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화 유정강에서의 비밀스러운 만남
관리와 백성들이 뭐라 수군거리든 상관없이 이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그동안 2 황자의 마차 안, 장 공주의 저택, 도찰원 서재에서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던 경도 인재가 마침내 역사 무대에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그는 앞으로 몇 년 동안 모두의 주목을 받는 인물로 성장하게 될 것이었다.
젊고, 영준하며 능력이 출중할 뿐만 아니라 황제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높은 관직에까지 오르게 된 좌도어사 하종위는 막 떠오른 태양처럼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리고 멀리 강남에 있는 범한은······ 태양을 삼키려 하는 블랙홀이었다. 아마도 작년에 범한이 지금 조정에서 주목받는 그를 주먹으로 때려눕혔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생 잊지 못한 치욕을 안긴 이 일을 계기로 하종위는 멀리 강남에 있는 작은 범 대인이 자신을 깔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지금 폐하의 눈에 든 그는 폐하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 *
이로써 가까스로 곤경에서 벗어난 황태자는 은전 40만 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어젯밤 황태후는 함광전에서 적손인 황태자를 호되게 꾸짖으면서 이 일로 폐하의 기분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면서 자신이 황실의 체면과 안위를 생각해 이번 일은 대신 무마시켜주었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막아주지 않을 거라 경고했다.
황태자는 조금 후회가 되었다. 그는 범한이 경도에 등장한 뒤로 지난 2년 동안 실수하지 않기 위해 몸가짐에 항상 신경 썼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여자와 노는 횟수도 줄였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2년 전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던 시절에 저지른 잘못들이 이제 와서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황태자는 자신의 꼬리를 꽉 쥐고 아프게 하는 호부 상서가 원망스러워졌다.
범씨 집안!
이번 일에 비교하면 과거 2 황자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분노했던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에 황태자는 지금부터 수년 동안 자신의 가장 큰 적은 의심할 여지 없이 범씨 집안일 거라 확신했다. 늙은 놈이건 젊은 놈이건 범씨 집안이 이제 그의 가장 큰 적이었다.
호부를 조사하는 일을 계기로 벌어진 동궁과 범씨 집안의 치열한 싸움에서 먼저 웃은 건 범씨 집안이었다. 황태자는 하고 싶지 않더라도 이 일을 평화롭게 마무리 지어야 했다. 다만 범건은 영리한 사람이었기에 황태자가 용상에 오른다면 범씨 집안의 끝이 좋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태자는 황제가 아니었으므로 멀리 담주에 있는 범씨 집안 노부인과 어떤 애틋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과거 섭가의 일로 인해서 범한과는 철천지원수 사이였기 때문에 황태자는 범한이 자신이 편이 설 것이란 기대는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심지어 그가 자신의 황위를 물려받는 걸 반대하지 않아 줄 거란 희망도 품지 않았다.
확실한 경쟁 관계가 확립된다면 다른 갈등이나 경쟁은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 버리고 불쾌했던 일들도 지난 일로 잊어버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황태자는 2 황자가 자신의 심복을 통해 유정강에서 만나자는 제안을 했을 때 쉽게 받아들였다.
황태자는 속으로 자신의 둘째 형도 혼자 힘으로는 범한과 대적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리라 짐작하며 속으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용상이 하나인 이상 황태자와 2 황자는 서로에게 칼을 겨눌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만 최소한 지금은 셋째가 용상에 엉덩이를 올릴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하는 게 먼저였다.
지금 상황에서 황제의 두 아들은 서로에 대한 원한은 뒤로 미뤄 두고 함께 뭉쳐야만 했다. 서로의 힘을 하나로 합쳐야만 멀리 강남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사생아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여인의 아름다운 눈길처럼 잔잔하게 흐르는 유정강의 물길이 점점 거세지는 것이 마치 곧 여름이 온다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
아름답게 장식된 놀잇배 위에서 황태자와 2 황자는 함께 술잔을 부딪치며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했다. 마치 이전에 두 사람 사이에 불쾌한 일이 조금도 없었다는 듯 친근한 모습이었다.
모임을 제안한 2 황자가 먼저 호부를 조사할 때 이부상서 안행서가 본의 아니게 황태자를 궁지로 밀어 넣은 것에 대해 사과의 뜻을 전했다.
황태자가 가끔은 바보처럼 행동해도 평소에는 영리한 사람이었기에 2 황자가 넌지시 전한 화해의 뜻을 받아 들었다.
황태자가 범한이 처음 경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경계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점을 털어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두 형제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을 통해 현재 상황이 걱정스럽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어 속 끓고 있는 마음을 읽었다.
범한이 손에 쥔 권력이 너무 컸고, 뒤에서 후원해 주고 있는 세력도 막강한 데다가 최근에 황궁 안에서도 그에게 기우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이승평······ 셋째를 범한의 곁에 머무르게 하는 부황의 의도는 도대체 뭘까?’
황태자와 2 황자는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이어진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2 황자였다.
“황태자 저하도 범한이 소주에서 포월루 분점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으셨겠지요. 거기에 유명한 기생이 두 명 있는데, 하나는 이홍성이 데리고 있던 기생을 빼앗은 거고, 다른 하나는 재미있게도······ 첫째 형님이 데리고 있던 여종이라 합니다.”
