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화 호부의 일 (4)
감찰원 관리들은 장부를 정리 작업을 감독하는 한편 호부 관리들이 낑낑대며 장부가 가득 담긴 큰 대나무 광주리를 들고 나오는 모습을 바라봤다. 광주리는 무려 일곱 개나 되었다.
자신 앞에 놓은 엄청난 양의 장부에 놀란 황태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많은 장부를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럼 조사가 대체 언제 끝난단 말인가?”
호부 좌시랑이 살짝 원망 섞인 목소리로 설명했다.
“황태자 저하, 호부 7사는 천하 7로의 재정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강 정비 사업과 같은 네 가지 청리사 일도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황실 금고 전운사가 관리하던 3대 금고와 서산 서방 등 7간방도 작년부터 호부에서 관리하게 되었으며, 경도 부근에 있는 창고 열일곱 개와 옥천국 및 전법당의 화폐 제조 업무, 그리고 항주를 비롯한 먼 지역의 운송 창고 관리까지 모두······.”
좌시랑 대인이 주저리주저리 끊임없이 호부에서 담당하는 업무에 관해 설명하자 황태자는 머리가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그가 재빨리 손을 저어 좌시랑 대인에게 말을 멈추라고 명령했다.
호부 조사를 맡은 관리들은 시작도 하기도 전에 산처럼 쌓인 장부에 질려 의욕 잃은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단순하게 호부를 돈을 관리하는 관아라고 생각했을 뿐 얼마나 복잡한 일을 맡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호부 좌시랑의 말을 들은 이들은 하루 이틀 안에 끝날 조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자포자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관리들을 바라보며 좌시랑 대인이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황태자 저하, 지금 7개 광주리에 담긴 장부는 바로 산동로 은전사 장부입니다. 며칠 전에 상서 대인께서 관리들에게 이곳 장부를 정리하라 명하신 덕분에 빨리 내보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장부들까지 모두 모아 조사하려면 최소한 십여 일은 필요합니다.”
좌시랑의 말에 분노가 치솟은 황태자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이곳에 장부가 얼마나 많이 있든 조사하는 데 며칠이 걸리든 신경 쓰지 않네. 단 부황께서 조사하라 명하셨으니 자네들도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할 것이네. 만일 몰래 조사를 방해하려 한다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야!”
황태자의 일갈에도 호부 좌시랑은 전혀 겁내지 않고 또박또박 반박했다.
“저하, 소신이 어찌 그런 짓을 벌일 수 있겠습니까. 대신들이 폐하의 명을 받아 조사하러 왔으니 장부를 내보이겠다는 것이지요. 장부를 보지 않고 금고에 있던 돈의 흐름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장부 없이 수백만 냥의 금고에 든 은전이 일일이 세어본다면······ 그것도 수일은 걸릴 것입니다.”
좌시랑이 지지 않고 말대꾸를 하자 황태자가 신경질적으로 소매를 털며 말을 끊었다. 어차피 호부에 문제가 있다는 게 발견되면 처벌받을 인물과 입씨름을 할 필요는 없었다.
상석에 앉아 냉철한 눈매로 그 상황을 지켜보던 호 대학사는 적지 않게 놀랐다. 범 상서가 관리하는 호부는 과연 다른 관아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좌시랑이 낮은 관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태자 저하 앞에서 전혀 주눅이 들지 않고 당당하게 주장을 펼치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호부 좌시랑이 화가 나서 그러는 것이라 짐작한 호 대학사가 빙그레 웃으며 설명했다.
“좌시랑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조사를 정확히 하기 위해서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진행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호부의 일상 업무를 방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국의 관아들이 모두 호부에서 돈을 융통해 운영되는 만큼 조사를 명목으로 호부의 행정을 방해하는 건 폐하께서도 원치 않으실 겁니다.”
그 말에 좌시랑 대인이 호 대학사에게 공경의 눈빛을 보내며 부드럽게 말했다.
“호 대학사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어디서부터 조사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일단은 호부의 모든 장부를 정리한 뒤 전문 관리들을 추려 대조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감찰원, 이부, 대리사에서 장부를 전문으로 보는 관리가 있어 인력을 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준비를 모두 마치는 건 최소한 모레는 되어야 가능해 보였다.
