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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58화 (458/1,108)

458화 큰 눈덩이를 옮기는 일 (2)

방려는 이 상황이 기가 막히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자신이 비록 황태자를 위해 일하고 한 탁자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호부의 보잘것없는 관리인 자신을 황태자가 기억하는 것도 말이 안 되기는 했다.

그리고 은전 40만 냥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를 위해 돈을 쓰는 걸 좋아하고 저택을 수리해 여자와 노는 걸 좋아하며 자신의 심복들에게 상을 내리길 좋아하는 황태자는 어떤 존재인가? 황태자는 앞으로 나라의 주인될 사람으로 천하의 돈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그러니 그깟 은전 40만 냥을 어디서 가져와 어디다 썼는지를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방려가 마른 침을 꼴깍 삼치며 황태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는 황태자가 잊고 있는 과거를 기억해 내 지금의 황당한 상황을 마무리 지음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닫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황태자는 방려의 간절한 눈빛에도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계속되는 질문에도 호부 원외랑 방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워낙 큰일인 데다가 3사에서 공동으로 조사를 하고 있어 한 번 내뱉은 말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를 악물고 절대 말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에서 무언가 수상쩍음을 느낀 황태자가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관리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는 다른 관리의 진술이 있음에도 방려라는 관리가 입을 열지 않는 이유는 범건을 대신해 일을 처리했거나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을 알고 있어 그러는 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그때 줄곧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던 이부상서 안행서가 탁자를 ‘쾅’치며 소리쳤다.

“저런 방자한 놈을 보았나! 여기가 어디라고 말을 하지 않는단 말이냐. 여봐라! 저놈을 끌고 가서 심문해라!”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호 대학사에게 물었다.

“호 대인 고문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발 앞에서 서로 싸우는 개미들을 구경하고 있던 호 대학사가 고개를 들어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뭐라? 고문을 해?”

‘고문을 해’라는 말을 힘없이 중얼거리는 바람에 그가 주변 사람에게 물어본 것인지 아니면 고문을 허락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조급했던 안행서는 더 확인하지 않고 곧바로 명령했다.

“대인의 말대로 고문해라!”

감찰원 1처 관리들이 죽어도 입을 열려 하지 않은 호부 원외랑을 끌고 가려 했다. 감옥에 갇혀 고문을 받게 되자 줄곧 완고하게 버티던 방려가 결국 무너졌다. 그가 겁에 질려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억울합니다! 본관이 경력 원년에 진사가 된 뒤 4년 만에 원외랑 자리에 오른 것은 모두 폐하의 하늘과 같은 은혜 덕분입니다. 그걸 항시 잊고 있지 않은 본관이 어찌 법을 어기는 짓을 했겠습니까?”

방려는 이성을 잃고 하소연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주도면밀함을 잃지 않았다. 고문을 당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그는 호 대학사만 바라보며 하소연할 뿐 절대 황태자 쪽은 바라보지 않았다.

침묵하고 있던 안행서가 고문을 제안했을 때 황태자는 상황이 확실히 수상쩍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방려의 말을 듣자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정신이 번쩍 났다.

‘경력 원년 진사라고?’

과거 궁중 편찬으로 황태자와 돈독한 사이였던 예부 상사 곽유지의 아들 곽보곤도 방려와 같이 경국 원년에 급제를 했다.

황태자가 입을 쩍 벌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당시 곽보곤의 추천을 받아 황태자는 호부 말단 관리인 방려와 식사도 하고 장 공주의 계획에 따라 그를 두 차례나 승진시켜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황태자는 곽보곤을 통해 방려에게 호부에서 은전을 빼돌리게 해 암암리에 사용해 왔었다.

이미 몇 년은 지난 일이라서 그 은전들을 어디다 썼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데다가 곽보곤도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었기에 황태자는 그 일과 방려라는 관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던 중 오늘 호부를 조사하면서 다시 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설마······ 그 은전 40만 냥이 내 호주머니로 들어간 것인가?’

황태자는 감찰원 관리가 방려를 끌고 가는 걸 보자 입이 마르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는 자신의 멍청한 잘못으로 방려가 3사 심문을 받게 되는 일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걸 알았다.

그가 옆에서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부상서 안행서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멈춰라!”

범한이 쓰러뜨린 예부 상서 집안은 겉으로는 동궁 편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장 공주의 심복이었다. 이 사실을 황태자는 폐하가 시를 읊었던 그 날밤 이미 알고 있었다.

예부 상서 집안이 장 공주의 심복이었으니 안행서는 분명 자신의 지시에 따라 곽보곤이 호부에서 돈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네 놈은 나한테 암시를 주기는커녕 나를 함정에 몰아넣으려 하는구나!’

“황태자 저하, 왜 그러십니까?”

안행서가 은은한 미소를 짓고 그를 바라봤다.

순산 말문이 막힌 황태자는 자신이 이미 진퇴양난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주도해 대대적인 조사를 하게 해 놓고 인제 와서 거두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 관리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 이 자리에서 물어봐도 될 것 같네.”

안행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호 대학사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사일생으로 화를 면한 방려는 마침내 황태자가 자신을 기억해 냈다는 걸 알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황태자의 곤혹스러워하는 눈빛을 보고는 오늘 일을 잘 수습하기 힘들 거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황태자가 순간 눈을 번뜩였다.

