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454화 (454/1,108)

454화 호부의 일 (3)

“오늘 저희가 조정에서 작은 범 대인을 문하중서로 불러 내각에 참여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게 만든 게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폐하께서는 이미 앞으로 조정의 한쪽은 우리에게 맡기고 다른 한쪽은 작은 범 대인의 감찰원이 맡도록 계획해 두셨을 겁니다. 그래서 범한을 내각에 참여하게 하자는 저희의 요청을 단번에 거절하신 거지요. 작은 범 대인이 비록 이 일로 저희를 원망하지는 않겠지만 범 상서를 탄핵하자고 주장한 문관들에게는 원한을 품지 않겠습니까? 조정 문관들과 사이가 틀어진 이상 작은 범 대인은 벼슬길에 나서겠다는 생각을 접을 테니 문하중서에서 저희와 같이 있을 가능성도 없는 셈이지요.”

서무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폐하의 마음이 예측하기 어렵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호 대학사도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한 말은 우리 두 사람의 목이 달아나게 할 수 있는 내용이니 술김에 아무 곳에나 가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나도 대학사입니다.”

서무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술에 취해도 입단속은 할 수 있습니다.”

말하던 그가 문득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단칼에 베이어버릴 첫 번째 새로 범 상서 대인을 거론한 것은 틀린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뭣 때문에 범 상서 대인이 자진해서 사직하도록 하시겠습니까?”

호 대학사가 은은한 한숨을 내뱉으며 설명했다.

“그야 단순한 이유이지요. 폐하께서는 매일 조정에서 범 상서 대인의 얼굴을 보는 게 싫으신 겁니다.”

경국 문관들의 수장인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범건이 불쌍해지면서 제왕은 정말이지 기분을 맞추기 힘든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호부 상서 범건의 상황에 안타까워하던 두 대학사는 순간 호부를 조사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빨리 범씨 집안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황궁 안에 많은 인맥을 보유한 범씨 가문이 이 사실을 모를 리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서방에서 진행된 회의가 끝나고 얼마 뒤 병을 핑계로 저택에 있던 범건의 귀에 내일 조회에서 폐하가 정식으로 호부 조사를 지시할 거란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과거 풍류의 기질이 사라진 근엄한 얼굴에는 침착하고 여유로운 기색만 보일 뿐이었다.

“폐하가 단칼에 베어 버리려는 새는 세 마리가 아니라 네 마리이네.”

범건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맞은편을 향해 말했다.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충성을 다해 보좌하면서 항상 폐하의 뛰어난 지략에 감탄을 금치 못했네. 그러니 오늘 일도 나로서는 그저······ 폐하의 영민함에 감탄할 뿐이지.”

범건은 공개적으로도 비공개적으로나 폐하를 언급할 때마다 항상 존경하는 마음으로 감탄할 뿐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네 번째 새가 누구일 것 같은가?”

범건이 자신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구부린 뒤 너머지 네 개의 손가락을 쭉 폈다.

“네 번째 새는 바로 감찰원이네. 폐하께서는 감찰원이 아직도 자신의 명에 따라 운영되는지 확인함으로써 범한이 감찰원을 얼마나 장악했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시네.”

범건이 멀리 강남에 있는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며 한숨 쉬었다.

“범한이 너무 빨리 움직였어. 만일 폐하께서 이번 일을 계기로 감찰원을 마음대로 지휘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신다면 자연스럽게 범씨 집안이 쥐고 있는 권력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실 게 아닌가.”

그가 눈썹을 경망스럽게 들썩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게다가 폐하께서는 진평평 대인과 내가 어떤 사이인지 확인하고 싶어 하시네. 자네도 그동안 폐하께서 나와 절름발이 노인을 신뢰하신 이유가 뭔지 알고 있겠지. 범한이 경도에 오기 전에 나와 절름발이 노인은 항상 대립해왔었네. 그가 하고 싶어 하는 걸 내가 항상 저지했고, 내가 하려 하는 걸 그가 항상 반대했었지.”

