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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32화 (432/1,108)

432화

송세인은 소주부 지주가 이어서 더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매우 빠르게 말을 받아쳤다.

“대인? 판결은 누가 내립니까?”

“당연히 본관인데······.”

“대인께서 판결을 내리시니 묻겠습니다. 어떤 물증 말입니까?”

송세인은 기세등등하게 재빨리 말을 내뱉으며 소주부 지주에게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소주부 지주는 정신이 조금 멍해져, 우물쭈물하며 말을 제대로 못 했다.

그 순간 송세인이 한 손으로 다른 한 주먹을 감싸 쥐고 예를 갖추더니 상대방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본 상태에서 압박하듯 물었다.

“대체 어떤 물증 말입니까?”

소주부 지주는 송세인의 기세에 깜짝 놀랐다. 이에 순간 수년 전 율과 시험을 보던 때로 되돌아가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하고 말았다.

“흔적, 흉기, 문서······.”

“문서요? 좋습니다!”

송세인이 두 눈이 빙그레 웃기 시작하더니, 그의 입에서 거창하게 칭찬하는 말이 나왔다.

“대인, 영명하십니다!”

소주부 지주는 다시 머리가 멍해져 버렸다. 대체 자신의 어디가 영명하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해 미심쩍어하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송 선생은······.”

그런데 송세인은 이번에도 그에게 말을 다 할 기회를 주지 않고 급히 재촉하듯 되물었다.

“대인, 만약 문서가 있다면 증거가 되는 것입니까?”

“당연히 되······.”

송세인이 다시 말허리를 툭 끊어버렸다.

“문서 증거가 있으면, 대인께서는 인정하지 않으시면 안 되는 거군요!”

소주부 지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화를 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본관도 경국 법률을 잘 아는 사람인데, 어찌 문서가 유력한 증거물이란 걸 모를 수 있겠느냐! 소송대리인으로서 말이 너무 무례하구나! 문서로 된 증거물을 가져온다면야 당연히 앞서 데려온 산파보다 더 신뢰할 수 있지 않겠느냐!”

소주부 지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문득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것만 같았고, 왜 자기가 갑자기 말을 많이 했는지 의아했다. 지주가 무의식적으로 재판장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명란석과 진백상이 경악하며 실망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송세인이란 소송대리인은 득의양양하게 얄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송세인은 연거푸 소주부 지주의 말을 끊었다. 지주가 생각해 둔 대응 방법을 완전히 차단한 후 갑자기 다시 말을 거는 방법을 되풀이해 지주가 그의 생각에 따라 움직이도록 한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소주부 지주가 증거를 다시 거부하는 뻔뻔한 광경이 재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먼저 사람들 앞에서 문서 증거의 중요성을 확인한 것이었다.

사실 이는 변론 이전에 아주 얕게 깔아 놓은 밑작업이었다. 개 앞에서 햄을 들고 계속 흔들기만 하며 단 한 입도 내어주지 말아 보자. 그렇게 계속 흔들다가 마지막에 개에게 바나나 하나를 툭 던져주면, 개는 얼씨구나 하면서 맛있게 먹어치운다. 하지만 그 순간 개는 자신이 먹고 싶었던 건 바나나가 아니라 햄이란 사실은 잊게 되는데, 송세인의 밑작업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진백상은 지주 어르신이 송세인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진백상은 송세인이 말할 때 끼어들어 말을 끊어놓을 기회를 잡지 못했다. 왜냐하면 송세인 저놈이 말을 마구 쏟아내면서 오만하고 무례한 말투로 상대방의 화를 돋게 만들어서였다.

진백상과 명란석이 서로를 잠시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상대방이 대체 무슨 문서 증거를 가지고 있기에······ 하서비의 진짜 신분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걸까?

소주부 지주는 자신이 송세인에게 농락당했음을 알아채고는 그의 밉살스러운 미소를 바라보며 저놈을 매우 치라고 명령을 내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데 하필이면 지금만큼은 저자를 때릴 수 없기에 그로서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묻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문서 증거가 있으면서 왜 아까는 내놓지 않은 것이냐?”

