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화 다들 놀랐을걸?
마차가 목적지까지 반 정도 왔을 때였다. 다른 마차가 나타나 범한의 마차에 타고 있는 넷째 어르신을 데려갔다. 그러자 마차에는 범한과 계년조 소속 몇몇만 남게 되었다. 호위(虎衛)들은 고달의 명에 따라 몸을 숨긴 채 마차 주변에 포진해 있었다.
“대인, 이제 어디로 가실 것입니까?”
부하가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답변을 해주었다.
“반 시진 더 기다려 본 후 적어 놓은 걸 가지고 총독 관저로 가지. 설청 대인을 다시 뵈어야겠네.”
범한이 부하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감옥은 잘 정리해 뒀겠지?”
그러자 부하가 자그마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소주부를 지켜볼 사람을 남겨 두었습니다. 이번에 명씨 가문은 탈옥 죄에서 벗어날 수 없겠으나, 그게······.”
“그냥 말해보게.”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명씨 가문이 넷째를 죽여 감찰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면, 일 처리를 이렇게 거창하게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설명을 해주었다.
“수법 따위는 중요치 않아. 중요한 건 시기니까. 오늘 감찰원이 명원 수색에 나섰네. 이런 상황에서 명씨 가문의 넷째가 대감옥에서 죽는다면, 어떻게 죽었는지를 떠나 명씨 가문에서는 후속 조치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 터······. 그자가 죽고 누군가가 그 시체를 발견하면, 강남의 모든 부호와 백성들이 내가 손을 썼다고 생각할 테니까.”
범한이 잠시 웃고는 말을 이어 갔다.
“명씨 가문은······ 내가 먼저 명원으로 들어오기만을 바라고 있었어. 그래야 준비해 놓은 졸(卒)을 버릴 수 있으니까. 한데 오늘 넷째를 죽이지 못했으니, 나로서는 명씨 가문이 그 비정한 계획을 어떻게 계속해 나갈지가 궁금하군.”
마차가 천천히 멈추었다. 그러자 길게 뻗은 소주성 길 위를 비추고 있던 아침 햇살이 사람들의 심장 위를 비추고는 다시 이 시커먼 사륜마차의 꼭대기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 풍광이 마치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의 얼어붙은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만 같았다.
명원 쪽은 벌써 시끌벅적해졌을 테지. 범한이 마차 가림막을 열자 호위들이 범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범한은 우뚝 솟아 있는 총독 관저 겸 관아의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감찰원에서 일찌감치 이름첩을 보내놓은 터였다. 이에 총독 관저에서는 문 앞에서 범한을 저지하지 않았다. 이때 고문 하나가 재빨리 걸어와 범한 일행을 안으로 들였다.
범한은 이번에도 같은 서재로 들어갔다. 역시 그 서재에는 여전히 설청 총독뿐이었다. 그렇게 방 안에는 전처럼 설청 총독과 흠차 범한 둘만 남게 되었다. 범한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뜻을 전하는 한편 감찰원 사람들이 이미 명원으로 진입했음을 총독에게 알렸다.
이미 일이 터졌다는 말에 강남의 실제 1인자인 설청 총독이 아주 미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그리고 탄식을 내뱉고는 느릿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서두르면, 될 일도 안 될 때가 있다네.”
강남에 있는 명씨 가문과 대적하는 건 경국의 황제 폐하가 정한 방침이었으니, 범한은 단순한 집행자에 불과했다. 설청은 황제 폐하의 심복으로 이번 일이 왜 일어난 건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실행 방법에 있어 그는 범한과 큰 의견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조정이 명씨 가문을 접수하는데 정해진 시간표 따위는 없었다. 황제는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강남의 거대 일족을 느긋하게 먹어 치울만한 인내심이 충분히 있었다. 그래서 설청 역시 너무 급하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이에 그는 시종일관 온건한 방법을 취했으며, 자신이 과하게 행동해 강남을 혼란에 빠뜨리고 조정의 통치 근간을 흔들게 되는 걸 경계했다.
