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화 화창한 봄날 (1)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본 2 황자가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의 차가운 손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합니까?”
“오늘······.”
섭령아가 말을 하려다 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옥처럼 맑은 두 눈에 망설이는 기색이 보이더니 이내 용기를 내고 입을 열었다.
“어디에 가셨습니까?”
2 황자가 한동안 고개를 숙인채 아무 말 하지 않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유정강에서 고모와 황태자 저하를 만나고 왔습니다.”
섭령아는 밖에 알려져서는 안 될 비밀스러운 일을 숨김없이 말해줄 정도로 2 황자가 자신을 가깝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녀가 간곡하게 타이르는 표정으로 물었다.
“굳이 그래야 합니까? 그냥 지금 상황에 만족하며 살아가면 안 되나요?”
혼인을 하고 몇 개월 동안 2 황자는 섭령아를 자상하게 대했다. 그가 황족들이 흔히 보이는 포악무도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건 섭령아의 뒤를 지키고 있는 가문의 힘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섭령아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사실 황자들과 임완아는 황족과 가까운 가문의 자제인 섭령아, 범약약과 어려서부터 함께 성장했기에 스스럼없는 사이였다.
2 황자는 아내가 자신을 위해 그런다는 걸 알기에 난처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우리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만히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던 섭령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전에야 폐하의 강요에 못 이겨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그 역할을······ 사부인 작은 범 대인이 맡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굳이 나설 필요가 있나요?”
2 황자가 아무 말 없이 한숨을 쉬다가 잠시 뒤 천천히 설명했다.
“만약 부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의 역사적 임무는 끝난 셈이니 이런 일에 나설 필요가 없겠지요. 하지만 부인이 잊어서는 안 될 게 있습니다.”
그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계속 설명했다.
“부인이 사부라 말하는 우리 경국에서 가장 큰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작은 범 대인은 사실······ 저에게 가장 큰 원한을 품고 있는 인물입니다.”
섭령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겁니까? 제가 가서 잘 말해보면 되지 않을까요?”
2 황자가 아내의 순진함이 우습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그가 아내를 품에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남자들 사이에서 생긴 원한은 부인들의 우정에 기대 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범한 사이의 원한이 풀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범한은 외양간 거리 사건에서 자신의 사람이 죽었다는 것과 포월루 사건에서 기생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에 마음 깊숙이 원한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2 황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아랫사람이 죽었다는 것에 범한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일들로 자신에게 원한을 품는 것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는 반드시 힘을 가져야 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는 강렬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 * *
태자가 욕을 먹고, 샅샅이 조사해야 할 범위가 줄어들자 호부는 잠시 안전해졌고 감찰원은 다시 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일에서 재밌는 점은 감찰원 1처가 이제는 허리를 꼿꼿이 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 놀랍게도 그게 호부 상서가 얼마나 허리를 굽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중서성 안, 호 대학사가 탁자를 내리치고는 6부 늙은이들의 얼굴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며 그들이 부패한 관리라며 질책을 해댔다. 아직 젊은 그는 서무처럼 원로대신에게서나 볼 수 있는 무언가 재는 듯한 태도를 보일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낼 수 있었다. 이번에 호부를 샅샅이 조사한 일은 황제가 호 대학사의 명성과 과감함을 믿고 맡긴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황제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그가 봤을 때, 적어도 조사한 내용만 놓고 봐도 호부는······ 정말 녹록지 않은 상대였다. 그런데 정작 호 대학사를 가장 분노하게 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조정 대신들이 지금까지도 호부 장부에서 강호와 관련된 증거를 찾아낼 생각뿐이란 거였다.
탁자를 내리치는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호 대학사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지더니 그가 옆에 있는 관리들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강남으로 은전을 보낸다고요? 그렇다면 은전은요? 아직 호부 창고에 있지 않던가요? 이후로는 증거도 없이 날조된 일을 가지고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다른 관원들이 낙담하지 않도록 하란 말입니다!”
그가 낯빛이 흙빛이 된 관리들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흥!’,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대인들 스스로 알아서 잘 처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이 끝나자 호 대학사가 양 소맷자락을 툭 털고는 황궁 옆에 위치한 작은 방에서 나갔다. 그러자 방안에 남겨진 관원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두 난감해하며 깊이 후회만 할 뿐이었다. 호부를 조사했지만 깨끗했다. 오히려 자기 파벌들이 지닌 수많은 문제들만 들추어졌을 뿐이고, 자신들의 뒷배가 강남과 얽히고설킨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강남 상황을 놓고 봤을 때 이들 고위 관료들은 범한이 하서비와 명씨 가문을 이용할 때 쓴 돈이 분명 국고에서 나간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확신을 갖고 호부를 향해 공세를 퍼부었던 것이다. 그렇게나 많은 은전이 황실 금고 전운사에 있다면, 그렇다면 국고에는 분명 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흔적도 없다니!
관리들은 분해서 이를 벅벅 갈아댔지만, 호 대학사의 호통을 들으면서도 감히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요란하게 일 처리를 했건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다니!
그들에게 범가네 부자는 교활해도 너무 교활했다.
아직 태양이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 중서성에는 오늘 조회에 올릴 상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다수의 관리들은 밤을 지새운 터라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오늘 조회에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에 그들은 평소보다 더 과하게 분발해야 했다. 호부를 샅샅이 조사하는 첫 단계에서 장 공주와 동궁 두 파는 완전히 실패한 터였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을까?
