었다. 사나운 늑대처럼 규방까지 밀고 들어가 수색을 하다 보니 명원 내 모든 사람들이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한데 등자월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범 제사께서 자신에게 진원에 들어가라고 했으니 분명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명원 사람들은 흉악한 눈빛으로 등자월을 바라보고 있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막아서지 못했다. 다만······ 명원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반나절을 수색했는데도 겨우 반밖에 수색하지 못했다. 그리고 주 집사란 사람의 행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후원을 수색해야겠네.”
등자월이 줄곧 자기 뒤를 따라오고 있던 명씨 가문의 장손 명란석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