‘곽보곤이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내가 부인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그냥 저 방려라는 놈의 입을 막아 버릴까?’

이런 생각이 든 그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방려라고 했는가? 이 돈이 어디로 갔는지 자세히 말해 보아라. 폐하의 명을 받아 조사하는 이상 탐관들은 엄벌하겠지만······ 좋은 관리가 억울하게 누명 받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방려가 희망을 품은 눈빛으로 황태자를 바라봤다. 그는 황태자가 자신에게 아무에게나 죄를 뒤집어씌우라는 암시를 했다는 걸 알았다. 은전 40만 냥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사실이 들통 난 이상 호 대학사와 안행서, 그리고 대리사와 감찰사 관리들 앞에서 일을 덮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방려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누구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장부를 조작한 거라 주장해야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렇게 큰 액수를 다른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는 명분을 찾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안행서가 황태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황태자는 자신이 살기 위해 졸개를 희생시키려 하면서도 무능한 나머지 희생시킬 졸개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려는 황태자가 미래 대위에 오를 사람인만큼 이번 일에서 살아남기만 한다면 자신도 전화위복의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40만 냥을 위해서 황태자가 보잘것없는 원외랑의 목숨을 신경 쓰겠는가? 방려는 이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관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한참을 고민하던 방려가 피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억이 납니다.”

그가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당시 예부에서 발문을 보내 성상께서 각 지방의 서원과 향시 학원을 수리하라 명령하셔서 돈이 필요하니 보내 달라 요청했던 게 총 14번이었고 금액은 은전 40만 7백 냥이었습니다. 예부에 돈을 받은 증명서가 있을 테니 본관이 이 일과 관련이 없다는 것은 조사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모든 일은 경국 법률과 조정의 규율에 따라 진행하였으니 대인들께서는 부디 본관 아래에 있는 관리들에게 아량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은전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발문을 보내 각 로와 주에서 2년 동안 각 지방의 서원과 향시 학원의 수리 상황을 알아보라 하면 명백히 밝혀질 일이지요.”

오랫동안 병환으로 누워 있었던 범 상서가 마침내 허약한 몸을 이끌고 호부 관아에 나타나 무기력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감찰원 1처 관리들이 급히 다가가 부축했고 호 대학사가 일어나 안행서를 비롯한 관리들에게 인사하라고 명령했다. 호부를 조사하고 있었지만 어떤 관리도 범건을 얕잡아 볼 수는 없었다.

9년 동안 호부를 지휘했던 상서 대인이 조사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호부 관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가 부하들을 대신해 은전의 행방을 자세히 설명하자 모든 일이 명확하게 드러난 동시에 창백하게 질려 있던 황태자의 얼굴도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상서 대인.”

“호 대인.”

호 대학사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범 상서를 맞이했다.

호부 조사를 맡은 관리들이 둘러서서 병중에 있는 상서 대인을 위로했는데 이부상서 안행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상서 대인을 향해 인사했다. 감찰원 관리들은 문밖에서 작은 바람이라도 불어와 범 상서의 몸이 상할까 염려하며 바람을 막으려 혈안이 됐다.

조정에서 호부를 조사하고 있었고, 황제는 범 상서가 사직하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범건이 여전히 조정에서 관리로 있는 이상, 그리고 황제의 머릿속에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범건에 대한 추억이 있는 이상······ 그리고 멀리 강남에 있는 범한이 살아 있는 이상 조정 관리들은 범건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사받아야 할 대상인 호부 상서를 조사를 맡은 관리들이 위로해 주는 웃지 못 할 상황이 생겨났다.

더구나 조사에 파견된 감찰원 관리들은 모두 1처 사람들이었다. 1처는 목철이 수장이 된 뒤로 범한의 직속 부서나 다름없었으니 범건에게 쩔쩔매는 건 연한 결과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황태자는 마음이 불쾌해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평상시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며 병을 핑계로 며칠 동안 호부에 나타나지 않던 범건이 갑자기 나타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게 불쾌했다.

황태자이자 경국의 미래 군주인 그는 범 상서와 눈이 마주치자 마지못해 일어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상서 대인, 몸은 어떠한가?”

황태자는 범한이 두렵지도 않았고 감찰원이 가진 권력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황실의 일원이자 용상을 물려받을 후계자로서 그에 걸맞은 태도를 보여야 했다. 더구나 범씨 집안은 황족인 이씨 가문과 오랜 시간 우정을 나눠온 가문이었고, 황제의 유모였던 범씨 집안 노부인은 여전히 담주에서 살아계셨다. 황태자는 황제가 자신의 유모였던 범씨 집안 노부인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지만, 상서 대인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범건이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호부의 일로 저하와 호 대인이 고생하시는 것 같아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이후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각자 자리에 앉았다. 범건은 조사를 받아야 하는 처지였지만 호부 상서에 대해 명확한 지시가 내려온 게 없었기에 당당하게 함께 자리에 앉았다.

이곳 호부는 범건의 본거지였다.

상황이 진정되자 모두의 시선이 다시 호부 원외랑 방려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모두 달랐다. 안행서는 황태자의 안색을 몰래 살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황태자는 안절부절못하며 주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호 대학사는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며 남몰래 만족한 미소를 지었고 감찰원은 당장이라도 끌고 가 고문할 기세로 방려를 노려봤다. 오직 범 상서만이 방려의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있는지 모르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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