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453화 (453/1,108)

453화 호부의 일 (2)

황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감찰원이 조사하게 하고 이부, 형부, 대리사에서 사람을 보내 돕도록 하는 한편, 자네들이 이 일을 총괄할 사람을 뽑으면 되지 않소. 호부를 조사하려면 여러 사람의 힘이 필요할 것이오.”

사람을 보내 돕게 하라는 말은 사실 감찰원을 감시할 사람을 보내라는 말이었다. 다만 황제가 이부, 형부, 대리사까지 동원해 호부를 조사하면서까지 굳이 감찰원을 끌어들이려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호부 조사를 책임질 관리를 선발하는 일에 대신들은 서로 미룰 뿐 나서려 하지 않았다. 범씨 집안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관리들에게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일이면서 문제를 찾으면 천하에 명성을 떨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뜨거운 감자인 이 일을 누구도 용기를 내 맡고 싶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범씨 집안과 원한이 있는 이부상서와 2 황자도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은 채 대신들과 아들들의 얼굴을 훑어보다가 마지막에 호 대학사를 바라봤다.

화들짝 놀란 호 대학사는 자신이 이 일을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연초에 경도로 들어와 황제에게 내각을 겸하는 문하중서 대학사로 발령이 된 그는 사실 그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젊은 시절 문학으로 명성을 떨친 뒤 각 지방을 다니면서 관리로 실적을 쌓기는 했지만, 경도 중추 기관에 부임한 뒤로는 별다른 성적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황제가 호 대학사를 지목한 이유는 경도에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정 세력과 결탁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호부를 조사해 조정에서 입지를 다지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호 대학사는 폐하가 자신을 믿고 중용했다는 사실에 감개무량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범씨 가문에 미움을 받게 됐다는 게 원망스러웠다.

그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터졌다. 호 대학사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줄곧 침묵하고 있던 1 황자가 먼저 입을 연 것이다.

“아바마마, 소자가 맡고 싶사옵니다.”

황제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너는······ 안 된다.”

“왜 아니 되옵니까?”

1 황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소자가 맡는다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조사할 수 있습니다. 소자의 충심을 믿어 주십시오.”

1 황자의 진지하게 고집을 부리자 웃고 있던 황제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짐이 안 된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너는 금군 대통령이 아니냐. 네가 호부 조사를 맡는 것이 군대가 조정의 일에 간섭할 수 있다는 사례를 만드는 것이라는 걸 모르는 것이냐!”

황제의 근엄한 목소리에 놀란 1 황자는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황제는 1 황자의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성격이 좋기는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1 황자도 군대가 조정을 간섭하는 사례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나오자 묵묵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말할 수 있을 때를 살피던 호 대학사가 슬며시 일어났다.

“소신이 호부 조사 총 책임을 맡겠사옵니다.”

황제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려 황태자를 바라봤다.

“황태자는 호 대학사 옆에서 열심히 보좌하면서 배우도록 해라.”

“소자, 명을 따르겠습니다.”

황태자는 침착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명목상 보좌를 하며 조정 일을 배우는 것이었지만 누가 동궁 황태자의 말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총 책임자는 호 대학사가 아니라 자신이 되는 셈이었다. 황태자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현공묘 사건 이후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부황의 마음이 풀렸다고 생각했다.

대신들이 떠난 뒤 조용한 어서방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던 황제가 용상에서 일어났다.

급히 다가와 황제에게 외투를 걸쳐주던 요 태감은 황제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음을 알아채고는 조용히 물었다.

“폐하, 돌아가 쉬시렵니까?”

“아니다.”

황제가 어서방을 나서며 말했다.

“그곳으로 가자.”

요 내관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다가 급히 뒤를 따랐다. 최근 며칠 동안 그 작은 목조 건물에 가는 횟수가 점차 많아지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 * *

궁문 밖에서 대신들은 뒤숭숭한 표정으로 서로 인사한 뒤 헤어졌다. 몇몇은 얼른 돌아가 자기 쪽 사람들에게 폐하가 호부에 칼을 대기로 했다는 걸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가 이후 국면을 예측하고 준비하기에는 모호한 점이 아직도 많이 있었다. 그중 이들의 마음을 가장 불안하게 하는 것은 폐하의 마음이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변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거였다.

“호 대학사, 내 집에서 차를 마시지 않겠소?”

서무가 궁문을 나서자마자 먼저 떠나려 하는 호 대학사에게 직접 말했다.

두 사람은 문학을 좋아한다는 것과 문신들의 수장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경국 황제는 대신들이 개인적으로 왕래하는 걸 금지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커도 금세 친해져서 항상 함께 어울렸다.

서 대학사의 눈빛에 마음이 흔들린 호 대학사가 제안을 받아들였다.

“폐하의 마음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남성에 있는 서무 저택은 수려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크지는 않은 저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술기운이 달아오른 두 사람이 정자에 앉아 나누는 대화가 봄바람을 타고 저택 담을 넘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규모가 작지는 않았다.

서무가 한숨을 쉬었다.

“아우가 형님의 뜻을 따르면 형수의 미움을 받게 된다는 속담처럼 이번에 대인이 맡은 일은 한쪽을 만족시키면 다른 한쪽에게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폐하를 형님으로 범씨 집안을 형수로 비유한 것이니 의미가 아주 들어맞는 건 아니었다.

호 대학사가 큰 소리로 웃으며 물었다.

