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화 침묵하다
그 말에 놀란 관리들이 벙찐 표정으로 호 대학사를 바라봤다. 문하중서가 어떤 자리인가? 그곳은 조정의 중추였다. 임 재상이 자리에 물러난 뒤로 재상 자리가 비게 되면서 문하중서 대학사들이 나누어 재상의 업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더구나 진항이 경도 수비로 임명되고 형부 상서가 자리에서 물러난 뒤 호 대학사가 경도로 돌아오면서 문하중서의 내각을 담당한 역할은 더욱 공고해졌다. 문하중서에 들어간다는 것은 조정에서 가장 강력한 결정권을 가진 기구에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호 대학사는 범한을 이곳에 들이라 추천한 것이다.
이에 관리들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호 대학사를 바라보며 그가 어느 쪽으로 마음이 기운 건지 생각했다.
‘방금까지는 범한을 궁지에 모는 말을 하더니 이제는 범한에게 권력과 높은 자리를 내리라 말하는 건가?’
이부상서 안행서가 약간 시기어린 눈빛으로 호 대학사를 바라봤다.
호 대학사의 말에 황제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자리와 비교해 범한의 나이가 너무 젊지 않소.”
관리들은 폐하가 공개적으로 이 일을 논의해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지만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청년에게 문하중서 일을 맡긴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호 대학사가 담담히 말했다.
“과거 뛰어난 인재 중에는 열여섯 살에 재상이 된 일도 있었습니다. 하물며 문하중서는 폐하의 문서 기구이지 정말로 나랏일을 다루는 곳은 아닙니다. 작은 범 대인은 넘치는 재능을 타고나서 어느 자리에서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입니다. 이런 인재를 조당에 들여 폐하의 근심을 나누고 해결하도록 해야 마땅하다 생각되옵니다.”
황제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범한은 감찰원 제사이네. 경국 법률에 따르면 감찰원 관리는 조정 관직을 겸할 수도 없고 설사 감찰원에서 나온다고 하더라도 3사의 한직만 맡을 수 있네.”
호 대학사가 급히 대답했다.
“폐하의 뜻은 경국 법률보다도 지엄하니 나이가 어린 것이나 감찰원 직에 있는 것도 문제 되지 않습니다. 소신이 누구도 쉽게 받을 수 없는 상이라 한 말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황제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내저었다.
“이 일은 더는 의논한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짐은 윤허하지 않을 거네.”
천자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기에 호 대학사가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황제는 물러난 호 대학사가 서무와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서무가 사전에 소문을 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호 대학사가 오늘 황당한 제안을 한 이유도 알고 있었다.
‘인재라······ 안지가 인재인기는 하지.’
범한은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감찰원에 소속되어 있어 문관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경계했다. 그래서 그들은 범한이 감찰원에서 나와 다시 문신들의 따뜻한 품 안에 들어오기를 바랐다. 어쨌든 범한은 시선이라 불리며 천하 서생들의 모범인 만큼 서 대학사와 호 대학사가 그를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서 대학사와 호 대학사는 인재를 아끼는 사람들이었고, 형세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폐하의 앞으로의 계획을 꿰뚫어 본 그들은 범한 같은 보석이 감찰원의 어둠 속에 있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에 문관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범한의 능력을 나랏일에 써야 한다는 마음에서 그를 감찰원에서 꺼내고 싶어 했다.
오늘은 이른 감이 없지 않았지만, 호 대학사는 얻기 힘든 기회를 잡은 만큼 문관들의 진심을 드러냄으로써 사전에 여론이 조성될 기반을 만들기 시작했다.
신하들의 이런 의견에 대해 경국 황제는 비교적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며 어떤 논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일을 통해서 그는 갈수록 자신의 사생아인 아들이······ 황족에게 영광을 안겨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자부심으로 넘치는 마음을 평온한 표정으로 가렸지만, 눈빛에는 복잡한 심경이 드러났다. 그가 관리들 사이에서 줄곧 침묵하고 있는 호부 상서를 바라봤다. 자랑스러운 아들에게 아버지 소리를 듣고 공경을 받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라 범건이었다.
황제의 눈빛은 담담하면서 대수롭지 않아 보였지만 관리들의 정신을 들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서 강남에 있는 범한이 2천만 냥이 넘는 은전을 벌어들임으로써 자신의 타당성을 스스로 입증한 사실에 폐하가 기뻐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렇기에 관리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이런 상황에서 호부의 문제를 조사하자고 말해도 될지 고민했다. 강남 황실 금고에서 보낸 은전이라면 호부의 문제로 빈 국고를 채우고도 남을 텐데 괜히 호부를 건드려 범한의 체면을 구기게 만들어야 할까?
하지만 조정 관리들은 한편으로 호부를 조사할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호부가 나랏돈을 함부로 사용했다는 소문이 퍼진지도 오래되었고 국고가 텅 빈 것도 의심을 더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사해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면 경국 조정이 흔들릴 수 있었다. 다만 어떻게 조사를 하고 언제 조사할지에 대한 지혜로운 판단이 필요했다.
범한이 상당한 공을 세운 상황에서 관리들이 범건을 공격하는 게······ 타당하지 않은 것 같았고 황제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어떤 일이든 앞장서는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조정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 무렵 장신의 대신이 앞으로 나와 황제에게 인사한 뒤 호부 문제에 대해 설명했다. 마치 국고의 돈이 얼마나 줄었는지 직접 본 것처럼 그의 말은 조리가 있고 명확했다.
