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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65화 (465/1,108)

465화 화창한 봄날 (4)

말을 마친 범한은 곧바로 앞서 계획했던 일들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서도 딱 부러지는 답변을 듣지 못해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 자신은 경도에서 최씨 가문을 박살낸 후 언빙운의 은밀한 계획에 따라 명씨 가문을 대적하는 중이었다. 한데 명씨 가문도 그에 못지않게 준비를 했으며, 그렇기에 그들이 허점을 많이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범한이 자리에 앉았다. 한데 차갑게 식은 의자에 앉은 탓에 그는 따뜻한 차가 든 찻잔을 손에 쥔 채 그것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사 대인만 바라보고 있던 부하들은 대체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광명정대한 방법만 가지고는 짧은 시간 안에 명씨 가문을 거꾸러뜨리기 어려우니 범한으로서는 감찰원의 음침한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 한데 강남이라고 해서 특별한 건 없었지만, 그래도 범한은 민간의 반응이 신경 쓰였다. 이 지역의 백성들이 몽땅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면, 감찰원으로서도 뒷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은 설청의 이랬다저랬다 하는 태도에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강남 총독이 나서주고 자신이 그 뒤를 따르면, 하나는 악역을 맡고 다른 하나는 착한 역을 맡아 어쩌면 훨씬 수월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어서였다.

그렇다고 범한이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는 건 아니었다. 조정과의 싸움에서 명씨 가문은 영원히 수동적인 방어만 할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그는 어떤 때는 느긋하게 명씨 가문을 가지고 놀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급히 명원을 수색하려는 건 얼른 군산회의 역할을 낱낱이 알아내고 싶어서였다.

힘겨루기에서 범한은 명씨 가문을 쓰러뜨릴 방법을 부단히 시험해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니 한 번으로 안 되면 잠시 쉬었다가 재도전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명씨 가문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이 거대한 일족에게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 한 번의 패배로 바로 진흙탕에 처박히는 신세로 전락할 수 있어서였다.

“제대로 준비를 해놓게!”

범한이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며 몇 마디 덧붙였다.

“언제든 명원으로 들어가 사람을 잡아들일 수 있도록 말이네.”

* * *

등자월은 갈수록 이해가 안 되어 결국에는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설 총독 대인의 결정은 기다리지 않으실 겁니까?”

그러자 범한이 싸늘하게 웃었다.

“내가 언제 다른 사람 보폭에 맞춰 일한 적 있답니까? 열흘이나 기다렸으니 설청 총독의 체면도 충분히 차려준 겁니다. 그러니 내가 손을 써도 설청 입장에서는 나를 악독하다며 비난할 수 없을 걸요.”

“강남 백성들의 반응은 어쩌죠?”

“반응이요? 내가 명씨 가문을 압박한다는 소문 말인가요? 차분하게 사라질 겁니다. 나 혼자서는 그들을 때리지도 죽이지도 못하는데, 어찌 압박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범한이 얼굴에 잠시 웃음을 흘려보내고는 말을 이어 갔다.

“다시 말하지만, 나에게도 다 생각이 있어요. 강남에 와서 명예가 훼손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건 나중에 천천히 주워 담으면 그만이에요.”

* * *

범한이 열흘이나 기다린 건 명원에 있는 주 집사장을 잡아들일 가능성이 없어서도, 단순히 민심을 걱정해서도, 또 설청의 승낙을 기다리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도에서 올 소식 때문이었다.

황실 금고의 공개 입찰 후 경도에 있는 장 공주파가 호부에게 공세를 퍼부은 사실을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범한이 아무리 강남에서 일을 진행하고 있다고는 해도 저들의 최고 우두머리는 경도에 있으니, 그곳의 판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한 범한으로서는 섣불리 손을 쓸 수 없었다.

다음날, 버드나무 가지에 앉아 있던 새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그러자 쾌마(快馬) 세 마리가 새벽의 엄호를 받으며 빠른 속도로 소주성으로 들어왔다. 성을 지키는 아속은 그들이 감찰원 밀정이란 사실을 알고 있던 터라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빠르게 내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소주성 화원 밖에서 멈추었다. 그러자 일찌감치 나와 있던 이가 말을 타고 온 세 사람을 화원 안으로 들였다.

