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화
한편 숲에서 나온 젊은 궁수는 일반 백성들의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은 뒤 대열을 따라 진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굽이굽이 산길을 빠져나온 그는 경도로 가는 관도를 찾아 마주친 마차를 얻어 탄 뒤 상인과 함께 이야기하며 경도로 들어갔다.
경도성에 들어온 이후에는 채소죽을 두 그릇 먹은 뒤 길에서 바람개비를 하나 서서 남성 대로를 지나 구석진 작은 골목에 들어섰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찻집 문 앞을 지나치던 그가 안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들어갔다. 한동안 차를 마시고 해바라기 씨앗을 까먹으며 이야기를 듣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변소로 갔다.
변소 뒤 담장으로 나온 그는 미행하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어느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 저택에 누가 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안에 구조를 훤히 알고 있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가 책상 앞에서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책상 아래에 살며시 드러난 작은 발을 바라보며 그가 보고했다.
“마마, 제거했습니다.”
“고생했네.”
경국 장 공주마마 이운예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일반인들과는 다른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그녀의 미소는 사람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젊은 궁수는 삼석 대사를 죽일 때 보였던 냉정하고 무정한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장 공주의 눈을 직접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가 조심히 장 공주 옆에 섰다.
“삼석 대사는······ 참 안타깝게 되었어.”
장 공주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다가는 폐하께서 우리를 의심하실 거야. 지금처럼 몸을 사려야 하는 상황에서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려 한다면 제거하는 수밖에는 없지 않겠어?”
젊은 궁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일들은 윗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고 자신은 그저 명령에 따라 움직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장 공주가 그를 힐끗 보고는 웃으며 물었다.
“연 도독을 따라 북방으로 가지 못한 데 불만이 있는 건가?”
젊은 궁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가 계시는 북방에서는 매일 술 마시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는데, 경도에 있는 것보다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장 공주가 만족스러워하는 미소를 짓더니 두어 마디 말을 더 나눈 뒤 그를 서재에서 내보냈다.
장 공주가 이 이름 없는 저택을 찾아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이곳 서재에서 생각에 빠지는 걸 가장 좋아했는데 가끔은 너무 빠져서 멍하니 넋을 놓을 때도 있었다.
‘군산회라?’
그녀의 입가에 자조 섞인 미소가 보였다. 그녀가 어렸을 때 조직한 군산회의 목적은 무엇일까? 바로 경국을 위해서 필요하지만, 황제 오라버니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대신에 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면 눈엣가시인 관리를 죽이거나 세력을 지나치게 키운 집안의 가산을 몰수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었다.
비록 황제 오라버니는 군산회의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군산회는 묵묵히 북제와 전쟁이나 동이성과 경쟁에서 암암리에 영향을 끼치며 경국을 도와왔다.
그러던 군산회가 언제부터 변하기 시작한 것일까? 군산회의 취지가 자신에 의해서 상당히 변한 건 사실이었다.
장 공주의 얼굴에 서글픈 기색이 비쳤다. 그녀의 머릿속에 멀리 강남에 있는 범한과 황실 금고, 감찰원, 그리고 황제가 2년 동안 보인 의심과 의중이 떠올랐다······. 자신의 헌신을 황제 오라버니는 과연 무엇으로 보답하려 할까?
마음이 심란해진 그녀가 눈을 잠시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군주가 자신을 용납하지 않더라도 자신은 항상 스스로를 아껴야 하며, 이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원 선생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 * *
같은 시간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숲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주변에 은은하게 감도는 옅은 피비린내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싸움이 있었다는 흔적은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다. 감찰원만큼이나 군대의 현장 처리 수준도 상당히 뛰어났다.
연소을의 아들이 현장 처리를 맡긴 정한이란 사람은 모든 사람이 철수한 뒤 마지막으로 숲을 떠났다.
이상한 점은 숲을 떠난 그가 얼마 뒤, 소리 없이 다시 숲에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가 바닥을 더듬거리더니 자신이 고의로 흙 속에서 숨겨둔 부러진 화살을 찾아 조심이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손에 침을 뱉고는 힘들게 땅을 파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땅을 판 그는 깊은 땅속에서 이미 타서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체를 꺼내 올렸다. 삼석 대사의 시체였다. 그가 장화에 꽂혀 있던 비수를 뽑아 시체의 목뼈 마디에 넣고는 삼석 대사의 머리를 조심히 잘랐다. 그리고는 다시 시체를 땅에 묻고 낙엽을 뿌리고 풀로 덮어 흔적을 지운 뒤 마지막으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후 숲을 떠났다.
그는 경도로 가지 않았다. 그가 가려고 하는 곳은 경도가 아니었다.
* * *
진원 뒷산 뒷문에 있는 아치형으로 된 나무문 앞에 늙은 종이 서 있었다.
늙은 종이 정한에게서 작은 상자와 보따리를 건네받았다. 정한이 아무 소리 없이 인사를 한 뒤 진영으로 돌아가기 위해 돌아섰다.
어둡고 음침한 방안에서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진평평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검게 탄 머리를 바라보다 물었다.
“자네가 보기에 시신이 이렇게 탔는데도······ 폐하가 삼석 대사인지 아닌지 분간해 낼 수 있을 것 같은가?”
늙은 종은 소리 내어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진평평이 즐거워하니까 덩달아 즐거워진 모습이었다.
진평평이 작은 상자 안에 있는 부러진 화살을 꺼내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삼석 대사도 바보 같지만, 장 공주도 참 어리석지 않은가? 이런 일에 누구를 동원하든 적당하지 않겠지만 연소을 아들에게 시키다니. 이 일로 연소을은 더욱더 자유로워질 수 없게 되었고······ 발각되기도 쉬워지지 않았나.”