그러자 송세인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올리겠습니다.”

지주 대인이 싸늘하게 웃었다.

“가져온 문서 증거가 아무 효력이 없다 해도 본관의 결정을 비난하지 말거라.”

그러자 송세인이 음산하게 웃었다.

“대인, 염려 놓으십시오. 이번 문서 물증은 오래된 것이기는 해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노망이 날 리도 없고······ 아무튼 대인, 염려 놓으십시오!”

송세인이 하서비에게 다가가 그의 귀에 대고 몇 마디 건넸다. 그러자 하서비가 살며시 표정을 구겼다. 마치 이렇게나 빨리 그 물건을 내놓게 될 줄 몰랐다는 듯이 말이다. 자신의 진짜 신분을 증명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줄이야.

그가 품에서 작은 함을 꺼내 조심스레 고문에게 건넸다. 그는 벌건 대낮에 누가 빼앗아가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함을 들고 가는 고문의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서비의 신중한 표정을 보며 진백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는 명란석에게 다가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도련님, 무슨 물건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명란석도 잔뜩 궁금한 표정이었다.

‘소주는 경도만 못하니 출생증명서 같은 게 있을 리 없어. 그렇다면 저 종이는 대체 뭐지?’

그 순간 소주부 지주가 함을 열었다. 그리고 고문과 함께 대충 훑어보다가 갑자기 낯빛이 변해 버렸다.

그들의 반응에 명란석과 진백상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소주부 지주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명란석을 잠시 훑어보았다.

그러자 송세인이 얼굴에 미소를 띠고 차분하지만 높은 목소리로 맑고 우렁차게 말했다.

“저 문서 증거는 옛 명씨 어르신께서 친히 작성하신 유서입니다. 유서에는 명씨 가문의 가산을 모두 일곱째 명청달에게 남긴다고 되어 있고······ 이는 하 선생이 줄곧 지니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 선생이 명씨 가문의 일곱째 아들이란 걸 증명하기에는 충분합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송세인이 소주부 지주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말투를 확 바꾸어 먼저 방어막을 친 것이었다.

“물론, 우매하고 완고하고 강직한 사람들은 하 선생이 우연히 주운 유서를 가지고 명씨 가문의 자손 행세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아까는 산파가, 지금은 유서가 나왔는데도 대놓고 모함을 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흥! 세상 사람들이 눈이 먼 것도, 생각이 짧은 것도 아니니, 우리 경국의 관리와 강남 백성들이 그런 모함을 믿을 리 있겠습니까!”

“옛 명씨 어르신의 유서라니!”

재판장 내부의 풍향이 확 바뀌고 말았다. 관아 밖에서 구경하던 백성들도 갑자기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재판장에 있는 명란석과 진백상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하니 제 자리에 서 있었다. 명란석은 너무 놀란 얼굴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럴 리 없어. 할아버지께서 유서를 남기셨다고? 분명 가짜일 거야!”

옆에서 명란석 도령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송세인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시. 유서라고는 아예 구경도 못했으면서 초장부터 가짜라고 하다니······ 명씨 가문 도련님은 신선이라도 되나 보죠?”

여전히 충격 속에 있던 명란석은 송세인의 말에 옷소매를 뿌리치며 벌컥 화를 냈다.

“그 유서는 분명 가짜요!”

명란석의 말에 송세인은 기분이 좋았다. 적시에 밑 작업을 해둔 덕에 가장 걱정했던 국면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걸 알게 되어서였다. 만약 상대방이 유서의 진위 대신 앞서 자신의 지적처럼 하서비가 유서를 어디서 주운 후 죽은 명씨 가문의 일곱째 공자를 사칭하고 다닌다고 물고 늘어졌다면, 이것이야말로 송세인에게는 가장 대응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상대방이 그런 식으로 뻔뻔하게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송세인으로서도 달리 대응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명씨 가문의 도령은 유서의 진위에만 신경을 쓰느라 하서비가 진짜 행사를 한다는 건 지적도 않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송세인 자신이 유서가 진짜라는 것만 증명해 낸다면, 그렇다면······ 하서비가 명씨 가문의 일곱째 공자란 점은 확인을 받은 사실이 되는 것이었다.