관리들의 눈빛이 무심코 한 젊은 관원에게 쏠렸다. 어두운 구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 젊은 관리는 성이 하, 이름이 종위였다. 요즘 조정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람 중 하나로, 장 공주와 동궁 쪽과 연계된 배후를 지니고 있었으며, 황제 폐하께도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호 대학사는 호부 일을 크게 문제 삼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관원들은 황제 폐하께서 직접적으로 밝히지 않은 속마음까지 순조롭게 처리할 수는 없었다. 이에 도찰원의 신임 좌도어사 하종위가 호부를 조사하기 만든 조직에 투입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관원들은 황궁에서 이 일을 처리하려 하는지 여부를 이 청년 관원의 입을 통해 알고 싶었던 터였고, 그래서 하종위를 바라보고 있던 것이었다.
하서비는 특명을 받아 중서성에서 일을 시작한 지 3일째였다. 그는 줄곧 본분을 다하는 중이었고,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고 항상 침착하고 차분하게 행동하며 호 대학사 및 각 대신들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몇몇 대신들이 항상 지켜보고 있다 보니 하종위는 어떻게든 능력을 보여줄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는 자신뿐만 아니라 황제 폐하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장부가 전부 엉망진창입니다!”
하종위가 탄식하며 몇몇 관원들을 향해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제 보니, 천천히 고민을 해봐야겠습니다. 앞서 호 대학사께서는 조금 서두르신 감이 있으니, 대인들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천히 고민을 해 본다.’ 이는 황궁에서의 태도를 말한 것이었다.
범씨 가문 쪽에서 강력하면서도 교묘하게 대응을 하고 있어 황궁 쪽에서도 순간 제대로 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호부 상서를 교체하고 난 후 다시 기회를 노려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관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달갑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범건의 지위가 바뀔 기미가 없으니, 앞장서서 강공을 펼쳤던 자신들은 당연히 응분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 * *
조회가 열리자 장 공주와 동궁 편에 서 있는 관원들은 최후의 공세를 퍼부었다. 그런데 이는 적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호부가 깨끗하기는 했어도 샅샅이 조사하러 나선 이상 결국에는 무언가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나중에 합류한 하종위의 지적에 따라 관원들은 커다란 죄명들은 일단 버리고 자잘한 문제들을 가지고 물고 늘어졌다. 이를 테면, 회계가 명확하지 않은 일부 항목 같은 것이었다. 그것도······ 은전 몇 냥이 빈다며 말이다.
작은 문제였지만 관원들은 이것으로 자신들의 진심을 보여주려 했다. 자신들이 호부를 샅샅이 조사한 건 원한 때문에 보복하려던 게 아니라 정말로 호부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싶어서였다고 말이다.
조회에 참석한 대신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격앙된 지적을 듣고 있던 이들 중 왼쪽 열 첫 번째 자리에 있는 호 대학사는 냉소를, 그 옆에 있는 서무는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이부상서 안행서는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용좌에 앉아 있는 황제는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으로 문관 속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부 상서 범건도 오늘 조회에 참석했던 것이다.
머리가 살짝 하얗게 센 범건을 바라보며 황제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18만 냥에 달하는 은전은 어디로 간 것이오?”
범건이 옆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변명도 해명도 않고 예부터 올린 후 곧바로 처분을 바란다고 말했다.
18만 냥에 달하는 은전은 벌써 하운 총독 관아로 보냈다며 말이다.
그러자 순간 일대 소란이 일었다. 호부를 조사하던 이부와 관련 관원들이 얼굴에 반짝 기쁜 기색을 띠더니 이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악독한 호부 상서 늙은이가 왜 은전을 하운 총독 관아로 보냈다고 실토를 한 거지? 그것도 황제 폐하 앞에서 자기가 했다고 떠안으면서까지 말이야!’
관원들이 속속 옆으로 나와 정의를 구현을 하려는 듯 호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 비난의 칼끝은 범건에게 향해 있었다.
경국에서 국고의 은전을 이동시키려면 황제 폐하의 명이 있어야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럴만한 권한이 없었다. 그러므로 황제 폐하의 동의 없이 범건이 호부의 은전을 하운 총독 관아로 보낸 건 군주 기만죄에 해당되었다.
피곤에 절어 있는 범건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던 황제의 눈에 가끔씩 냉담함이 담겼다. 그런데 조회에 참석한 대신들의 호부를 처벌해 달라는 요청은 황제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만 같았다.
한편 황제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가 일부 관원들에게는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바로 마음속에 가득 자리 잡은 분노 말이다.
호부 때문에 국고의 일부가 비게 된 건 지금 호부를 공격하는 관원들 때문에도 생긴 일이었다. 그리고 호부 상서가 치수 공사 때문에 국고의 은전을 하운 총독으로 보낸 건 조정과 백성을 위한 일이므로 아무리 부당해도 심적으로는 용서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저 소인배들은 그런 일을 가지고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무가 미간을 파르르 떨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노기가 가득 담긴 눈으로 옆으로 나가 있는 문관들을 노려보았다.
조정에서 은전을 가져다 쓰려면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 했고, 중서성 원로라면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니 치수 공사를 해야 하는데 느긋하게 황제 폐하께 요청한다면 강남 큰 강에 있는 제방은 일찌감치 무너져 내릴 것이었다. 이 일로 지난 겨울에 서무는 황제 폐하께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므로 범건이 호부의 은전을 하운 총독 관아로 보낸 것과 관련해 상세한 사정까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사적인 이익 때문에 그런 건 아니라고 서무 대학사는 판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