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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36화 (436/1,108)

436화

명성만 봐도 범한이 명씨 가문에게 한참 뒤지고 있었다. 아무리 강남 백성들이 하서비가 명씨 가문의 일곱째 아들이란 걸 믿게 되었다고는 해도, 그래도 그들은 하서비가 올해 갑자기 나타날 수 있었던 건 범한으로 대표되는 경도의 관원이······ 강남 현지 양민을 압박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한은 순간 너무 웃겼다. 병상에 누워 있는 척하는 명씨 가문의 주인 명청달은 과연 자신의 행동 방식을 세세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응 수단과 속도 역시 그 누구보다 정확하고 빨랐다. 과연, 범한에게 명청달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큰 권세를 쥐고 있었지만, 그게 강남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명청달과의 의견 충돌을 마음 편히 유희 정도로만 여길 수 있고, 명청달에게 크게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아 오히려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 등자월이 가져온 기록을 읽고 난 후에는 더더욱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었다.

강남에는 인재가 많았지만, 경도에서 온 송세인도 만만치 않았다. 소주부에서 진행되는 소송은 갈수록 경국 법률의 범주를 벗어나 진평평이 원하는 방향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양측은 경전을 인용했고, 말할 때마다 이전 왕조인 북위를 언급했으며, 두 손까지 공손히 모으고 장묵한 대가에 대해서도 말을 했다. 이게 어디 봐서 소송 장면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사람들 마음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적장자 상속제 개념에 대해 말하기 위해 양측은무슨 황궁 대전에서의 경연(經筵)과도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던 것이었다.

범한이 웃으며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긴장감 넘치지만 한편으로는 황당하게 진행되고 있는 심리 장면이 눈에 보이듯 훤히 펼쳐지고 있었다.

* * *

소주부 재판장에서는 이미 넷째 날이 되었는데도 변론은 계속되고 있었다. 양측을 대표하는 장수들은 계속해서 머리를 굴려대느라 조금 피로한 상태였다. 이에 소송 중간에 쉬는 시간은 첫째 날보다 훨씬 더 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휴식 시간을 청했다.

소주부 지주도 하서비 측이 시간 끌기를 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일찌감치 흠차 대인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언질을 받아서였다. 그래서 얼른 판결을 마치고 싶어도 얼렁뚱땅 마쳐버릴 수 없었으니······ 제멋대로 마칠 수 없다면 저들이 재판장에서 마음껏 변론하도록 놔두는 수밖에.

하지만······ 소송대리인이 하나는 송세인, 다른 하나는 진백상인 게 문제였다. 모두들 말 잘하기로 유명한 이들 아닌가. 그런 그들에게 마음껏 변론하도록 놔두었으니, 어쩌면 1년 동안 저러고 있을 수도.

소주부 지주도 계속 보다보니 별 감흥이 없어졌다. 이에 양측에서 휴식을 청해올 때면 웃으며 그들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아속을 시켜 걸상을 가져다가 양측 모두 앉아서 쉴 수 있게 편의를 봐주고, 목을 축이게 차(茶) 등을 가져다주는 일도 빈번해졌다.

명란석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걸상에 앉아 있었다. 요 며칠 소송을 질질 끌다 보니 명씨 가문 도령도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집안 사업은 도무지 도울 수가 없었다. 숙부가 몇몇 있었지만 모두들 놀고먹는 쓸모없는 이들이었다. 한데 황실 금고 공개입찰이 열린 후 민북으로 물건을 보내는 일은 모두 가문의 중요 인물이 맡아서 해야 했다. 그래서 줄곧 와병 중이던 아버지 명청달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 일들을 도맡아 하는 중이었다.

명씨 가문도 흠차 대인이 소송을 건 이유가 자기 가문의 전열을 흐트러뜨리고, 가문의 황실 금고 사업과 관련해 신경을 쓸 겨를이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명씨 가문도 더 나은 대응 방법이 없었던지라 같이 시간을 질질 끌 수밖에 없었다. 현 국면을 보니, 소송은 한 일 년은 갈 것 같았다. 하지만 지지만 않으면 그만 아니던가.

