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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60화 (460/1,108)

460화 늦은 봄 경도

순간 정탁이 며칠 전에 보고한 정보의 내용이 떠오른 황제는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도 호부의 조사는 계속해야 한다. 이런 일로 대충 마무리한다면 조정의 체면이 깎이지 않겠는가?”

“중요한 것은 폐하가 범 상서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 지입니다.”

늙은 홍 태감이 고개를 숙이고 지시를 기다렸다. 황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호부 상서 자리에 계속 있을 수는 없겠지만 짐이 다른 쪽으로 보상을 해줄 것이네······. 범건이 호부를 계속 관리할 수는 없네. 안지가 강남에서 황실 금고를 관리하고 있으니 범건이 호부 상서 자리를 계속 맡는 건 무리가 있지.”

그 말을 들은 늙은 홍 태감은 슬픈 기분이 들면서 그동안 온 힘을 다해 노력해온 상서 대인이 안타까워 슬쩍 입을 열었다.

“이 늙은 노비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말해봐라.”

늙은 홍 태감이 마른 입술을 침을 묻히고는 재빨리 말했다.

“폐하께서 작은 범 대인의 출중한 능력을 알아보시고 황실 금고와 감찰원을 맡긴 것은 누가 봐도 타당한 인사였습니다. 그리고 이치로 볼 때 범 상서 대인이 호부를 계속 관리할 수 없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경력 원년 때 이곳 어서방에서 당시 호부 시랑이었던 범 대인과 진 원장 대인이 크게 싸운 적이 있습니다. 범 대인께서 작은 범 대인이 감찰원을 맡는 걸 극도로 싫어하셨기 때문이었지요.”

“그래, 기억난다. 계속 말해봐라.”

늙은 홍 태감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의도를 파악한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범 상서 대인께서는 과거 풍류가로 유명하셨던 분입니다.”

이 말을 하면서 늙은 홍 태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건 범 상서 대인이 정이 많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늙은 노비는 비록 아는 것이 많지 않지만, 정이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약점이 될 수 있다 생각됩니다. 그러니 범 상서 대인을 경도에 머무르게 하면서 작은 범 대인이 강남에서 일을 진행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 생각됩니다.”

황제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생각하다가 잠시 뒤 입을 열었다.

“이전에 황태후 궁에 갔을 때 황태후께서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황태후께서는 담주에 있는 유모의 체면을 생각해서도 황실이 범씨 집안에 많은 은택을 줘야 하지만, 범한이 강남에서 일을 진행하는 걸 안심하고 지켜볼 수 있으려면 범건이 경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안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바로 황실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위협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공후 작위를 내려야겠다.”

결심이 선 황제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짐은 범씨 집안을 박대하지도 않을 것이지만 호부의 일을 대충 마무리 짓지도 않을 것이다.”

공후 작위를 호부 상서 직위와 바꾸는 건 범건에게도 손해만은 아니었다.

* * *

그날 밤 범씨 집안.

두 눈을 감고 과일즙을 마시며 유씨에게 안마를 받던 범건이 한숨을 쉬었다.

“폐하께서 내가 자신을 위협했다고 오해를 하셨으니 일이 잘못되었소.”

그 말을 들은 유씨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녀도 이번 일이 무난하게 해결되기가 무척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범건이 호부 상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게 황제 폐하의 뜻이라는 건 이미 의 귀빈을 통해 여러 차례 전해진 상태였다.

한바탕 풍파가 휩쓸고 간 뒤 호부 조사는 무미건조하게 진행되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조정 전체가 혼란에 휩싸이자 조정 문무백관들은 다음에 연루될 사람이 자신이 될까 전전긍긍했다. 감찰원에서 체포한 사람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났고 호부의 문제도 계속 발견되었지만 정작 조사의 본래 목적은 달성할 수 없었다. 그동안 그렇게 노력했어도 호부가 비밀리에 강남에 돈을 보냈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호부를 공격한 장 공주를 포함한 사람들은 범한이 강남에서 사용한 은전이 호부에서 온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호부가 큰 죄를 짓지 않은 셈이니 황제가 범건의 죄를 물어 사직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곧 여름 홍수가 닥칠 것이네.”

