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화
청와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요 며칠 동안은 계속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관병들이 섬에 있던 해적들을 몰살하는 가운데에서도 홀로 살아남은 그는 섬 전체를 뒤엎은 시체와 갈매기 떼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그는 해적 두목이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마련해 둔 배를 찾아서 섬을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철저한 명씨 집안은 섬에 모든 배를 망가뜨렸고, 해적 두목이 숨겨 놓은 쾌속선들도 모두 물에 잠긴 상태였다.
물에 잠긴 돛을 보고 청와는 절망했다. 그는 섬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천주에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예측해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을 보내기는 했지만 도착하는 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물도 식량도 떨어진 섬에서 그는 어떻게 오랜 시간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감찰원 2처와 4처에서 밀정을 양성할 때 야외 생존 훈련과 정보 수집 훈련을 엄격하게 한 덕분이었다. 그 덕분에 청와는 혼자서도 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섬에는 물이 없었지만, 다행히 간간이 비가 내려 식수로 사용할 수 있었다.
섬에는 사냥할 야생 동물은 없었지만, 시체가 있었고······ 시체를 먹으려 몰려든 새들과 물고기와 조개가 있었기 때문에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천주에 있는 동료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섬에 사람을 보낸 덕분에 청와는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구출될 수 있었다.
마침내 육지에 도착하자 마음이 놓은 청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잠을 자면서도 그는 자신이 먹은 새들의 배속에 사람의 사체가 들어 있었다는 생각에······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천주에서부터 오랜 시간 잠에 빠져 있던 그는 소주에 도착한 뒤에야 깨어났다. 깨어난 그가 맨 처음 본 것은 경탄과 안타까움이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의 얼굴이었다. 웬만한 미녀들보다도 아름다운 얼굴을 한 청년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청와에게 옆에 있던 감찰원 관리가 설명해 줬다.
“제사 대인이시네.”
‘제사 대인이라고?’
화들짝 놀란 청와가 급히 일어나 인사를 하려 했다.
범한은 손을 들어 일어나려는 그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범한은 경국의 로빈슨 크루소인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치 싸움은 목숨을 건 투쟁이었기에 항상 하급 관리들의 희생이 필요했다.
범한은 일단 환약을 먹인 뒤 혈액 순환을 촉진 시키는 침을 놓았다. 이후 조심히 맥을 짚어보니 기력이 상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후유증 크게 남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청와의 기력이 충분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린 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청와는 과연 유용한 정보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범한은 그의 말을 통해 해적 두목이 명란석의 첩과 관련이 있다는 것과 같은 그동안 보고되지 못한 새로운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갑자기 고향에 내려갔다는 그 첩은 아마도 이미 강에 사는 물고기들의 밥이 되었을 것이네. 참······ 가엽군. 자월, 당장 그 첩의 고향 집에 사람을 보내 조사하도록 하게 명란석이 어떤 변명을 내놓을지 궁금하군.”
청와는 갖은 고생 속에서도 서신 한 통을 끝까지 품에 지니고 있었는데, 실질적인 증거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비록 명씨 집안에서는 부인하겠지만 이것을 통해 공격할 빌미를 만들 수 있었다.
“섬에 온 관병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범한이 청와의 두 눈을 보고 물었다. 청와는 섬에서 힘겹게 생존하고 육지에서 장거리를 급히 이동해 무척 허약해진 상태였다. 범한도 이 질문이 그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섬에 나타난 관병은 분명 명씨 집안의 조력을 받고 있을 것이었고, 그것은 장 공주 편이라는 의미였다. 범한은 군대에서 장 공주 편에 선 사람이 누구인지를 황제 폐하가 무척이나 알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 섬에 나타난 수군이 연소을이 이끄는 군대일 가능성도 없었다. 9품 강자이자 경국 무북신책군 대도독인 그의 군대는 감찰원의 엄격한 감시를 받고 있었고, 연소을은 수군을 동원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천주 수군은 과거 가장 강력한 수군이었습니다.”
등자월이 범한의 안색을 힐끗 살핀 뒤 대신 대답했다.
“하지만 섭가가 천주 수군에 미치는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서 조정에서 천주 수군을 폐지했고, 지금은 강남 수군을 지휘하는 관아는 사주(沙州)에 있습니다. 대인도 그곳 사주 관리를 만나 보셨겠지요. 만일 해적들을 소탕하는 데 사주 수군이 동원됐다면······ 이동 거리가 너무 멀고 큰 강을 건너야 하니 흔적이 많이 노출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조용히 해군들을 처리한 걸 보면 사주 수군은 아닐 겁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섭가라는 말은 듣자 복잡한 감정이 솟구친 그가 고개를 돌려 다시 청와를 바라봤다.
침대에 누워 있던 청와의 입가에 하얀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날 밤에 섬을 들이닥친 관병들의 모습이 떠올라 괴로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의 중요성을 알기에 감찰원이 해적과 손을 잡은 세력이 누구인지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주고 싶었다.
한동안 눈을 질끈 감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그날을 장면을 떠올려 보던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관선은 새벽이 되기도 전에 섬에 도착했습니다. 섬 주위에 암초가 많은 데도 어둠 속에서 배를 대려 했던 걸 보면 분명 배를 전문적으로 다룰 줄 아는 수군이 온 것이지 육지 관병들이 배를 빌려 온 건 아닙니다······. 제가 관병 중 한 명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얼굴 윤곽으로 보아 분명 북쪽 사람이었습니다.”
범한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동이성의 수군일 가능성도 있다는 겐가?”
청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대화를 들었는데 말투가 동이성은 아니었습니다.”
