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북쪽 사람들에게 진 원장은 원수나 마찬가지인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범한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자신이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것뿐이지요. 경국과 북제는 오랜 시간 적으로 지냈으니 지금 낭자가 저의 목을 베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겁니다. 다만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진 원장이 천하를 아울러서 제가 생각을 읽지 못하는 두 명 중 한 명이라는 걸 말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두 명이나 있다는 겁니까?”
해당이 호기심에 고개를 돌렸다.
“그렇습니다.”
범한이 진지한 표정으로 해당을 바라봤다.
“제가 모시는 황제나 낭자가 모시는 황제나 그들이 어떤 생각과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저는 예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분 모두 엉덩이를 용상을 걸치고 있는 이상 반드시 그것과 관련된 일을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평평 대인은 다릅니다. 소위 세속에 대한 미련이 없으면 마음이 모든 걸 아우를 수 있고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 말이 진실하다고 하지요······. 진평평 대인이 꼭 그렇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사실 진평평 대인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황위 싸움에 개입할 필요가 없지요. 누가 황제가 되든 대인과 잘 지내려 할 테니까요······. 하지만 대인의 성격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자로 있는 건 어울리지 않습니다.”
진평평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략가이자 음모가였다. 이런 사람은 평상시에는 조용히 있다가도 한 번 움직이면 천하를 뒤엎을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해당이 범한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만약 대인의 어머니와 진 원장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면 이 일에 대한 전혀 다른 생각을 했을 겁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진평평 대인이 대인을 아끼는 이유가 경국 황제 때문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렇지요.”
“하지만 저는 대인에게 그 일에 대해 들었을 때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해당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인이 3 황자를 옆에 두고 가르치며 기반을 다져주려 하듯이 진평평 대인도······ 대인의 기반을 다져주려 하는 게 아닐까요?”
“어려운 문제지요.”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황궁 사람들이 제 정체를 아는 이상 저는 황궁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게다가 과거에 있었던 일의 배후에 누가 숨어져 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저도 이 일을 언젠가는 밝힐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지금 급하게 서두를 생각은 없습니다. 낭자가 말한 진 원장의 생각은······.”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사가 아닌 황제가 되는 건 무척 큰일입니다. 저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진 원장 혼자서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해당타타가 고개를 푹 숙이고 고민하다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복잡한 일이군요. 잠깐 머리를 식혀야겠어요.”
“강남에는 작은 물고기밖에 없고 경도에 가야 큰 물고기가 있지요.”
범한이 담담한 눈빛으로 호수에 드리운 두 낚싯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낚시질하면······ 항상 낚싯바늘을 문 물고기에게 끌려 물속 깊이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해당이 피식 웃었다.
“대인은 이미 강가에서 발을 적셨으니 물 안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도 맞군요. 다만 무언가 불확실한 기분이 듭니다. 저는 일이 제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무척 싫습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라 할지라도······ 모든 일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해당타타가 멀리 풍경을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큰 흐름을 장악하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호숫가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해당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방금 전에 대인이 생각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두 명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 명은 진평평 대인이고, 다른 한 명은 누구입니까?”
범한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해당타타는 다른 한 명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항상 사람의 생각을 간파하는 능력이 대단하다고 자부하고, 심지어는 경국 황제의 생각까지도 읽어낼 수 있다고 자랑하는 범한이 생각을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정말이지 궁금했다.
“저의 아버지입니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아버지도 진평평 대인과 같이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다만 진평평 대인이 물 위와 아래를 오가는 물고기라면 아버지는 항상 물밑에서만 움직이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아들인 저도 그분의 진정한 생각이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요.
범한은 진평평과 범건 두 사람을 항상 아버지처럼 대하며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과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두 사람은 경도 피의 달에 황후 가족들을 몰살해 복수하였고 이후 관심과 사랑을 쏟으며 그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다. 범한은 이 모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기묘하게도 가장 가깝게 생각하는 두 사람의 생각을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대인의 근심은 강남이 아니라 경도에 있었군요.”
해당타타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폐하가 형제들을 위해 놓아둔 숫돌에 불과합니다.”
범한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남의 일에서 장 공주와 황태자, 2 황자가······ 아버지와 진평평 대인이 저를 위해 놓아둔 숫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분들이 저에게 가진 기대가 너무 깊어서 기쁠 따름입니다.”
기쁘다고 말할 때 범한의 목소리에서 상당한 분노가 느껴졌다.
고요한 수면 위에 드리운 가는 낚싯줄에서는 조금의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해당타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인제 보니 대인은 정말 낚시로 자신의 마음을 단련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범한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저의 굳건한 의지와 평화로운 마음은 바깥 것들에 좀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의 당당함은 자만한 허풍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장점을 명확하게 분석한 데서 오는 자신감이었다.
“도대체 몇 살입니까?”
해당타타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젊은 사람이 큰 권력을 손에 쥐고 복잡한 일을 처리하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범한이 기다렸다는 듯이 재빨리 물었다.
“그러는 낭자는 몇 살입니까?”