범건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조정에 돈이 필요해질 테니 호부를 조사하던 일도 느려지면 폐하와 함께 다시 시간을 끌어야 하네. 최소한 범한이 경도로 돌아올 내년 설 명절까지 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시간을 끌어야지.”

범건에게 계획이 있다는 걸 눈치챈 유씨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범건이 원하는 홍수를 내려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늘의 위엄으로써 천자의 위엄에 반격한다는 생각이었다. 폐하는 어리석은 군주가 아니었으므로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범한이 있는 곳의 상황은 어떤지 모르겠구먼.”

범건이 근심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강 정비 사업에 필요한 은전을 조달하려면 상당한 힘이 필요할 테지만, 명씨 집안도 한입에 먹을 수는 없을 테니 힘들겠군.”

계속 내리는 비에 만개해 핀 꽃이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황궁에서 호부 조사 결과를 계속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조정 관리들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 이제야 관리들은 호부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먼저 쓰러져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멀리 강남에 있는 작은 범 대인이 움직일 필요도 없을 정도로 경도에 있는 늙은 범 대인은 자신을 지킬 충분한 패를 가지고 있었다.

조사하면 할수록 칼날이 자신에게 오는 상황에서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계속 조사를 하려 하겠는가? 더구나 호부 조사에 앞뒤 안가리고 나섰다가 무슨 꼴을 당하는지는 황태자가 몸소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관료 사회에서 가장 큰 것은 금과옥조와 같은 황제의 말이었고 두 번째로 큰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호부는 지금 이 두 가지를 모두 흔들면서 오뚝이처럼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범건은 분명 자진해서 자리에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황궁에서 폐하가 합당한 작위를 내려 주려 한다는 말이 나왔음에도 범건은 흔들리지 않았다. 경도 문무백관들은 여러 방면에서 쏟아지는 압박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그의 모습에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실 범건은 다른 관리들의 생각처럼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충분히 많은 관리들이 호부 조사에 연루되자 황태자의 시선도 다른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자신을 보호하거나 자신의 형제들을 나쁜 일에 끌어들이는 것과 같은 것 말이다. 더는 호부 관아에 갈 필요가 없어진 범건은 저택에서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다른 지인을 찾아가 담소를 나눌 수는 없었다. 그도 호부 조사에 지인이 연루되는 걸 원치 않았고 지인들도 함부로 그를 찾아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물론 정왕만은 예외였다.

황태후의 친아들이자 황제의 친동생인 정왕은 나랏일에는 전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정원을 가꾸는 일에만 열중했다. 황궁에서도 이런 그의 태도가 말하는 바가 뭔지 알기에 줄곧 그에 관여하지 않았다.

더구나 범건과 정왕은 돈독한 사이라서 평상시에도 자주 왕래를 했고 또 정왕의 성격상 다른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입궁해 어서방에서 황제와 깊이 있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게 된 범건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혔다.

그는 각 방면에서 분석했을 때 자신이 계속 호부 상서직을 책임지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관직에 연연해서가 아니라 현 시국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나라 상황이 태평성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복잡한 국면에 처해 있다고 설명하며 자신과 조정에 대한 분석을 조금의 숨김도 없이 자세히 설명하고는 황제에게 호부 조사를 거두는 것이 경국을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걸 설득했다.

이처럼 범건이 조금의 숨김도 없이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주장한다는 건 황제에게도 놀라운 모습이었다.