범한과 등자월이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경국에는 3대 수군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북쪽 산동로 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교주 수군은 실력이 상당했다. 만일 교주 수군이 장 공주 쪽이라면 군대에서 장 공주가 장악하고 있는 세력은 범한 쪽에서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막강한 것이었다.
범한은 황제가 자신이 병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면서 군대 방면에서는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며 경국 군대 대부분을 황제가 장악하고 있다고 믿었다. 범한이 그동안 자신의 계획을 과감히 추진해 나간 것도 바로 이런 믿은 덕분이었다. 그런데 만일 장 공주와 황자들의 세력이 예상했던 것보다 강하다면······ 그의 계획에서 차질이 생각 수밖에 없었다. 순간 위기감을 느낀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섭씨 가문은 이미 조금씩 2 황자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무북신책군 연소을은 이미 장 공주 편이지. 이런 상황에 교주 수군까지 더해진다면!’
“교주 수군을 이끄는 사람은 누구인가?”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등자월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군 제독은 정1품 무장이니 연소을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의향을 드러낸 적도 없고 진씨 집안 출신이지만 섭중 대인과 관계도 좋은 편입니다.”
범한이 가볍게 주먹을 쥐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피곤한 얼굴을 한 청와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몸이 회복되면 내 일을 돕도록 하게.”
그는 해적으로 잠복해 있다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감찰원 관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유능한 인재를 자신의 심복으로 만들고 싶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이런 행운을 얻게 될 거라 생각하지 못한 청와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범한이 계년조를 데리고 방을 나가고 감찰원 4처 천주 순찰사 관리들이 웃으며 축하한다고 말한 뒤에야 정신이 든 그는 자신이 마침내······ 악몽에서 깨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생각보다 안 좋은 소식을 접한 범한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경도에 소식을 보내 진원 안에서 미녀를 품에 껴안고 놀고 있을 절름발이 노인의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대인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오늘 운이 나쁘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인상을 구기고 있는 범한에게 등자월이 공손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무슨 소식인가?”
범한이 심드렁하게 묻자 등자월이 기쁨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군산회를 관리하던 주 집사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어디 있는가?”
“대인의 추측이 맞았습니다. 지금 명원에 있다고 합니다.”
범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탄식했다.
“마침내 할 일이 생겼군.”
* * *
4월 봄기운이 절정에 이르러 따뜻해진 강남에서는 사람들이 겹옷만 입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주에서 천 리 떨어진 경도성 밖 창산은 여전히 하얀 눈이 산봉우리를 덮고 있었다.
삿갓을 쓴 거구의 사내는 창산 봉우리를 덮은 흰 눈을 바라보다가 남은 차를 한 모금에 전부 들이킨 뒤 소면을 먹기 시작했다. 막무가내로 입에 쓸어 넣는 것이 맛있어서 먹는다기보다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는 모습이었다. 그가 있는 곳은 경도에서 30리 떨어진 있는 석비촌이었다.
그리고 맛없게 소면을 먹고 있는 거구의 사내는 강남에서 경도까지 갖은 고생을 하며 온 경묘 2제사 삼석 대사였다. 삼석 대사가 이곳에 온 것은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천자를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강남에 있는 범한이 고의인 듯 아닌 듯 그를 놓아준 뒤 이후 감찰원은 치밀한 조사를 시작했고 서북로 군대도 경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삼석 대사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감찰원과 흑기들의 봉쇄를 피해 경도 근처에까지 왔다.
군산회는 응집력이 강하지 못한 조직이었지만 신비로움과 중요한 임무를 가지게 된 뒤 그 중요성이 두드러졌다. 이 신비한 조직에서 마침내 천하에 세력을 가진 중요한 인물들을 집합시키기 시작했다.
삼석 대사는 비록 경묘 2제사로 높은 신분임에도 군산회에서는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강남에서 군산회의 계획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범한의 계획을 방해하려 했던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 삼석 대사는 자신만의 웅장한 포부를 품고 군산회에서 벗어나 이곳까지 왔다.
그는 경도로 가서 죽일 수 없는 그 사람을 죽일 계획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가 소면을 한 움큼 입에 밀어 넣었다. 그는 대사장이 항상 식사할 때마다 자신에게 일러주었듯이 입안에 있는 면을 오래오래 씹은 뒤 삼켰다.
순간 마음속에서 슬픔이 일렁이면서 그의 무미건조한 눈동자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눈물이 두어 방울 면에 떨어졌다.
그는 경도로 가서 황제에게 이유가 무엇이었냐고 묻고 싶었다.
면을 다 먹은 그가 얼굴을 가리도록 삿갓을 고쳐 쓰고는 탁자 옆에 놓인 한 사람의 키보다 높은 나무 지팡이를 쥐고 국수 가게를 나섰다. 석비촌 산자락 아래 작은 길을 따라 경도 방향으로 걸어갔다.
뒤에 순백의 산을 두고 고행자는 어두운 황성을 향해서 묵묵히 걸어갔다.
숲이 깊어질수록 길도 좁아졌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장작을 패러 오는 부지런한 나무꾼도 보이지 않았고, 황량한 야외라 지나는 행인도 없었다. 조용한 산길은 심지어 새와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아 기괴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삼석 대사는 상당히 높은 수행을 거친 고행자이긴 했지만, 정식으로 암살을 연마한 무인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경계하지는 않았다.
그는 조정과 군산회가 자신이 강남을 벗어나 경도 근처까지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북제 성녀 해당타타 낭자뿐이고, 그녀는 경국에서 자신의 행적을 노출하면서까지 이 일을 발설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경로를 미리 예측해 매복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