송세인이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재판장의 소란은, 사실은 모두 송세인의 계획이었다. 송세인은 계획한 순서에 따라 말을 해나가며 모든 걸 정교하게 이끌어 나간 것이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지금의 이 곤란한 국면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송세인은 과연 명불허전인 경국 제일의 소송대리인이었다.

* * *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는 소주부 지주가 양측 소송대리인에게 재판대 앞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문서 증거가 나왔네. 아직 진위는 모르지만······.”

송세인은 오늘 소주부 지주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던 터였다. 이에 지주의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대인, 진짜든 가짜든 조사를 해보면 바로 알 터인데, 왜 모른다고만 말씀하십니까?”

진백상은 강남에서 유명한 소송대리인이라 그런지 이미 충격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송세인이 오늘 상대에게 일부러 겁을 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대응했다.

“대인, 상대측에서 이미 이 문서가 옛 명씨 어르신의 유서라고 말했습니다만, 물론 조사를 해보셔야겠지요. 명씨 가문의 도련님이 현장에 있으니 직접 살펴보도록 하는 건 어떠할는지요?”

그가 송세인을 바라보며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송 선생도 이견은 없는 거겠죠?”

“명씨 가문 도련님이 발광해 유서를 먹어버리지 않는다면야, 직접 봐도 무방하겠지요?!”

송세인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음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진 형은 대단히 차분하군요.”

“피차일반이오.”

진백상이 미소를 지으며 받아쳤다.

소주부 지주는 두 악덕 소송대리인이 무얼 가지고 서로를 치켜세워주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송세인과 진백상만 알고 있어서였다. 이들에게는 소송이 시작된 이상 하서비의 신분을 증명하는 건 시작일 뿐이고 거대한 자산이 어느 쪽으로 돌아가느냐가 진짜 중요한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서비가 내놓은 유서가 진짜라고 해도 경국 법률에 의하면 명씨 가문은 여전히 불패의 자리에 서 있었다.

그래서 진백림은 전혀 허둥대지 않은 것이고, 송세인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두 사람 모두 아직 갈 길이 머니 어디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이때 명란석은 이미 재판대로 다가와 잔뜩 불안한 얼굴로 그 위에 펼쳐져 있는 유서를 보고 있었다.

유서에는 할아버지인 옛 명씨 어르신의 필적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명씨 가문 자손으로 날마다 보다시피 한 그로서는 할아버지의 글씨체를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명란석은 유서 위의 말라빠진 글자체를 보고는 할아버지의 친필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유서의 용지 역시 할아버지께서 옛날에 가장 좋아하셨던 청주지였다.

명란석이 얼굴에 살짝 불안한 기색을 드리우더니 지주 대인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진백상이 명청달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명란석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답을 해주었다.

“어쩌면······ 진짜일 수도요······.”

한데 명씨 가문 도령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가문의 사업을 맡아서 해오던 터라 심지가 굳건하게 다져져 있었다. 그런데 순간 무언가 기이한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게 과거 아버지께서 토로했던 여러 비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났다. 이에 점점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명란석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가짜입니다!”

진백상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네? 어찌 그리 판단하신 겁니까?”

명란석이 이를 악 물고 음침하게 대답했다.

“우리 집 큰 어르신이라면······ 과거에 손을 쓰셨을 테니, 유서 따위가 남아 있을 리 없지요!”

진백상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상대방이 말한 이는 바로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으로, 생각해 보니 그녀는 정말로 그럴 사람이었다. 만약 큰 노마님이 가산을 빼앗고, 살인하고, 내쫓았다면, 가장 먼저 유서부터 처리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치대로라면, 유서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저 유서는······.”

진백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명란석이 살짝 암울하게 말했다.

“산파와 마찬가지입니다. 감찰원이 만든 가짜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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