그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와 진평평 대인은 항상 상대방을 의심해 왔네. 그렇게 오랜 시간 상대방을 의심한다는 건 사실 드러내놓을 만한 일은 아니지.”

그가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범한이 경도에 오고 나서 모든 게 달라졌네. 나와 진평평 대인은 서로를 의심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폐하가 우리를 의심하기 시작하셨지. 더욱이 범한이 능력을 드러내며 명성을 높이면 높일수록 폐하께서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신 게 문제네.”

은은한 미소를 짓던 그가 정색하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질투하고 계시네. 그래서 나보고 물러나라 하는 것이지.”

폐하가 자신에게 칼을 겨눈 이유를 설명하던 호부 상서 범건이 최근에는 보이지 않았던 경망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자네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않은가. 내가 그동안 계속 침묵한 채 그럭저럭 연기를 잘 해왔지만 사실 나는 뼛속까지 괴팍하고 모질은 사람일세. 폐하께서는 임약보 대인이 공개적으로 망신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듯이 나도 물러나라 말하고 계시지만······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네. 어쨌든 체면 문제에 더 예민한 건 신하가 아니라 황제이지 않은가.”

“이것은 자네가 나한테 가르쳐 준 것이네.”

범건이 한숨을 쉬며 손가락으로 가볍게 종이를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종이의 감촉이 손을 통해 전해져왔다.

종이 위에는 한 여인의 두상이 그려져 있었다. 먹물로만 그린 그림이었지만 여인의 생김새와 표정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었다.

더욱이 가여움, 온화함, 장난기가 뒤섞인 여인의 눈동자는······ 너무나도 생기가 있어 마치 범건을 진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폐하께서 화가에게 황궁에서 몰래 자네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지.”

범건이 그림 속 여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나는 자네의 생김새를 항상 내 머릿속에 선명히 기억하고 있네. 그래서 자네가 했던 말들을 떠올릴 때면 그리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어. 수없이 자네를 그렸는데 그중에서 자네를 정말 닮은 게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는가? 대답을 들을 방법이 없어 한스럽네.”

범건이 한숨을 쉬며 그림을 촛불에 가지고 가더니 불을 붙여 태웠다. 그가 불꽃에 점차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만약 그때 폐하와 내가 담주 고향집에서 여름을 보내지 않았다면 자네를 보지도 못했을 거고······ 이후의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아마 그랬다면 나는 끝까지 기생집 화가 놀이에 빠져 지냈을 거네.”

범건이 입꼬리를 올리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이 세상에는 예술가도 필요하다고 말했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경국에서 돈 냄새를 가장 많이 풍기는 사람이 되었네.”

가장자리부터 시작된 불꽃은 점차 종이 중간으로 침투했고 얼마 뒤 검은 재만 남게 되었다.

“자네는 항상 나를 가장 믿을 만한 사람으로 생각해 줬지.”

다 타고 남은 재를 바라보며 범건이 담담히 말했다.

“자네가 끝까지 나를 믿어 준 걸 고맙게 생각해. 그러니 안심하게. 나에게 많은 걸 바꿀 능력은 없지만, 최소한 경도에서 범한이 성장해가는 모습은 지켜볼 테니까.”

그때 서재 밖에서 부드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범건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씨가 서재로 들어와 과일즙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것이 어서방에서 있었던 일을 이미 의 귀빈을 통해서 전달받은 모양이었다. 범씨 집안 여주인인 그녀는 내일 조회에서 남편이 어떤 곤란함에 처할지 잘 알고 있었다.

범건이 그녀의 안색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걱정하지 말게. 폐하께서 나를 가혹하게 대하지는 않으실 테니.”

유씨의 눈에 원망하는 기색이 살짝 비쳤다.

