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화
범한은 침착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자신의 허리 위로 뻗었다. ‘슥’소리를 내며 연검을 뽑은 그가 오른손을 살짝 떨며 왼쪽 발을 뒤로 빼더니 오른쪽 다리 발꿈치를 조금 돌렸다. 몸의 중심이 왼쪽으로 살짝 기운 가운데 그의 손에 있던 검이 팔을 따라 활시위를 벗어난 활처럼 빠르게 내질렀다.
‘뿌직’하는 소리와 함께 범한을 공격한 사람의 목에서 소리 없이 분출된 피가 땅에 후두득 떨어졌다.
돌계단 위 끝방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범한을 발견하고는 놀라 큰소리를 지르며 허둥지둥 뛰쳐나왔다.
범한이 가만히 서서 검을 자신의 가슴 앞에 대었다. 마치 모든 걸 체면하고 자살하려는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재빨리 세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며 칼날을 가로로 세워 공격할 빈틈을 주지 않더니 순식간에 무지막지한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공격을 막은 범한이 모든 정력을 실어 휘두르는 검의 위력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이처럼 강력한 공격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보이는 건 붉은 피와 땅에 떨어진 사람의 머리뿐이었다.
담담한 표정의 범한이 천천히 오른쪽으로 두 발걸음 이동했다. 정기가 설산에서 일어나더니 어깻죽지에서 뿜어져 나와 용수철처럼 그의 오른쪽 팔에 튕겼다. 개구쟁이들이 소주성 밖 버드나무 가지를 당겼다 놓으면 나뭇가지가 튕기듯 올라가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름답게 튕긴 정기가 역사책을 저술하는 대가가 마지막 마침표를 찍듯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한 사람의 목에 찍힌 것이다. 그렇게 또 한 사람이 죽었다.
범한은 검을 세 번 휘둘러 세 명의 사람을 죽였다. 이건······ 도대체 무슨 검법인 걸까?
만약 고달이 저택 안에서 이 광경을 보았다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고, 만일 해당이 봤다면 그동안 범한이 수련하는 모습을 자신에게 숨긴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강남에서 그림자를 피해 도망치고 있는 운지란이 이 모습을 봤다면 멍한 표정으로 스승이 새로 제자를 들인 건가 하는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사고검.
사고검의 사고검.
목적을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은 사고검.
자신에게 달려든 사람을 모두 죽인 범한이 흡족한 눈빛으로 가볍게 떨리는 검 끝을 바라봤다. 오늘 실전에서 사용해보니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림자는 자신의 공격에 죽을 뻔한 범한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주었다.
이 세계에서 사고검의 진정한 정수를 배울 행운을 누린 사람은 범한 밖에 없을 것이다.
사고검의 핵심은 검의 기세나 검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보법에 있었다. 보법을 제대로 익혀야 만이 한 사람의 힘을 검에 온전히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보법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을 위해 앞뒤 가리지 않는 잔인함이었다. 한 번 칼을 휘두를 때마다 온 힘을 쏟으며 귀신도 막을 수 없고 하늘도 저지할 수 없는 정도로 강한 살기를 뿜어야만 했다.
이런 생각을 하던 범한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공 사당에서 흰옷의 검객으로 변장한 그림자가 휘두른 일격은 태양의 빛마저 가려버릴 정도로 강했다. 만약 그를 상대한 게 범한이 아니었다면 그림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모든 살기를 검에 실었을 것이다.
* * *
죽은 사람도 다시 죽게 할 차가운 검 빛이 뜰 안에 번쩍이자 두 사람이 뒷담 쪽으로 도망쳤다. 범한은 그들을 쫓지 않고 검을 등에 찬 채 조용한 침실로 들어갔다.
뒷담에서 ‘촤악!’소리가 두 번 들렸다. 장검을 거둬들인 고달이 몸이 두 동강이 난 시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침실 문을 밀고 들어간 범한은 방금 침대에서 일어나 초를 밝힐 수는 있었지만 옷을 입을 겨를은 없었던 여자를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원 대가, 오랜만이네.”