하지만 황제의 의사는 더 모호했다. 대신의 말을 들으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고 긍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는 게 도무지 조사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관리들은 감히 황제의 얼굴을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대신 호부 상서 범건을 힐끗힐끗 바라봤다. 하지만 범건의 근엄한 표정에는 어떠한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호부의 일은······ 어서방에서 의논한 뒤에 어떻게 할지 말해주도록 하겠네.”
황제는 이 말을 끝으로 조회를 해산시킨 뒤 용포를 펄럭이며 병풍 뒤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밖으로 나온 관리들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면서 폐하의 의도가 뭔지 추측하려 했다.
* * *
당일 오후 별로 넓지 않은 어서방 용상 아래 몇 개의 걸상이 놓였고 문하중서의 대학사 몇 명과 이부상서 안행서, 대리사경, 공부 상서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용상 옆에는 황태자, 1 황자, 2 황자가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서 있었다.
용상에 앉아 있던 황제가 담담한 얼굴로 조정 관리들이 올린 상주문을 펼쳤다. 사실 어젯밤부터 관리들이 나랏돈을 유용한 호부 관리를 찾아내 탄핵해야 한다는 상주문을 계속 올리고 있었다. 다만 오늘 조회에서 범한의 엄청난 실적 때문에 그 기세가 약간 꺾였고 황제도 조회에서 관리들이 이 일을 논의할 수 있게 허락하지 않았다.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서 대학사와 호 대학사가 힐끔대며 눈을 마주쳤다. 황제가 호부의 일을 어서방에서 논의하게 하는 건 범 상서의 체면을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늘 어서방에 범 상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폐하가 정말 범 상서를 보호할 생각이 있다면 그를 불러 자기변호를 할 기회를 주는 게 맞았는데도 말이다.
두 대학사는 폐하의 의중이 자신들의 예측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에 약간 긴장이 되었다. 소문에 들리는 호부의 문제는······ 아무래도 사실인 듯싶었고, 범 상서의 앞날도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범건이 병이 났다고 하더군.”
마치 이들의 생각을 읽은 듯 황제가 고개도 들지 않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담담한 황제의 목소리에는 살짝 분노가 묻어났다.
대신들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경국 살림을 돌보는 범 상서는 과연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매번 조정에서 누군가가 그를 탄핵하려 할 때마다 그는 힘을 모아 반격하려 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어도 입궁하지 않은 채 병이 났다는 핑계로 회피할 뿐이었다.
범 상서의 담력은······ 아무래도 과거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작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각자 생각을 말해보게.”
황제가 손에 들고 있던 상주문을 한쪽에 던져 놓으며 말했다.
“호부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경국 조정의 중추인 원로대신들은 먼저 나서서 범씨 집안의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나라의 이익에서 보면 호부를 조사할 필요가 있음에도 그들은 범건과 돈독한 사이였기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이들은 성격 급한 누군가가 먼저 나서겠거니 생각하며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이렇게 모두들 서로에게 순서를 미루다 보니 한참이 지나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에 어서방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원로대신들이 눈알만 대구루루 굴리며 눈치만 살피는 모습을 바라보는 황태자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아무래도 대신들은 범씨 집안의 기세가 두려워 몸을 사리느라 부황이 불쾌해하는 건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황태자가 부황의 안색을 살핀 뒤 마른기침을 하며 서 대학사를 바라봤다.
황태자를 본 서 대학사는 무언가 깨달은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폐하의 물음에 대신들이 대답하지 않는 것은 폐하를 무시하는 짓이 아닌가?’
잘못은 깨달은 그가 급히 입을 열었다.
“폐하······.”
애써 화를 억누르고 있던 황제가 그 말을 듣자마자 버럭 소리쳤다.
“호부를 조사하라는 상주문을 올린 건 자네들이 아닌가!”
그가 옆에 있던 상주문을 들어 흔들며 화를 냈다.
“그래놓고 짐 앞에서는 죽은 새처럼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인가!”
어서방에 있던 대신들이 놀라 바닥에 엎드리고는 용서를 빌었다.
황제가 버섯탕을 호로록 마셔 화를 식히고는 손을 저어 자리에 다시 앉으라는 표시를 했다.
황제가 화를 냈으니 더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서 대학사는 범씨 집안과 관계가 좋았지만, 범 상서에게 미움을 받는 일보다 공적인 일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누군가가 호부를 조사하는 일을 가지고 범씨 집안을 공격하는 걸 바라지 않았기에 먼저 나서서 말문을 열었다.
“호부는 조정의 재정을 관리하는 곳인 만큼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호부에 관한 소문들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도찰원 어사들이 무슨 수로 호부의 문제를 알아낸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혐의가 있는 이상 조사는 해야 합니다. 다만 조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서 대학사가 담담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범 상서는 오랜 기간 호부를 관리해왔습니다. 비록 몇 년 전까지는 시랑의 자리에 있었지만, 전임 호부 상서가 줄곧 병으로 누워 있어 호부의 일은 모두 그가 책임져 왔지요. 호부에서 다루는 일이 자질구레한 것들이라서 조정 관리들도 그 중요성을 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호부는 공을 세우기는 어렵고 문제에 휘말리기는 쉬운 곳이니 관리하기가 어려운 관아입니다. 범 상서 대인은 오랜 시간 호부를 관리해오면서 큰 공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호부라는 관아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조정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조사를 하더라도 폐하께서는 범 대인의 오랜 노고를 헤아리시어 관대한 태도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