명씨 가문에게 발언할 기회가 돌아왔다. 강남의 유명한 소송 거간꾼 진백상의 얼굴이 창백한 것으로 보아 요 며칠 정신 소모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는 옆에 있는 제자의 손에서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수건을 받아들고 얼굴을 닦았다. 그렇게 정신을 가다듬은 그가 재판장 가운데로 나가 정색을 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옛 성인들이 말한 오륜(五倫)은 바로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입니다. 대인, 하 선생이 명씨 가문의 일곱째로 밝혀졌다면, 부자 사이의 친근함은 명씨 가문의 장자분과 다를 바가 없으니······.”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저쪽에 있던 송세인이 말허리를 잘랐다.

“하 선생이 아닌, 명 선생입니다. 더 이상 말실수하지 마시지요. 그렇지 않다면 이번 안건이 끝난 후 일곱째 명청성 어르신께서 당신을 고발할 것입니다.”

송세인은 두 눈이 움푹 꺼져 있는 게 얼굴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가 이번에 강남에 홀로 온 건 자료 보는 걸 도와주는 하인과 제자를 데려올 시간이 없어서였다. 비록 감찰원 서리가 도와주고 있기는 했지만, 종이 더미 속에서 자료와 유리한 경문을 찾아주는 건 그에게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편 상대방은 현지 소송대리인이었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나흘 동안 전쟁을 치렀으니, 제아무리 천하제일 소송대리인인 송세인이라 할지라도 정신력만 가지고는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었다.

송세인의 말에 진백상이 느긋하게 빙그레 웃으며 하서비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하오나 장유유서 이 네 글자의 뜻은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명청달 어르신은 적장자입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명씨 가문 가산의 처분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소리를 높이며 말을 이어 갔다.

“예기(禮記)의 상복사제(喪服使制)에 이르길 날에는 둘째 날이 없고, 땅에는 둘째 주인이 없고, 국가에는 둘째 군주가 없으며, 집안에는 둘째 가장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진백상의 말에 계속 힘이 실리고 목소리는 갈수록 격앙되어 갔다.

“예로부터 이러할 진데 어찌하여 작은 변화라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경국의 법률은 일찌감치 정해져 있는데, 하······ 명 선생은 어찌하여 이런 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부디 대인, 일찌감치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송세인이 곤란하다는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하서비를 감싸는 눈빛으로 웃으며 재판대 앞으로 나아가 꿋꿋하게 말했다.

“이른바 가산이란, 지위를 계승하고 재산을 분할 받는 것에 불과합니다. 진 선생이 말씀하신 점에 대해 본인도 이견은 없습니다. 하오나 지위를 이어받는 일, 재산을 분할 받는 일과 관련해, 옛 명씨 어르신의 과거 지위는 지금은 명청달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명청성 선생은 이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오나 지위를 물려받는 건 단순히 태어난 순서와 적자와 서자만 논하는 것이니, 재산을 분할 받는 건 또 다른 문제이지요.”

그러자 진백상이 살짝 노기를 드러냈다.

“지위를 계승하고 재산을 나눠 갖는 일에서, 명확히 지위를 이어받았다면 재산 분할권을 이어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거늘!”

지위를 계승하고 재산을 분할 받는 건, 계승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두 부분이었다. 송세인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재산을 분할 받는 것과 지위를 계승하는 건, 선생도 말했다시피, 모두 경국 법률을 기준으로 따른 거지요. 그런데 나도 지금 경국 법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손에 쥔 금선을 탁 내리치고는 언성을 높였다.

“경국 법률 집주 제34 소조항에 분명히 명기되어 있습니다. 집안은 가장이 다스리되 가산은 공공물이라고 말입니다! 내게 소송 대리를 맡긴 분은 집안을 다스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하오나 가산은 공공물이니, 그것은 세밀하게 따져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어찌 나누는가는 옛 명씨 어르신의 유서에 나와 있으니, 당연히 옛 가장의 말을 따라야겠지요!”

진백상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지위 계승과 재산 분할과 관련해 어찌 저런 생경한 내용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경국 법률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습니다. 동거 중인 가장이 재산을 불균등하게 나눠주면, 그 죄는 아이의 가산을 사사로이 사용한 죄로 논하며, 벌금 20관과 곤장 스무 대에 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송세인이 싸늘하게 명란석을 바라보고는 매 단어를 똑똑히 말해주었다.