형부에서 지명수배를 내린 뒤로 소주에서 숨어 있던 원몽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문 앞에서 살기를 드러내며 서 있는 청년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울부짖었다.
“작은 범 대인······ 왜 저를 놓아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주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대답해 주겠네.”
범한이 천천히 그녀 앞으로 걸어가며 담담히 설명했다.
“낭자의 손에는 무고한 여자들의 피가 너무 많이 묻어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께서 그런 낭자를 살려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으니 자식으로서 응당 효도해야겠지요.”
흐트러진 머리카락들이 힘없이 이마에 내려와 있는 원몽의 모습은 당당하고 아름답던 이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초췌해 보였다. 그녀가 힘없이 웃으며 범한을 바라봤다.
“경도의 일은 명령을 받아서 했던 일입니다······. 형부에서 저를 지명수배했으니······ 대인의 아우와 지금 대인이 가르치고 있는 3 황자 저하가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그러니 죽이려면 그냥 죽이십시오. 하지만 그딴 가당치도 않은 말로 저를 죽이는 걸 정당화하지 마십시오.”
범한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낭자가 나쁜 짓을 한 이상 이런 결과는 정해져 있던 거네. 만약 내가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면 낭자에게 조금의 기회를 줬을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낭자도 알다시피 나는······ 나쁜 놈인지라 낭자에게 기회를 줄 마음이 없네.”
신경질적으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던 원몽이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범한을 째려보며 소리쳤다.
“하하! 나를 잡아서 저하를 공격할 수단으로 쓰려고? 꿈도 꾸지 마라!”
이 말을 내뱉은 그녀가 자살하기 위해 치아 안에 숨겨두었던 독약을 삼켰고, 순간 온몸이 경직되더니 그대로 붉은 이불 위에 쓰러졌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나는 그냥 죽일 생각이었는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검 끝을 그녀의 목구멍에 찔러 넣었다.
* * *
깊은 밤, 어디선가 불길한 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구름 사이로 비춘 달빛이 검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산으로 가세.”
고달과 함께 마차에 오른 범한이 등자월에게 지시했다.
“조용한 곳으로 가야겠어.”
등자월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볍게 말고삐를 휘둘렀다. 풀을 뜯던 말이 천천히 마차를 끌고 저택 뒤쪽에 있는 산언덕으로 향했다. 주변이 어두운 데다가 나무에 가려져 있어 산 위에서 아래쪽을 관찰한다면 아무도 그들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었다.
마차 안에서 범한이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피부처럼 보일 정도로 얇은 장갑이었다. 그가 장갑으로 피가 묻어 있는 연검을 닦은 뒤 검에서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 허리에 찼다. 마지막으로 가루를 꺼내 장갑에 뿌린 뒤 불을 붙였다.
펑 소리와 함께 장갑에 불이 붙자 고달이 의자 아래 있는 철통을 떠내 앞에 놓아줬다. 범한이 타고 있는 장갑을 철통 안에 넣고는 불길이 작아지다가 이내 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얼마 뒤 마차는 산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래 저택은 여전히 조용했다. 안에 사람들은 모두 죽지 않으면 기절해 있었으니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게 당연했고, 밖에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새어나가지 않았으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범한은 뒷산에 올라 뭘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적당한 위치에 마차를 세운 등자월은 말을 목을 가볍게 쓰다듬은 뒤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범한이 마차 창문 발을 살짝 걷고는 오랫동안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상대측에서 오늘 일어난 일을 알아채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까 걱정되는군.”
등자월이 하늘을 올려다본 뒤 말했다.
“아직 한밤중이니 더 기다려야 할 겁니다. 이렇게 일찍 찾아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 말에 범한은 자신이 조급해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고달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고달이 모포를 그에게 덮어줬다. 차갑던 몸이 따뜻해지면서 졸음이 몰려온 범한은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나 잔 것일까 범한이 눈을 뜨고 ‘끙’하고 소리를 냈다.
등자월이 마차 창문 발을 열고 아래를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왔습니다.”