황태자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이를 갈았다.
“며칠 전 어서방에서 첫째 형님이 범한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첫째 형님께서는······ 북제에서 온 큰 공주를 정말 무서워하시나 봅니다. 둘째 형님께서는 첫째 형님과 어려서부터 친하셨는데도 형수를 무서워하는 걸 모르셨습니까?”
2 황자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하하’하고 큰 소리로 웃을 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때 강에 따뜻한 산들바람이 불어와 배가 살짝 움직였다. 강가에 드리운 버드나무 가지는 점점 더워지는 날씨가 견디기 어려운지 축 늘어져서는 새벽에 그친 비가 다시 내리기는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배 창문을 통해 본 두 사람의 표정은 밝아 보였지만 사실은 각자 검은 속내를 숨긴 채 상황에 이끌려 마지못해 상황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하종위가 계속 호부를 조사할 겁니다.”
2 황자가 슬며시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분수에 맞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니 저하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황태자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예부와 하종위는 예전에 동궁 편에 있던 것을 장 공주와 2 황자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게다가 하종위는 지금 조정에서 떳떳하게 입지를 굳히고 있었으니 황태자로서는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종위란 사람은 지나치게 공명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지금이야 형님 쪽에 서 있다 하더라도 상황이 변하면 언제 그랬다는 듯이 태도를 바꿔버릴 수도 있습니다.”
2 황자가 고개를 돌려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경치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종위가 범한 쪽에 서는 일은 없을 겁니다.”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넌지시 반박했다.
“하지만 지금 하종위의 입지를 보면 형님 옆에 계속 있을 필요도 없지요······.”
그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2 황자를 바라봤다.
“그에게 지금의 자리를 준 건 어쨌든, 부황이시지 않습니까.”
2 황자는 황태자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면서도 반박하지 않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 때문에 하종위가 오늘 오지 않은 것입니다. 조정의 관리가 된 이상 우리와는 거리를 두고 행동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변 풍경을 감상하던 2 황자가 몸을 돌려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지만, 마음속에서는 혐오감이 치솟았다. 지금까지 얕보았던 황태자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쾌했다.
“물론 오늘 저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황태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나를 여기 부른 것입니까? 감히 누가 나를 보려 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보면 안 되는 거니?”
뒷방에서 부드러우면서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봄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나 작은 새들의 아름다운 지저귐처럼 귀를 기울이게 하는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목소리를 들은 황태자의 안색이 변하더니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얼이 빠져 멍하니 있던 그가 느릿느릿하게 일어나서는 뒷방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고모께서 입궁하신 뒤 저를 보러오지 않으셔서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발을 걷고 천천히 걸어 나온 장 공주 이운예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황태자를 바라봤다.
황태자가 잔뜩 긴장해서는 머리를 숙였다. 도무지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번 호부의 일은 우리가 속은 것 같아.”
장 공주 이운예는 살짝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그림에도 아름다운 미모만큼은 여전했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계속 말했다.
“내 사위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지. 정왕께서 소란을 피워 일이 커지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호부가 강남에 돈을 보냈다는 증거도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관리들 보기도 난처해졌을 거야.”
호부의 은전은 강남을 한 바퀴 돈 뒤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할 게 없었다. 비록 은전이 강남 전장에 머물렀던 건 분명했지만 액수가 크지 않았고 범건이 워낙에 철저하게 진행해 허점도 찾을 수 없었다.
아직도 장 공주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은 황태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께서 알려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그냥 차를 마시러 온 거야.”
장 공주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너희 친형제끼리······ 서로에 대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외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어.”
장 공주가 친형제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 유독 ‘친’이란 글자를 강조해서 말했다.
황태자가 그녀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호부에서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범한의 약점을 잡아낼 수 없을 겁니다. 범한이강남에서 세력을 키운 뒤 경도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까?”
“호부 조사는 계속될 거야.”
장 공주가 물처럼 맑은 두 눈으로 황태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황제 오라버니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한 발자국 후퇴하면 나중에 더 크게 됫값아 주시는 분이니까. 그러니 호부 조사에 대한 폐하의 태도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없고 내 사위에 대해서는 더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어. 범한은 대항하기 힘든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황태자와 2 황자가 멍한 표정으로 ‘고모께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범한처럼 무서운 수단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냉혈한을 상대하기가 쉽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장 공주가 미소 지었다.
“내 사위는 보기에는 무정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이 정말 많은 사람이거든.”
* * *
유정강에서의 비밀스러운 만남이 끝난 뒤 2 황자는 여덟 가문 장수의 경호를 받으며 마차에 올라 경도 북성에 있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한 명은 범한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범무구는 6처 검수의 위력에 겁을 먹고 고향으로 돌아가 지금은 여덟 가문 장수 중에 여섯 명만 남아 있어 이전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2 황자는 왕으로 봉해진 지는 수년이 지났지만, 결혼을 한 지는 수개월밖에 되지 않아 왕비와 사이가 무척이나 좋았고, 나쁜 풍문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왕비의 성은 섭, 이름은 령아였다.
침실에서 자신의 남편에게 얇은 외투를 걸쳐주는 섭령아의 얼굴에 옅은 근심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