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화 화창한 봄날 (2)
‘얼간이들! 은전을 가져다가 강을 보수하는 데 쓴 것이거늘. 범씨 가문이 큰 강 유역에 전답을 사놓은 것도 아닌데, 그 돈을 가져다가 뭘 했다고 저러는 건지 원!’
서무는 가슴속 노기를 강하게 억누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용좌에 앉아 있는 황제를 향해 예를 올렸다.
덕망 높은 대학사가 앞으로 나서자 호부를 공격하던 관원들이 주저하며 목소리를 낮추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황제가 서무를 쓱 바라보며 물었다.
“국고의 은전을 사사로이 이동시켰소. 죄명이 무엇이오?”
서무 대학사가 고개를 들고 곧장 대답했다.
“황제 폐하, 경국 법률에 관해서는 형부와 대리사에 물으셔야 합니다. 노신은 중서성만 오가느라 경국 법률에 대해서는 잘 모르옵니다.”
그러자 황제가 웃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닌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노학사는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앞으로 나선 것이오?”
그러자 서무가 다시 한번 예를 올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조정의 나쁜 소인배 놈들을 멸시하는 눈으로 쓱 바라보고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노신이 보기에 범 상서는 이번 일에 잘못이 없나이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강 제방을 수리하는 일은 긴급히 처리해야 하는 일이옵니다. 다행히 올해는 하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봄날 하천 범람이 예년만 못하였사옵니다. 하오나 이제 곧 여름이고, 여름이 되면 하천은 또 범람하겠지요. 그러니 치수 공사를 하는 하운 총독에 은전을 보낸 일은······.”
서무가 심호흡을 하고는 매우 공손한 태도로 말을 이어 갔다.
“노신이 중서성에서 비준한 상주서를 호부로 바로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호부가 은전을 가져다 쓴 일은 노신도 잘 알고 있었사옵니다.”
서무가 말을 마치자 다시 한번 조회 석상이 시끌시끌해졌다.
서무 대학사가 자신과 범씨 가문을 한데 엮는 모험을 강행하다니!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범건 상서도 살짝 놀란 눈으로 연로한 대학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가 이맛살을 살짝 구기더니 잠시 후 뜬금없이 웃기 시작했다.
“뭐라? 그런데 왜 짐은 몰랐던 것이오?”
“노신이 어리석었습니다. 황제 폐하,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서무 대학사는 늙어 노망이 난 사람이 아니었다. 조회에 참석한 이들이 꼴불견처럼 떠들어대자 강한 양심이 발동해 욱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부를 보호하러 나섰던 것뿐이었다. 한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중서성에서 호부를 보호하러 나선 걸 황제 폐하께서는 분명 싫어하실 것 같았다. 이에 서무 대학사가 씁쓸하게 웃으며 아까보다 작은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 이 불쌍한 노신이 어젯밤에 술을 두 잔 마셨더니 방정맞은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한 말을 주워 담고 싶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나이다.”
당당한 대학사가 익살꾼 같은 짓을 하자 황제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러자 머릿속을 점하고 있던 불쾌감도 웃음과 함께 사라져갔다.
고작 은전 18만 냥을 가지고 호부 상서와 대학사를 삭탈관직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은가.
“호허지.”
황제 폐하가 미소 지은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그대가 보기에 이번 호부의 죄명은 무엇이오?”
호 대학사가 옆으로 나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군주 기만죄이옵니다.”
그러자 대신들이 잠시 웅성였다.
황제가 눈썹을 씰룩이며 매우 흥미롭다는 듯 되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가?”
“처벌하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호 대학사가 몸을 깊이 숙였다.
“어찌하여 그런가?”
“호부의 은전이 치수하는 데 들어갔으니 이는 공적인 견지에서 이루어진 일이자, 황제 폐하를 향한 충심에서 비롯된 것이옵니다. 그러니 황제 폐하를 기만하기는 하였으나, 모두 황제 폐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저지른 일입니다.”
호 대학사가 담담하고 명료하게 말을 이어갔다.
“경국 법률은 사람의 저지른 죄보다는 도리와 마음의 상태를 더 중시합니다. 호부 관리들과 상서 대인은 참된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정성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도 이 점을 살펴주시옵소서.”
“그런가?”
호 대학사의 말이 흥미로웠는지 황제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법률이 있는데도 법률에 따라 처리하지 않는다면, 천하 백성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뒷말이 나오게 될 터. 그러면 어떻게 백관에게 법률을 지키도록 할 수 있겠는가?”
“천하 백성들의 입은 막을 필요가 없사옵니다.”
호 대학사가 온화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큰 강의 제방 중 터진 곳만 막는다면, 백성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 그 결과를 보고 듣고는 편히 지내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들도 황제 폐하의 고심을 알아줄 것이옵니다.”
그러자 황제가 마음이 좀 움직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호 대학사가 말을 이어 갔다.
“백관과 관련해서는······.”
그의 입가에 홀연 옅은 쓴웃음이 흘렀다.
“만약 백관이 정말로 법률을 지킨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럭저럭 괜찮은 것입니다. 신이 보기에 경국에서는 법률이 중하기는 하나, 천자의 말 한마디보다 못하옵니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 호부의 입장에서 고충을 생각해 주시고 관용을 베풀어 주신다면, 백관도 성심에 감명받을 것이옵니다.”
호 대학사가 마지막으로 작게 덧붙였다.
“황제 폐하, 최근 들어 계속 비가 내렸사옵니다.”
너무나 작게 한 말이라 용좌 근처에 있던 관원들 말고는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황제가 심사숙고에 들어갔다. 가장 가까이하는 중서성의 학사들이 범씨 일가 편을 들어준 건 조정과 경국 조정의 재정을 위해서란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이에 황제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호허지와 서무는 짐의 진짜 의도를 모르고 있어. 강 제방을 보수하는 일에 마음이 동해 범씨 가문을 감싸러 나선 것일 뿐. 헌데······ 짐의 이번 방법이 정말로 타당치 않았단 말인가?’