해당이 입꼬리를 올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이 너무나도 밝게 반짝여서 호수의 푸른 물빛도 약해지는 것 같았다.
범한이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내다가 먼저 말했다.
“정월 18일에 만 열여덟 살이 되었습니다.”
해당이 고개를 저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대인의 평소 모습을 보면 여든 살이라 말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
노인들은 봄날의 따스한 바람과 천둥 번개를 동반한 여름날의 폭우, 쓸쓸한 가을날의 서리와 겨울날의 매서운 추위를 모두 겪으며 세상만사를 경험했기에 냉정한 눈으로 세상의 모든 걸 꿰뚫어 볼 수 있다.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숨이 막힐 정도로 복잡한 상황에서도 누구보다도 침착하게 가장 매서운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음모가에게 이보다 더 필요한 조건은 바로 적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자신의 욕망을 줄이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부터 지금까지 음모에 뛰어나다고 이름을 떨친 사람들은 세월의 풍파를 모두 겪은 노인이 아니라 거세를 당한 내관이었다.
이에 반해 젊은 사람들은 경험도 부족하고 넘치는 혈기도 가지고 있어 종종 잘못된 선택을 하곤 했다. 예를 들어 2 황자나, 황태자 심지어 지략에 뛰어난 장 공주까지고 모두 넘치는 혈기에 의해 잘못된 선택을 하곤 했다.
하지만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한 범한은 해당이 80세 노인 같다고 말할 정도로 냉철함과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의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특히 하서비를 이용해 명씨 집안과 재산 소유권 소송을 진행할 때 감찰원은 줄곧 조용한 상태였다. 감찰원은 재산 소유권 소송이 조용해질 무렵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4처 강남로 순찰사 관아에서 차를 마시자고 강남로의 관리들을 초대했다.
초대를 받고 온 관리들은 은은하게 감미로운 향기를 내뿜는 차를 바라보며 품질이 좋은 용정차라는 걸 알았지만 마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록 설청 총독 대인의 체면 덕분에 강남로 관리들 중에서 체포된 사람은 없었지만 차를 앞에 두고 들려오는 말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온 관리들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뒤 한참을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그들은 결국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명씨 집안을 더는 보호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감찰원은 이어서 체포하거나 재산을 압류하는 노골적인 방법이 아닌 간접적인 방법으로 명씨 집안 사업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바로 동이성 밀정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명씨 집안이 소유한 상점들을 샅샅이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명씨 집안은 육로와 해상 화물 운송에 상당한 불편을 겪어야 했다.
이렇게 대대적인 조사에도 감찰원은 밀수품을 적발하는 등의 사소한 죄목만 잡았을 뿐 명씨 집안의 목덜미를 움켜잡을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명씨 집안 운송 속도를 늦추는 데는 성공 했다.
운송업을 주로 하는 명씨 집안과 같은 상인들이 수입을 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흐르는 큰 강처럼 계속 화물을 운송해 현금으로 바꾸어야 했다. 그리고 감찰원은 지금 강에 흙과 자갈을 부어 물의 흐름을 느리게 만들고 결국에는 정체되도록 만들고 있었다.
이 일은 감찰원이 가장 적은 인력만 동원해도 가능했고, 여론에 휩싸이지도 않으면서 좋은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천하를 경악하게 한 공개 입찰 결과로 인해서 명씨 집안은 처음으로 재정 곤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화물 운송까지 어려움을 겪자 명씨 집안은 태평전장에서 돈을 급히 융통해야 했고, 근심에 빠진 명청달은 암암리에 초상전장 환어음에 사인하기 시작했다.
* * *
강남 일대에서 오랜 시간 성장해온 명씨 집안은 몇 대에 걸쳐 이뤄진 신중한 경영과 대담한 개척을 통해 천하에서 손꼽히는 대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더구나 장 공주와의 관계를 통해서 황실 금고 황상이 된 이들은 물밀 듯이 들어오는 은전을 사용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더 넓고 깊게 확장했다. 이렇게 소주와 항주 일대에서 수없이 많은 사업을 거느리게 된 명씨 집안은 대량의 선박, 마차, 점포를 직접 운영할 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을 통해서 강남 백성들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업을 간접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이처럼 기름, 곡식, 기생집 등 모든 분야를 명씨 집안에서 다 장악하고 있다 보니 강남에서 사업을 하고 싶으면 반드시 명씨 집안을 통해야 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가문이 거대하고 가진 게 많을수록 내부 파벌도 복잡한 법인만큼 명씨 집안은 처음부터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단속을 철저히 했다. 본가의 여섯 어르신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에게는 사소한 장사만 할 수 있게 했다.
가족 내부 분열이 초래하는 위험성이 얼마나 큰지 잘 아는 명씨 집안 큰 노마님은 집안의 권력을 장악한 뒤 가장 먼저 권력의 서열을 정리했다. 집안의 장남인 명청달을 제외한 다른 자식들에게는 지분만 주고 명씨 집안의 거대한 산업에 참여할 권한을 일절 주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