쾌마는 감찰원에서 가장 빨리 소식 전달 수단으로 경국 조정의 역참 체계보다도 몇 배나 빠른 것이었다.

범한은 경도의 목철이 보낸 감찰원 보고서를 받아들고는 은근히 기뻐했다. 자신이 예측했던 것과 같은 결과여서였다. 즉, 호부는 무사했고 장 공주 측은 큰 손해를 입은 것이다.

하지만 세부 내용을 읽는 순간 총명한 범한은 황제 폐하가 범건을 무대에서 끌어 내리려 한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려 버렸다. 이에 기쁨에 살짝 들떠있던 범한의 얼굴에 순식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일어난 일을 생각하기엔 이미 늦어버린 터.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옆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던 감찰원 관원에게 말했다.

“명원으로 들어가서 그자를 잡아 오게.”

감찰원 관원은 범한의 명령을 이행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소주 3처 관아에서 적잖이 많은 관원들이 몰려 나와 조용한 새벽에 말발굽 소리를 울려대며 성 밖으로 나갔다. 40여 마리의 말에 나눠 탄 감찰원 4처 관원들은 등자월의 인솔 아래 광명정대하게 명원으로 향했다.

“조심들 하게나.”

범한이 고개를 돌려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군산회가 강남에 어떤 자들을 남겨뒀는지 아무도 모르니 말일세.”

꽃무늬 옷을 입고 있는 해당타타는 주머니에 양손을 쏙 집어넣은 상태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잠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아직 이른 새벽의 소주성 밖.

일찍 일어난 새들이 한바탕 지저귀더니 다시 나무 위 둥지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도로 위는 적막 그 자체였다. 그 시각, 시야가 탁 트인 넓은 곳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명원은 안에서는 물을 따르고 세수하고 양치하는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하게 들려와 모든 게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도로 위로 갑자기 수십 마리의 말이 나타났다. 그리고 말에는 감찰원 복장을 입은 이들이 타고 있었다.

수십 명이 무서운 기세로 명원 앞에 도착하자 근처 나무에서, 산 위에서 몸을 숨기고 감시 활동을 하던 이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일부는 명원을 조사하러 온 동료들과 합류했고, 첩자 중 일부는 쥐도 새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몰던 등자월이 명원 정문 앞에 도착하자 이내 말에서 내렸다. 그러자 뒤에서 따르던 부하들도 동시에 말에서 내렸다.

이 시각 명원은 고요했다. 하지만 등자월 눈에는 점점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담벼락 내측에 낮게 둘러쳐진 곳에 금속성 빛이 자신들을 잡아먹을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왼손 방향 쪽 감제고지에는 활시위가 팽팽히 당겨진 큰 활이 있었다.

상대방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저들의 무기가 한꺼번에 발사되기라도 한다면, 이곳에 모인 감찰원 관원은 몰살될 것이었다.

하지만 등자월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제사 대인의 판단을 믿고 있어서였다. 아무리 명씨 가문이 골수까지 비적일지라도 감찰원이라는 더 큰 비적 앞에서는 저들 역시 적극 공격에 나설 수는 없다고 말이다.

과연 그랬다. 명원 정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명씨 가문의 도련님인 명란석이 나왔다. 밤새 단 한숨도 자지 못했는지 눈이 살짝 충혈된 그가 공손하게 문 앞에 서서 왼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대인 여러분, 안으로 드시지요.”

* * *

마차는 소주부에서 겨우 두 거리 떨어진 지점에 서 있었다. 그리고 호위들은 그 주변에서 경계태세를 갖추고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이곳에 평민 복장의 감찰원 밀정이 다가와 요패를 건네고는 마차 창가로 다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보고드립니다.”

마차 안에 있는 범한이 물건을 받아들고 상세히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게.”

“명원에서 저항 없이 4처 사람들을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지금은 수색 중이고, 아직 아무런 성과가 없는 상태입니다.”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입을 열었다.

“주의하고, 자월에게 너무 거만하게 굴지 말라고 전해주게.”