범한이 모포를 걷고 창문가로 다가가서 아래를 바라봤다. 원몽의 은신처였던 그 저택 밖에서 사람 하나가 익숙한 듯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소리에 리듬이 있는 게 암호가 분명했고, 그렇다면 저 사람은 강남 세력과 원몽 사이의 연락책이 틀림없었다.
홑옷을 입은 그 사람은 평범한 외모였다.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가 잔뜩 긴장하더니 재빨리 마차를 몰고 사라졌다.
산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범한은 그 사람이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걸 알고 있었기에 조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과연 그 사람은 멀리 가지 않았다. 잠시 뒤 서북쪽 담 위에서 불쑥 머리를 내밀은 그가 안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살펴보려 했다.
담 위에서 주변을 살피던 그가 과감하게 담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산 위에 있는 범한을 비롯한 세 명은 그가 안에서 뭘 보는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애써 목소리를 낮추려 하는 비명 소리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마침내 시체가 뒹굴고 피가 낭자한 참혹한 광경을 확인한 것이다.
저택의 문이 열리더니 어둠 속에서 머리를 숙이고 죽어라 내달리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헐레벌떡 뛰어가는 모습이 분명 자신의 주인에게 사실을 알리려는 게 틀림없었다.
마차 안에서 나른한 허리를 펴고는 하품을 하던 범한이 동쪽에서 이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날이 곧 밝을 테니 그쪽에서 이 일을 숨기려면 서둘러야 할 거네.”
등자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 관아에 사람을 보내 감시하고 있으니 내일이면 이 일과 연관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범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네들이 보기에 오늘 이 일을 처리할 올 사람이······ 누구일 것 같나?”
등자월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분명······ 소주부에서 보낸 사람일 겁니다. 대인, 여긴 제가 감시하고 있을 테니 일단 저택으로 들어가 쉬시지요.”
범한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원몽의 죽음은 그녀를 몰래 보호해 주던 강남 관리들에게는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한 소식일 것이다. 밤중에 죽은 원몽을 새벽에 발견했으니 짧은 시간 안에 소식을 듣고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관리는······ 분명 이 일에서 신분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관리일 것이다.
다만 이 일로 인해서 강남로 안에 있는 장 공주 심복들이 누구인지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정보전에는 누구보다도 강한 범한이었지만 이곳에 심어진 장 공주 심복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강남에 파견된 감찰원 관리 수가 너무 부족해 모든 관아에 밀정을 심어 감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원몽의 사망 소식에 반응하는 사람을 감시해 심복들을 찾아낼 생각이었다.
* * *
소주부 지주는 최근 며칠 동안 매일 공당에서 송세인과 진백상의 변론을 듣느라 정신이 없는 나머지 정무도 등한시하고 있었다. 어찌나 정신적 소모가 컸는지 너무 피곤해서 가장 아끼는 첩과 관계를 갖는 일도 줄일 정도였다. 그래서 오늘 새벽 자신을 깨우는 소리가 들리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이후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을 들었을 때는 냉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끼얹은 것처럼 분노가 사라지면서 걱정이 몰려들었다.
‘원몽이 죽었다고?’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그는 2 황자와 정왕 세자, 그리고······ 장 공주에게 어떻게 알려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가 허둥지둥 옷을 입으면서 사람을 시켜 책사를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책사가 도착하자 이미 옷을 다 입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그가 불같이 화를 냈다.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것인가? 원몽이 죽었어!”
책사는 관리를 보좌하며 옆에서 조언해주는 사람이었기에 서로 숨기는 일이 없었다. 이미 원몽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책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죽을 수밖에 없으니 죽은 겁니다. 흠차 대인이 소주에 와서 도망칠 수 없게 된 원 대가에게 남은 건 죽음뿐이었습니다.”
소주부 지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자네 말은 감찰원이 움직였을 거라는 건가?”
“감찰원이 아니라면 강남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소리 없이 원몽을 죽일 수 있는 세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책사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분석한 상황을 설명했다.
“대인께서는 지금은 섣불리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원몽이 죽은 이상 감찰원에서도 저희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는 못할 겁니다······. 지금 오히려 성급하게 움직인다면 감찰원에서 대인이 이 일과 관련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책사다운 신중하고 치밀한 분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