“내게 소송을 맡긴 분은 어려서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일부러 불균등한 분배를 해준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벌금 20관과 곤장 20을 기준으로 따져본다면······ 명씨 가문은 20만 관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리고 명씨 가문 사람의 엉덩이가 남아날 것 같습니까!”

명란석이 대노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송세인이 갑자기 몸의 방향을 틀어 재판대의 지주를 향해 살짝 웃으며 예를 갖추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이는 경국 법전에 있는 내용입니다. 형부의 아동 재산을 사사로이 이용하는 것과 관련한 조항에 들어 있습니다. 대인께서는 율과(律科) 출신이시니, 소인의 말이 틀림없음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송세인은 명씨 가문의 대응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갔다.

“법률 조항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으니, 하나 더 말하겠습니다. 경국 법률 소의 호혼 중 다음과 같이 규정이 있습니다. 동거한 자에게 반드시 나누어 주고 불균등하게 대하면 법률을 침해한 것을 간주하며, 남에게 죄를 씌운 것으로 간주해 3등급을 강등한다! 그렇다면 이건 무슨 죄명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도적질을 한 것으로 중죄인 것이지요.”

진백상은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경도에서 온 소송대리인에게 감탄했다. 분명 간단한 가산 관련 소송이거늘. 그것을 지위 계승과 재산 분할이란 두 가지 문제로 확대시키더니 그 둘 사이를 원숭이처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압박을 해 왔다. 자신이 주장한 경국 법률의 경문이 훨씬 더 견고한 위치에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건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었다. 상대방이 여러 해 전에 있었던 별 볼 일 없는 법률 조문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 줄은 말이다.

방금 전 송세인이 말한 경국 법률은 수정을 거칠 때 잊혀 간과되었던 부분이었다. 일찌감치 서재 한쪽 구석에 처박혀 쥐도 들여다보지 않을 것들인데. 상대방이 꼼꼼하게 찾아낸 것도 모자라 재판장에서 떳떳하게 들이밀기까지 하다니.

‘저 소송꾼 놈은 정말이지 대단하단 말이지!’

송세인의 얼굴은 차분했지만 두 눈에는 핏발이 일고 있었다. 소송을 이 정도까지 끌고 오다 보니, 그의 능력에도 한계가 온 것이었다. 지위를 계승하고 재산을 분할 받는 것을 이번 소송에 엮는 건 참으로 복잡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서 조금씩 자신감이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 유서가 최종적으로 효력을 발휘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모든 자녀의 평등 분할’이라는 말을 꺼내보기는 한 것이었다.

명씨 가산의 7분의 1이라니. 적지 않은 액수였다.

비록 범한의 야망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흠차 대인이 하서인을 이리도 중히 여기는 걸 보면 송세인은 이 소송을 멋지게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소송대리인으로서의 업적에도 가장 멋진 한 획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명씨 가문의 가산 관련 소송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건, 소송대리인 입장에서는 이미 가장 난이도 높은, 그리고 동시에 이전보다는 훨씬 큰일을 한 것이었다. 이를 테면······ 황자의 계승권을 어찌 소송대리인 정도가 말할 자격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조정이 두 패로 나뉘어 힘겨루기를 하지 않았다면, 명씨 가문의 가산 관련 소송은 재판장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송세인 역시 이번 소송에 참여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송세인은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이상하게 극도로 흥분되어 있었다. 만나기 힘든 기회를 잡았으니, 어떻게든 이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번 소송에 참여함으로써 어떤 사람들의 민감한 신경을 건드렸고, 이로써 그들의 협력을 촉진했으며, 더 나아가 범한과 그들의 갈등으로 인한 대치 상황을 앞당겨지게 만들 거란 걸 알게 된다면······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게 해주겠다는 유혹이 있다 해도 그는 서둘러 이름도 성도 모두 바꾸고 도망가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송세인은 그 문제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른바 가산이란 건, 명씨 가문이든, 황제든 모두에게 민감한 문제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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