밀정은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을 한 후 몸을 돌려 현장을 떠났다. 그리고 소주성에서 아침을 맞고 있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마차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소주부 방향으로 반 거리 정도 이동했을 때였다. 갑자기 길모퉁이에서 감찰원의 다른 밀정이 나타나 마차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나지막한 소리로 보고를 했다.

“나루터에는 수상한 움직임이 없습니다.”

범한은 아무런 말 없이 손만 휘휘 내저으며 그에게 그만 가보란 의사를 내보였다.

화원에서 소주부까지 가는데 소주성의 절반을 지나쳐야만 했지만 마차는 매우 차분하게 움직이며 사람들의 이목을 거의 끌지 않았다. 이에 소주성 백성의 대부분은 오늘 새벽에 감찰원 관원들이 기세등등하게 명원으로 들어간 걸 모르고 있었다.

화원에서 소주부까지 이동하는 동안 감찰원에서 임시로 배치한 연락책인 까마귀들이 각자 맡은 곳의 소식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명씨 가문과 맞서는데 필요한 모든 소식이 이동 중인 마차 안으로 취합되고 있었다. 이를 테면, 명원의 상황, 명씨 가문의 가게들이 평소와 다름없이 문을 연 것, 총독 관저 겸 관아에서의 대응 상황이 모두 실시간으로 마차로 전달되어 범한의 전반적인 사고를 돕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 마차는 오늘 감찰원 행동의 야전사령탑이었다.

범한도 무언가 이상했다. 명씨 가문이 약한 척을 하고 있어도 자기 때문에 체면을 구긴 상태에서 아무런 반격을 하지 않을 리는 없을 터. 그런데 뜻밖에도 총독 관아 쪽에서 긴장감이 고조 되고 있고 병력까지 움직였다는 소문이 새어나오고 있다니.

오늘 계획은 명씨 가문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주씨 성의 집사를 잡아들이는 게 가장 중차대한 사항이었다. 그리고 요 며칠 동안 감찰원이 명원을 밀착 감시를 했으니 주 집사란 자는 도망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감찰원에서 주 집사가 명원에 있다는 첩보를 이미 확보하였음에도 그 사실을 명씨 가문이 아직 모른다는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이 세상의 거대 가문은 외부에서 죽이러 대들어도 한방에 죽이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들을 정말로 위험에 빠뜨리려면 내부에서 소란을 일으켜야만 했다. 이는 조설근이 홍루몽에서 한 말이자 이 시점에 범한에게 감탄사를 내뱉게 한 이유이기도 했다. 주 집사가 몸을 숨긴 곳에 있는 사람이, 그것도 명원 내부에서 매우 강력한 권세를 지닌 자가 비밀 연락책을 통해 범한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방어가 삼엄한 명원에, 그것도 감찰원에서 십여 년 동안 상층부에 첩자 하나 심어 놓지 못하던 그곳에 어떻게 주 집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겠는가?

주 집사가 명원에 있기만 하다면, 오늘 일은 성공한 것과 진배없었다.

* * *

마차가 점점 소주부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데 또 다른 감찰원 밀정이 다가와 어느 길에서 발생한 소식을 전했다. 이후 마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 두툼하게 둘러싸인 벽에 바싹 다가갔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차가 그곳에서 정차했다.

이곳은 소주부 관아 측면으로부터 열 장(丈) 정도 떨어진 곳으로, 죄인을 가둬 두는 대감옥 옆이었다. 대감옥은 가을에는 사람들을 처형하고 봄에는 잡아 가둬 두고 있던 터라 지금은 그야말로 ‘사람들로 북적대는 시기’로 무려 40~50명에 이르는 사람이 갇혀 있었다.

대감옥 철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쭉 끝까지 가면 위쪽에서 햇빛이 들어오도록 되어 있는 곳이 나왔다. 그곳은 다른 곳보다 조금 더 따뜻했고 덜 눅눅했다. 그래서 어둡고 햇볕도 들지 않는 다른 감방에 비하면 그나마 쾌적한 편이었다.

그 감방 안에는 건초가 깔려 있었고, 건초 밑에는 반입이 금지된 면 이불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얼굴이 창백한 중년의 누군가가 혼자 술을 마시며 일반 수감자라면 누리지 못할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자는 바로 명씨 가문의 넷째 어르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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