다음 날 입궁한 정왕이 황태후가 머무는 함광전에 들어가서는 무슨 일로 한참 시끄럽게 소란을 피웠으며, 결국에는 황태후와 다투기까지 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다만 무슨 일로 둘이 싸웠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날 밤 황태후는 황제와 함께 연극을 보면서 넌지시 정왕이 입궁했던 일을 말했고, 황제는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태후의 뜻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범한이 처음 경도에 왔을 때 보인 태도와 마찬가지로 범씨 집안은 이씨 집안과 돈독한 사이니, 부당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황태후는 막내가 날마다 황궁에 들어와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는 것도 남들 보기에 좋지 않은 데다가······ 자신의 손자들이 호부 조사에 창피를 당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호부 조사로 황족의 치부까지 드러난다면 황실의 체면이 깎이지 않겠는가?

황제가 신하들보다 체면을 더 신경 쓴다는 걸 노린 범 상서의 의도에 예상치 못하게 황태후가 민감하게 반응한 셈이었다.

물론 그 효과는 상당했다.

다음 날 성지가 내려왔다. 바로 조정의 일이 바쁘니 호부 조사를 맡은 관리 대부분을 원래 자리로 복귀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비록 조정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 호부 조사를 멈춘다는 내용의 성지는 아니었지만, 호부 조사의 동력이 상당히 약해진 건 분명했다.

이로써 관리들은 모두 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정 자체가 진흙탕인 이상 누가 더 더럽냐고 싸우는 것보다는 모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발등에 급한 불을 끈 관리들은 호부 조사의 동력이 약해진 이유가 정왕이 황궁에서 일으킨 소란과 무관하지 않을 거란 생각하며 무언가 수상한 낌새가 있음을 눈치챘다.

범씨 집안은 정왕과 대대로 교분이 있다는 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과는 달랐다. 작년 가을부터 두 집안 사이에 많은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먼저 범한과 2 황자의 싸움에서 정왕 세자 이홍성이 연루가 되었고, 이후 범씨 집안 딸이 북제 국사 고하의 제자로 들어가면서 두 집안의 혼사가 무산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왕이 입궁에 소란을 피웠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두 집안의 관계가 이전처럼 회복되었다는 것일까? 문무백관들은 한숨을 내쉬며 범건이야 말로 속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문무백관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황제는 모두의 예측을 뒤엎는 파격적인 인사 명령을 내렸다. 바로 도찰원 어사 하종위를 좌도어사로 승진시킨 뒤 호부 조사 대열에 합류시킨 것이다.

하종위는 범한의 제자 후계상과 함께 경도에서 인재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다. 그는 곽보곤과 둘도 없이 돈독한 사이였고 예부와도 관계가 있었던 탓에 연루될까 두려워 줄곧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경력 5년 춘시를 기회로 삼았지만, 갑자기 가족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시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인재로 널리 이름을 떨쳤지만 과거 시험을 볼 기회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는 불행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하종위는 운이 아주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곽씨 집안과 사이가 좋은 덕분에 황태자와도 안면이 있었고, 경도에서 인재로 상당한 명성도 떨칠 수 있었다. 그리고 경력 4년 봄에는 오백안 사건으로 폐하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파격적으로 도찰원 어사가 될 수 있었다.

사실 모두가 알다시피 하종위는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태도를 바꾸며 유리한 쪽에 서는 사람이었다. 상황에 따라 황태자 편에 섰다가 신양 편에 섰다가 하면서 그는······ 결국에 도찰원 좌도어사 자리에까지 오른 셈이었다.

젊은 하종위가 파격 승진하는 모습을 본 관리들은 모두 화들짝 놀라며 폐하가 하종위를 이렇게 아끼는 이유가 뭘지 궁금해했다.

물론 이런 파격적인 인사가 처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범한은······ 하종위보다 나이는 더 어렸지만, 관직은 더 높았고 손에 쥔 권력이나 명성도 더 대단했다.

다만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다시피 작은 범 대인은 황제가 숨겨둔 아들이었고, 문예와 무예에 모두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지금과 같은 지위에 오른 게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하종위는 아니었다. 황제의 숨겨둔 아들도 아니었고 문예와 무예에 범한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이에 항상 소문을 만들어내길 좋아하는 관리들은 몰래 황제에게 또 다른 사생아가 있는 거 아니냐고 시시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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