황제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설마 조정의 양심 있는 관원은 범건을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황제의 미간이 점점 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래쪽에 있는 범건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짐은 다른 이들이 한 말은 듣고 싶지 않군. 직접 말해보게. 왜 짐의 윤허도 받지 않고 은전을 운하 총독 관아로 보낸 것인가?”
범건이 탄식을 했다. 이어서 앞으로 나아가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깊이 숙이고는 짧게 대답을 했다.
“황제 폐하, 때를 놓칠까 두려웠습니다.”
사실 그 은전은 호부가 강남으로 보낸 은전 중 일부였고, 황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황제가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범건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범건은 오늘 조회 석상에서 백관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변호하는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자신이 진 짐을 함께 지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은전을 독단적으로 큰 강에 보낸 건 만민을 이롭게 하기 위한 처사였으니, 경국 입장에서 범건은 보기 드문 정의로운 대신이었다. 그러니 호허지와 서무 두 대학사가 감동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또한 중죄에 연루되었는데도 황제의 체면을 위해 자기 변론을 하지 않았으니, 경국 입장에서 범건은 보기 드문 순수한 충신이었다. 그러니 황제의 마음이 살짝 움직인 건 당연한 이치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황제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조회가 끝나자 다음의 내용으로 황제의 명이 내려왔다.
“호부가 국고의 돈을 가져다 쓴 건 큰 잘못이므로 황제 폐하께서 진노하셨다. 그러니 계속해서 샅샅이 조사하고, 이미 밝혀진 문제들은 감찰원 대리사로 넘겨 심리를 맡기도록 하라. 호부 상서 범건의 작위를 2등급 강등시키고 감봉 및 유임에 처한다.”
그런데 이번 황제의 명 때문에 웃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범건이 이번에 작위가 2등급 강등되어 범한이 지난번에 현공 사당에서 황제를 구한 후 받은 작위와 같아지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번에 감봉 처분을 받았는데 또 감봉 처분을 받게 되어 꼬박 2년 동안 녹봉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호부 상서였다.
한편 호부가 국고 결손을 초래한 일로 많은 관원들이 연루되고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각 세력들은 자신의 수족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호부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던 결손이 드러나 자신들의 머리가 잘릴 걸 막기 위해서였다.
태자의 은전 40만 냥은 황태후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은전으로 채워 넣었다.
하지만 동궁 파벌이든, 장 공주 파벌이든 각 파벌의 관원들에게는 그렇게나 좋은 할머니가 없던 탓에 그들 중 많은 이가 낙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젊은 피들이, 예를 들어 하종위 같은 젊은 인재들이 속속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작년 가을, 범한과 2 황자와의 전쟁으로 조정 신하들은 이미 한 차례 숙청이 된 바 있었다.
그리고 올해 늦은 봄, 호부와 장 공주의 전쟁으로 조정 신하들에게 다시 한 차례 숙청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체념과 포기가 순식간에 조정의 주요 기조로 자리 잡았다.
한데 이번 일의 발원지는 강남이었다. 즉, 범한이 거짓으로 상황을 꾸며냈기 때문이었다. 이에 장 공주 쪽 사람들이 범씨 가문의 죄상을 손에 쥐게 되었다고 오판해 많은 수의 졸(卒)을 구정물로 집어 던져 경도에 있는 범건을 끌어 내리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은전이 북제로부터 왔으며, 범씨 가문에서 국고에 있는 돈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물론 황제는 범씨 가문이 은전을 움직인 걸 자신이 알고 있었으니 자신의 윤허 하에 범씨 가문이 행동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황제는 스스로는 세상일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상황을 정리해보면, 범씨 가문은 매우 힘겹게 발붙일 곳을 찾은 것이었고, 황제는······ 조정 관료들에 대한 통제력을 조금 더 강화하게 됨으로써 황궁을 조금 더 안정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현 국면을 놓고 봤을 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보면, 경도에서 용좌를 위협할만한 세력이 사라진 것이었다. 순식간에 화창한 봄날에 무한한 상서로움과 화목함이 경도에 깃든 것이었다.
한편 드러나지 않는 부분을 보면, 태자와 2 황자는 어쩔 수 없이 임시 동맹을 맺어야만 했다. 비록 이번 일로 범씨 가문의 힘이 살짝 빠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 먼 강남에 있는 범한이 돌아오면 분명 무슨 큰 일이 일어날 수 있어서였다.
* * *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있을 수 없는 두 황자가 어쩔 수 없이 긴밀하게 연합하자 그들이 지닌 역량이며 위세는 누가 봐도 굳세고 의기양양해 보였다.
하지만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장본인인 범한은 조금도 자만하지 않았다.
경도의 소식이 저 먼 강남까지 재빨리 전달될 방법이 아직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도에 있는 황자들을 감히 끽소리도 못하게 만든 범한도 이 먼 강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명씨 가문이 잔뜩 웅크리고 있는 가운데 범한은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바로 명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게 이상하리만치 힘들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황자들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말이다.
* * *
정치와 상업계에서 일어나는 싸움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나아갈 길이 보인다는 점. 그리고 불길이 거세게 피어오를수록 순식간에 추운 가을이 온다는 점이 그것이다.
경도에서 호부를 둘러싸고 싸움이 일자 신양과 동궁 쪽에서는 범씨 가문의 최대 약점을 잡았으니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싹할 정도로 의기양양하게 손을 내밀어 범씨 가문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유도 모른 채 막판 뒤집기로 세력만 크게 잃게 되리란 건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