그때 한 관리가 호 대학사 옆으로 다가와 슬며시 말했다.
“하관이 보기에······ 금고와 강남사 장부를 먼저 비교해 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순간 호부 안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금고 안에는 국고의 은전이 들어 있었으므로 만일 호부에서 국고 은전을 강남에 보냈다면 문무백관들의 추측대로 강남사 장부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금고와 강남사 장부를 먼저 확보해 조사하자는 말은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자는 노골적인 요청이었다.
호 대학사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관리의 주장을 반대할 이유를 찾을 수도 없었고, 그 역시 호부가 나랏돈을 몰래 강남에 보냈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는 황태자와 잠시 상의한 끝에 감찰원과 호부 관리에게 먼저 두 곳의 장부를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그날 밤에 아무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둘째 날에도 아무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셋째 날에도 아무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호부 조사를 시작한 경국 조정은 점차 끝을 알 수 없는 장부의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다. 호부의 잘못을 들춰내겠다는 일념으로 조사에 뛰어든 관리들은 순식간에 창산의 눈만큼 높이 쌓인 장부 안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넓은 호부 곳곳에 장부가 작은 산처럼 쌓여 있었고, 오래된 종이에서 나는 곰팡내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조사를 맡은 관리들은 장부를 펼칠 때마다 피어나는 자욱한 먼지와 곰팡내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눈앞에 온통 누런 종이와 숫자만 보여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모두들 지친 눈을 비비며 힘겹게 장부와 씨름하고 있었다.
호부 안은 끊임없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드르륵하는 주판알 굴리는 소리, 그리고 먼지를 마셔 칼칼한 목을 축이려 차를 마시는 소리만 들렸다.
반복되는 단조로운 소리만 듣다 보면 저절로 잠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의자에 앉아 조사를 지켜보는 관리들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숫자들과 씨름할 필요는 없었지만 대신 몰려오는 졸음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각 관아 관리들이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장부에 적힌 숫자들이 맞는지 확인했지만 어떤 문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문제가 있을 거라 확신했던 금고와 강남사 장부에서 호부를 뒤엎을 만한 문제는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이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심지어 남몰래 범씨 집안 편에 있던 호 대학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이렇게나 많은 장부를 작성하다 보면 실수로라도 잘못 적은 게 있는 게 정상이었고, 더구나 호부는 매일 수도 없이 많은 계산을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난 2년 동안 작성된 장부 전체에서 조금의 문제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소위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고 장부가 너무 깨끗하면 거짓이라는 말처럼 완벽한 장부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호부 장부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은 그 장부가 거짓이라는 의미였다.
호 대학사뿐만 아니라 조사에 참여한 이부와 형부 관리들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아주 작은 허점이라도 찾기만 한다면 호부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조사에 열을 올렸다.
춘곤증이 밀려오는 따뜻한 오후 조사를 끝낸 관리들이 장부에 파묻고 있던 머리를 들어 서로를 바라봤고, 결과를 기다리던 상사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관리들이 놀란 표정으로 상사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모두들 실망했고, 결과를 믿을 수 없었다.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최소한 강남사와 금고 장부에서는 조금의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호부는 너무나도 깨끗했다. 정말이지 기괴할 정도로 깨끗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오후에 급히 호부로 달려온 이부상서 안행서가 고개를 저으며 옆에 있는 호 대학사에게 말했다.
“이건 정상이 아닙니다.”
호 대학사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행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골몰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두 곳의 장부만 조사했으니 문제가 발견되지 않은 겁니다. 호부 관리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조정에서 의심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해당 부분의 장부만 조작해 두었겠지요. 하지만 저희는 모든 장부와 금고를 조사해 실물과 장부에 적힌 숫자가 맞는지 확인해 볼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체를 다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7사와 3대 금고의 모든 장부를 확인해 본다면 분명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호 대학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조사가 힘든 건 말할 것도 없고 시간도 오래 걸릴 겁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황태자는 순간 기괴한 감정이 들었다.