이런 이유로 범한이 총독 관저 겸 관아로 밀고 들어와 명원에 진입했다고 말하자 설청은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범한이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고작 스무 살밖에 안 되는 젊은 권신이 몇 년 더 기다린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서두르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설청을 화나게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범한의 이번 조치는 자신을 향해 칼을 빼 들고 배에 오르라는 압박이기 때문이었다. 감찰원이 이미 명원으로 진입했으니, 양쪽에서 소란을 피우면, 강남 총독인 자신 때문에라도 한쪽의 안정을 보장할 수 있고 본래 기대했던 역량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어서였다.
그동안 설청은 승낙을 해주지 않고 있었다. 명씨 가문과 대적하는 데 그럴싸한 명분이 아직 없었고, 경도에서의 소문도 신경이 쓰여서였다. 그래서 이번에 범한에게 공격을 당하자 점점 노기가 치밀어 올라 목소리를 깔고 한마디 해버렸다.
“소란이라도 인다면 누가 책임지란 건가?”
범한이 차분하게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진지하게 대답을 했다.
“소란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설청이 범한을 싸늘하게 쓱 바라보았다.
“본관이 잘난 체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네보다는 연장자인데······ 이번 일은, 세심하게 처리하지 않은 거네. 명씨 가문이 근 반년 동안 약한 척 한 건 자네가 그들을 업신여기는 행동을 하는 날만 기다렸기 때문이야. 한데 오늘은 명원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했으니, 그들로서는 이번 기회를 놓치려 들지 않을 걸세.”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우리가 명원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들이 뭘 할 수 있을까요?”
설청이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았다.
“명씨 가문은 천 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어. 조정에서도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들이 조정에 세운 공을 봐서 계속 눈을 감아주고 있던 거야.”
인원수가 수만에 이르는 큰 가문이니 각양각색의 이유를 들어 사병을 천 명 거느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에 범한이 설청의 말에 저도 모르게 냉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그게 조정을 위해 공을 세워서입니까, 아니면 군산회를 위해 공을 세워서입니까?”
군산회란 세 글자에 설청이 잠시 침묵했다.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강남에 그 정도로 신비하면서도 무한한 실력을 가진 조직이 있다니. 이는 설청의 실책이라 할 만했으며, 황제도 밀서를 통해 이 점을 엄중히 문책한 바 있었다.
설청은 범한이 군산회라는 큰 명목을 가지고 자신을 압박 중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으며 질문을 던졌다.
“자네가 미리 세워뒀던 계획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범한이 잠시 아무 말도 않다가 입을 뗐다.
“명씨 가문이 그 집안 넷째를 죽여 감찰원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는데 제가 저지했습니다.”
“소주부에서 말인가?”
설청이 아주 살짝 놀랐다. 그리고 왜 범한이 이미 계획이 다 서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명씨 가문의 사병이 아무리 천 명이나 된다고 해도 대놓고 반역을 꾀하지 않는 이상은 제가 들여보낸 마흔 명의 사람들에게는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범한이 미소 지은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이 뒤로 물러남으로써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체 어디까지 물러날지 좀 보려고 합니다.”
설청이 눈을 반쯤 감았다.
“그들이 정말로 사병을 동원하지 못할 것 같은가? 자네가 쥐고 있는 건 성지가 아닐세.”
범한이 설청에게 팽팽히 맞섰다.
“성지는 들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천자께서 주신 명검이 있습니다.”
설청이 담담하게 말했다.
“명원은 분위기 전환용으로 몇 명을 희생시켜 마흔이 넘는 감찰원 밀정들을 묻어버릴 거네. 그리고 그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명검이라고? 명원은 충분히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낼 거고, 모른다고 딱 잡아떼겠지. 감찰원의 작은 범 대인이 자신들을 죽이고 가산을 빼앗으려 한 건 줄로만 알았다고 말할 거야. 어쩔 수 없이 반격한 거라면서 말이야······. 명심해 두게. 요 몇 달 동안 명씨 가문은 밑 작업을 정말 잘 해놨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 그런 일이 발생했으니, 천하 사람들은 명씨 가문을 믿어줄 걸세.”
범한의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다. 명씨 가문이 정말로 다급해진 상태라면, 그런 미친 짓을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명씨 가문의 강남 내 기반과 경도에서의 도움을 합치면 범한에게 이판사판으로 나올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감찰원이 먼저 명원으로 들어갔으니,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여론은 온전히 명씨 가문에게 기울어지게 되어 있었다.