감찰원 원장 진평평은 젊은이들의 계략을 꾸미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비쩍 마른 손으로 무릎에 덮고 있는 양털 담요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몇몇 일들은 영원히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지······. 예를 들면 그 보잘것없는 군산회 같은 것 말이네.”
늙은 종이 살며시 물었다.
“입궁하시겠습니까?”
“그래.”
“제사 대인 쪽에서 약간의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늙은 종은 20년 동안 진평평의 옆에서 심복으로 지낸 집사였기에 진평평의 일을 대부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넌지시 일러준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진평평이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범한의 움직임이 너무 이른 감이 있네만······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게. 그 애가 정확한 정보를 파악해 일을 하게 내버려 두고, 그 애가 하길 원치 않은 일은 내가 하면 그만이니까.”
진평평은 많은 일을 범한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범한의 마음이 자신처럼 단단하고 강해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바퀴 달린 의자를 밀어 창가로 다가갔다. 멀리서 은은하게 그가 모은 미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장 공주 옆에 있는 원 모사를 떠올리고는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적들은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네. 다만······.”
중얼거리듯 말하던 그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탄식했다.
“모든 일을 안다는 건 그리 행복한 일은 아니야.”
늙은 종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어 줬다. 그는 내일 진 원장 대인이 시신의 머리와 부러진 화살을 들고 입궁함으로써 폐하의 앞에 처음으로 군산회의 존재가 드러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로써 폐하는 결심을 내리게 될 것이다.
진 원장은 폐하의 결심이 필요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인 진평평은 속으로 큰일을 일으키지 않고, 황궁 안에 있는 고귀한 분들을 죽이지 않고 자신이 어떻게 평온히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폐하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황궁과 조정의 모든 사람이 최근 며칠 동안 황제 폐하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폐하가 매년 황태후를 모시고 보던 연극 공연이 잠시 중단했고, 조회를 제외하고는 관리들은 폐하를 만날 기회를 좀처럼 얻을 수 없었다. 이에 관리들은 황궁 밖에서 요 내관, 후 내관, 그리고 다시 중용된 대 내관을 둘러싸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물었다.
다만 폐하가 측근 관리들을 황궁에 불러들이지 않는 걸 보면 나라에 골치 아픈 일이 터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폐하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조회에서 폐하가 각 주에서 올라온 상주문의 거의 다 반박해 돌려보내고는 대리사 정경을 엄하게 질책한 뒤 추밀원 늙은 진 대인도 한바탕 혼냈기 때문이다. 진씨 집안은 황제의 심복 중의 심복인 데다가 국방을 책임진 중신이었다. 그렇기에 평상시 문무백관들 앞에서 항상 진씨 집안의 체면을 살려주던 황제가 오늘 갑자기 모질게 대한 것이다······.
더욱 수상한 것은 폐하에게 질책을 당했는데도 경도 수비 진항과 진소 장군이 평온한 표정으로 문하중서를 출입한 것이었다. 살며시 미소까지 짓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폐하가 자신의 집안을 질책했다는 사실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관리들은 황제 폐하가 자신의 심복을 질책함으로써 경도 밖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라 짐작했다.
모호한 방법이라서 황제가 누구를 지적한 것인지 대부분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알아채기 마련이었다. 3일 뒤 멀리 정주에 있는 섭중이 상소를 올려 지금은 태평성세라서 정주에 많은 병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몇몇 병력을 폐지하겠다고 말했다.
섭씨 집안에서 자청해서 병력을 줄이겠다고 하자 황제는 담담히 허락하고는 조회나 추밀원에서 이 일에 대해 논쟁하는 것을 금했다. 새로 부임한 호 대학사와 서 대학사를 비롯한 조정 관리들은 이것이 작년 현공 사당에서 일어난 암살 사건에 대한 후속 조치라고만 생각할 뿐 다른 일 때문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섭씨 집안에서 자청해서 병력을 줄인 뒤 기분이 나아진 폐하는 다시 매일 황태후에게 문안을 올리기 시작했고, 장 공주가 황궁에 들어오는 것도 허락했다. 이로써 장 공주는 다시 광신궁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가족이란······ 멀리 있을수록 위험하고 함께 있을수록 안전한 법이었다.
황제는 진원 안에 있는 늙은 절름발이의 생각도 자신과 같을 거라 생각했다.
한편 상황을 지켜보던 절름발이 노인은 한숨을 쉬며 일이 자신이 계획했던 대로 완벽하게 진행되지 않은 이상 다른 일을 계획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씨앗은 이미 새싹을 틔워 사람의 마음속 검은 토양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독을 품은 넝쿨로 자라나 뚫고 나올 것이었다.
* * *
얼마 뒤 황궁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폐하의 얼굴에 드리운 근심이 가시지 않는 걸 보고는 기분이 정말로 좋아진 게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천하의 군주이자 황실의 주인인 황제는 모두가 우러러봐야 할 대상이자 모두의 목숨과 미래를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황실의 사람들은 잔뜩 긴장한 채 폐하가 감추고 있는 게 뭔지 알아내려 했다.
태극전과 어서방에서 시중을 드는 늙은 내관들은 황실의 수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는 각 궁에 물어 넌지시 알아봤지만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게다가 늙은 홍 내관의 경우 그가 가진 위엄 때문에 각 궁의 유모와 태감들도 감히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편 시무룩한 모습으로 광신궁으로 들어온 장 공주는 금방 이전의 밝고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했다. 그녀는 황태후가 적적하지 않도록 매일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한편 가끔은 동궁에 가서 황후와 황태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는 그녀도 황제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동궁에 있는 수령 태감의 역할이 중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