“무슨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겁니까? 형님은 뭐고 형수는 또 뭡니까. 대인 술이 과하셨나 봅니다.”

“터무니없는 말이 아닙니다.”

서무가 정색하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폐하의 기색을 보니 호부의 문제를 들춰내야 만족하고 그만두실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호부의 문제가 정말 드러난다면 범 상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호부에 어떤 문제가 있냐는 것입니다.”

호 대학사가 근심하는 표정으로 털어놨다.

“대인께서 작은 범 대인의 성격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영리함 속에 매서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말입니다. 대인의 설명대로 온화하고 우아한 겉모습과 달리 대담한 행동도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강남을 안정시켜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서라도 호부의 돈을 동원했을 겁니다. 들리는 소문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소문이 진짜일지 거짓일지는 잠시 논의하지 말도록 합시다. 강남 총독 설청 대인이 견해를 밝히지 않은 이상 조정에서 그곳 상황을 아는 건 불가능합니다. 호부의 문제는······.”

서무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호부는 돈을 관리하는 관아인 만큼 전쟁, 강 정비 사업, 이재민 구제, 건물 수리, 춘시 개최 등 국가에서 하는 공적인 일에 돈을 조달합니다. 그리고 황자들이나 관리들의 요청에 따라 돈을 내어줘야 해야 하지요. 이처럼 돈을 다루는 관아인 만큼 부패는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역대 왕조 중에서 호부가 청렴했던 적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호부는 깨끗할 수 없는 곳입니다. 범 상서 대인은 호부 말단 관리부터 시작해 줄곧 호부에서만 일해온 사람입니다. 솔직히 바른말로 범 상서 대인이 호부를 관리한 기간이 경국이 개국한 이래로 호부가 가장 깨끗하고 청렴했던 시기가 아니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호부를 건들여 낱낱이 파헤쳐서 되겠습니까?”

호 대학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부 상서 범건은 확실히 전임 재상 임약보나 강남에서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범한과 다른 면이 있었다. 호부 상서 범건의 아래 있는 부하 중에서 부패한 자들이 간간이 나오기는 했지만, 본인만큼은 항상 성실하고 정직했다. 이처럼 능력이 출중하면서도 정직한 관리는 드물었다.

인재를 아끼는 두 사람으로서는 호부 상서가 이번 정치 싸움에 휘말려 물러나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애석한 일이었다.

하지만 폐하가 은근히 범건을 파면시키고 싶다는 의사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뭘 어찌 할 수 있겠는가?

“어쩌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 걸까요?”

서무가 미간을 찌푸리며 오늘 어서방에 갔던 관리들이 가지고 있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호 대학사는 황실 금고에서 생산한 독주만 홀짝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무는 그런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며 빤히 바라보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동료가 이런 방면에서는 상당히 신뢰할 만한 판단을 내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참 서로 눈빛만 교환하던 끝에 호 대학사가 한숨을 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봤을 때 폐하의 뜻은 정말이지······.”

그가 제왕의 뜻을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은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감탄스럽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폐하께서 호부를 조사하는 이유가 관료 사회의 소문과 내면의 의문 때문인 듯 보이지만 사실을 새 세 마리를 단칼에 베이어버리기 위한 계책입니다.”

“새 세 마리는 단칼에 베이어버린다고요?”

술기운이 달아오른 서무가 혀 짧은 소리로 물었다.

“첫 번째 새는 당연히 호부에 있는 범 상서 대인이지요. 호부를 조사하게 되면 결과가 어떻든 범 상서 대인은 사직을 청하고 낙향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 새는······.”

호 대학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맨 먼저 이 일을 거론한 장 공주 일파의 관리들입니다. 호부 조사를 계기로 범 상서 대인이 사직한다면 아들인 작은 범 대인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이 일에 작은 범 대인까지 연루되는 건 허락하지 않으실 테니 작은 범 대인은 계속 감찰원 제사 자리를 유지할 겁니다. 그렇다면 감찰원이 장 공주 쪽 관리들에게 복수를 하는 건 당연한 결과지요. 이번에는 폐하께서도 황실 압박에 못 이겨 사건을 중재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냥 사건이 진행되는 걸 바라보시다가 작은 범 대인을 위로하기 위해 몇몇 관리들을 내쫓으시겠지요.”

“황실의 압박이라······.”

서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폐하께서 황실 압박에 자유로울 수 있으시겠습니까? 폐하께서 중재자 역할을 하지 않을 거라는 이유가 뭡니까?”

“간단한 이유지요. 범 상서 대인이 사직하면 작은 범 대인이 분노할 테니 폐하께서는 모든 탓을 장 공주 일파에게 돌릴 겁니다. 제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정 문무백관들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겁니다. 범한이 재상을 잃은 뒤 다시 범 상서마저 잃었으니 폐하께서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장 공주 쪽 관리들을 제거하실 겁니다.”

호 대학사가 계속 설명했다.

“폐하께서는 이런 이유를 들어 황궁에 계신 분을 설득할 겁니다. 모든 게······ 경국을 위한 것이다 뭐 그런 이유 말입니다.”

그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자포자기한 듯한 웃음이었다.

서무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럼 세 번째 새는 누구인가?”

호 대학사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서무를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세 번째 새는 당연히 저와 서 대인이지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서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호 대인은 폐하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고, 제가 어서방에서 한 말들은 모두 사심이 없는 공적인 말들이었는데. 작은 범 대인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니 우리를 원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대인께서 하신 말이 바로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호 대학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