한데 설청의 생각과 달리 범한은 그런 점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젊고 잘생긴 얼굴에 감정의 변화가 조금도 일지 않았던 것이다.
범한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입가에는 옅은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명씨 가문에서는 제가 손을 쓸 때만 기다리고 있고, 저는 명씨 가문에서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데 이왕 체면 따위 차리지 않기로 하고 정말로 제 수하를 건드린다면, 어찌 되었든 저는 그들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울 겁니다. 천하 사람들이 믿든 말든, 그 노망난 큰 마님이란 사람에게 반역이란 죄명을 뒤집어씌울 거란 말입니다.”
총독 앞에서 법을 무시하고 일 처리를 하겠다고 말해버리다니. 범한은 진짜 뵈는 게 없는 것 같았다. 한데 범한은 다음 말로 설청을 오싹하게 만들어 버렸다.
“당연히 그들이 반역을 저지를 거란 생각은 못 하겠지요.”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하나 일단 움직인다면, 여태 강북에 있던 흑기가 이곳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명원에 있는 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것입니다. 여섯 형제들의 가솔이 모조리 죽어버렸는데 대신 억울함을 호소해줄 사람이 남아 있을까요? 그 일을 강남의 백성들이 해줄까요, 아니면 강남의 부자들이 해줄까요?”
범한이 계속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경도까지 찾아가서 억울함을 호소한들 별수 있을까요? 황제 폐하 앞에서 소송을 건다 한들 또 어쩔 수 있겠습니까? 여섯 형제들의 식솔이 제 손에 모조리 죽고, 겨우 하서비 하나만 남을 것입니다. 뭐, 기껏해야 넷째 정도가 구색을 좀 맞춰주겠군요. 그래도 명씨 가문의 가산을 조정에서 가지게 될 테니······ 목표만 달성된다면, 조금 더러운 수단을 써도 되겠지요.”
범한이 고개를 돌려 설청의 두 눈을 응시했다.
“마흔 명이 넘는 감찰원 사람이 죽으면 저는 흑기를 소주로 불러올 것입니다. 그때 가서 저를 막을 수 있으실 것 같습니까?”
설청의 동공이 수축했다. 정말로 일이 그런 방향으로 흐른다면, 감찰원에서 마흔 명 이상의 관원을 포기한 건데도 자신은 강제로라도 흑기의 남하를 막을 테니······. 어쩌면 감찰원의 화를 극도로 돋우게 될 것이고,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을 화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자신이 아무리 1로 총독이라 할지라도 좋은 결말을 맞이하기 힘들었다.
범한의 온화하고 순수한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설청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젊은 관원을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감찰원의 범한 제사는 원래 눈 하나 깜빡 않고 살인하는 사람이고, 젊은 사람임에도 미치광이처럼 일 처리를 한다고 말이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명원 사람들을 학살하면 결국 범한에게도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설청은 당당한 작은 범 대인이 명씨 가문을 놓고 그런 도박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 말입니까? 기껏해야 모든 작위를 잃고 삭탈관직 되어 평민으로 강등될 것이고······ 더 재수가 없으면 세상을 유랑하지 않겠습니까?”
범한이 자신에게 닥칠 결말정도는 생각해 두었다는 듯 말하고는 하하하 웃었다.
“설 대인께서 모르고 계신 게 있습니다. 저는 천하를 떠돌아도 괜찮습니다.”
설청이 더 이상 그냥 봐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탄식했다.
“그렇다면 명원으로 들여보낸 마흔 명 넘는 수하들을······ 모두 버리려는 것인가?”
범한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닙니다. 가장 최악의 상황만 말해드린 것입니다. 하오나 악독한 명씨 가문의 모자(母子)를 보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을 겁니다. 도박처럼 보이지만 저는 이게 꼭 도박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를 막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두었는지, 상대방이 대체 어떤 패를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범한이 눈을 뜨고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가끔은 저도 도박꾼처럼 호기심이 일 때가 있거든요.”
“본관도······ 호기심이 이는군.”
설청의 눈꺼풀이 살며시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군산회 회계인 주 집사가 아직 명원에 있다는 자네 판단이 틀리지 않기만을 바라네. ”
“염려 놓으십시오.”
범한이 총독 대인을 고무시킬만한 말을 해주었다.
“명원에 제 사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