‘여기 있는 관리들 모두 호부가 담당하는 금고에서 은전을 꺼내 이득을 취한 사람들이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 대담하게 장부 조사 범위를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은 두려운 게 없단 말인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안행서의 의견에 동의했다. 범씨 집안을 공격하는 건 그가 지금 가장 바라는 일이었다.
장부 전체를 조사한다는 소식은 빠르게 범씨 집안에 전해졌다. 병을 핑계로 누워서 소식을 받은 범건은 담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예술가가 가짜 장부를 만든다면 당연히 온 힘을 들여 완벽하게 만드는 법이지. 조사해 봐라. 조사 범위를 넓히면 넓힐수록 문제를 발견하면 할수록 좋으니까.”
호부 조사의 범위가 확장됨에 따라 각 부에서 관리들이 추가로 투입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장부와 씨름한 끝에 오래된 장부에서 작은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호부의 문제를 밝혀낼 실마리를 찾았다는 사실에 조사하던 대신들은 마침내 마음을 놓고 미소를 지었다. 발견한 실마리가 호부 전체 문제를 들춰낼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도 일단은 범 상서가 이끄는 호부가 완전무결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다는 것이 마냥 좋았다.
조사를 맡은 관리들이 처음 발견한 문제는 경력 4년 창주에서 사용할 겨울 솜옷 비용으로 크지 않은 액수였다.
하지만 이 작은 발견을 계기로 점차 여러 문제가 드러나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호부 관리들이 절대 드러나지 않도록 겹겹이 감춘 잘못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조사를 맡은 관리들은 마침내 모두가 놀랄만한 결과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황태자와 이부상서 안행서가 무척이나 기뻐하는 가운데 호 대학사가 부하 관리들에게 끝까지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지방에서 경도로 이어지는 복잡한 실마리를 뿌리까지 파고 내려가던 이들은 점차 경도와 관련된 증거를 쥘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경도 호부 고위 관리들을 압박할 증거를 찾은 것이었다.
줄곧 호부에서 조사에 협조하고 있던 좌시랑과 우시랑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겨울 솜옷 비용이 적힌 장부도 절차대로 작성된 것이었고 자신들도 한번 살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십 만 냥밖에 되지 않는 겨울 솜옷 제작 예산에 다양한 문제들이 줄줄이 엮여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조정이든 상인이든 장부를 작성할 때 가장 잘하는 것이 바로 큰 문제를 쪼개서 무수히 많은 작은 문제들로 만든 뒤 방대한 항목에 뿌려 드러나지 않게 하는 거였다.
그러니 겨울 솜옷 예산에 뿌린 작은 조각이 실마리가 되어 다른 문제들까지 노출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좌시랑과 우시랑은 상서 대인을 찾아가 의견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생각을 눈치챈 황태자가 이 일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호부 관리들은 함부로 자리를 이탈하지 말라고 명령하고는 감찰원과 심복 관리들을 시켜 두 사람을 감시하게 했다.
범건은 벼슬길에 오른 뒤로 지금까지 줄곧 호부에서 근무해 왔다. 신정 전후로 호부의 명칭이 어떻게 변하든 조정 인사 규정이 어떻게 변하든 줄곧 호부를 지켰던 그는 9년 전에 호부 좌시랑 자리까지 올랐다. 그때 고령이었던 호부 상서가 병으로 집에서 쉬자 황제의 총애를 받는 범건은 파격 승진을 통해 상서 자리에 올랐고, 다른 세력이 호부에 진입해 좌지우지할 수 없도록 저지했다. 이로써 범건은 호부 전체를 장악할 수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9년의 세월이었다. 그 9년 동안 경국 황제는 한결같이 범건을 총애했고, 범건은 호부라는 철판같이 단단한 이익집단을 만들어냈다.
자신들의 위력을 조금도 과시하지 않고 쥐죽은 듯 조용히 내실을 다지는 이익집단이었다.
그래서 호부 조사가 시작될 대 호부 관리들은 모두 자신들의 상사인 범 상서 대인만 바라봤다. 그들은 범 상서 대인이 쓰러지지 않는다면 자신들에게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호부가 위험에 빠진 데다가 좌시랑과 우시랑이 범씨 집안에 갈 수가 없게 되자 겁을 먹은 호부 관리들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