“폐하께서 옛정을 생각하셨다면 어째서 나쁜 놈들의 이간질에 휘둘려 호부를 조사하려 하시는 겁니까. 6부 중에서 깨끗한 곳이 어디 있습니까?”

범건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를 믿어야 하네. 조정의 중요한 일과 연관이 있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유씨는 범건이 이 비통한 화제에 대해 더는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범건이 잔을 들어 올려 책상에 남아 있는 연기를 향해 말했다.

“삼가 공경.”

그리고는 단숨에 마셨다.

그 모습을 본 유씨가 멍한 표정으로 ‘누굴 공경한다는 거지?’하고 생각했다.

* * *

다음날 열린 조회에서 모두가 예상한 대로 폐하는 지난 2년 동안 호부가 보인 지지부진한 태도를 엄하게 질책하고 국고가 빈 문제의 책임을 거의 대부분 호부에게 돌렸다. 호부는 이처럼 궁지에 몰렸음에도 상서 범건이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오지 않아 변호를 할 수도 없었다. 지켜줄 상사가 없는 호부 관리들은 무기력하게 조정 문무백관들의 공격을 받아내야만 했다.

마침내 조정에서 몇 년 동안 호부의 문제들을 조사해 국고가 텅빈 이유를 찾아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전날 어서방에서 이야기했던 데로 구체적으로 조사를 진행할 기관은 감찰원으로 정해졌고, 이부와 형부, 대리사는 보좌하도록 했다. 또 문하중서 호 대학사를 총 책임자로 임명하고 황태자는 옆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좌하도록 했다.

호부를 조사할 거라는 소문이 이전부터 있었기에 그것 자체는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꾸려지는 규모는 대신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호부를 조사하는 데 동원되는 기관과 인력을 본 대신들은 폐하가 호부의 먼지 하나까지 탈탈 털어 문제를 찾아낼 작정을 했다고 생각하며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신들은 경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효자인 작은 범 대인이 이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졌다.

그날 오후 조사를 맡은 각 관아의 관리들이 호부 관아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경도 수비 병력도 동원되어 고사방 창고를 감시했다. 관리들이 가장 처음 조사 대상으로 삼은 건 호부 7사(司) 장부 문제였다.

큰 홰나무가 심어져 있는 호부 관아 앞은 항상 시끌벅적하기는 했지만, 오늘은 더 소란스러웠다. 돈을 요청하러 온 관리들 때문이 아니라 돈을 조사하러 온 관리들 때문이었다.

잔뜩 긴장한 호부 관리들이 황제의 명을 받아 조사하러 온 관리들은 안으로 안내했다. 한참을 시끌벅적하게 난리를 피운 끝에 황태자와 고관들이 모두 앉을 수 있을 만큼의 의자가 마련되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호부 우시랑과 좌시랑이 범 상서를 대신해 2년 동안 호부의 운영 상황을 보고했고, 이어서 감찰원의 감시하에 장부 조사가 시작되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호 대학사와 황태자는 호부 관리들을 괴롭힐 마음은 없으므로 온화한 말로 격려하며 구체적인 조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반면 이부와 형부 관리들은 호부 관리들을 궁지에 몰 수 있는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생각에 사소한 문제만 발견되어도 큰 소리로 화를 내거나 질타했다. 이들은 호부를 조정 재정을 관리하는 관아가 아니라 온갖 악행이 감춰진 범죄 소굴로 여기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본 호 대학사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부와 형부 관리들은 평소 범씨 집안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호시탐탐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그는 자신이 똑바로 감시하지 않는다면 이번 조사가 자칫 범씨 집안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변질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대규모 인원이 호부로 들어와 제집처럼 당당하게 들쑤시고 다니는 모습을 보자 호부 관리들은 상실감을 넘어 절망감까지 들었다. 더구나 오늘 관아에 자신들을 지켜줄 범 상서 대인까지 없으니 호부 관리들은 의지할 데 없는 고립감을 느끼며 벼슬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서도 가장 큰 고난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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