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430화 (430/1,108)

430화

지주 대인이 불같이 화를 내려 하는데 고문이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고문이 귓속말 일러주었다.

“범······ 범······ 사소한 일은 신경 쓰지 마십쇼.”

지주는 깜짝 놀랐다.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런 자질구레한 걸 가지고 따져서 무엇하겠는가!

바로 이때, 하서비가 입을 뗐다. 그가 손을 맞잡고 예를 취한 상태에서 맑고 우렁차게 말하기 시작했다.

“민초 하서비, 본래 성씨는 명, 이름은 청성이옵니다. 소주 명씨 가문의 옛 명씨 어르신의 일곱째 아들입니다. 어렸을 때 사나운 어머니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 지금까지 떠돌며 살았습니다. 부친께서 돌아가셔서 오늘 이렇게 부득이하게 재판장으로 찾아와 소주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과 장자인 가주 명청달이 결탁하여 못된 짓을 하고, 사람을 죽이려 하였으며, 제 가산을 빼앗은 것을 고발하러 왔나이다······ 부디 청렴한 대인 어르신께서 이백성을 위해 정의를 되찾아 주십시오.”

그의 말에 재판장에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모두 오늘 하서비가 가산을 빼앗긴 일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왔다고만 알고 있었다. 한데 말을 들어보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있던 것이었다. 하서비는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과 명청달이 과거 자신을 죽이려 했다며, 그자들의 악행을 직접적으로 규탄했다. 더군다나 사나운 어머니, 못된 짓이란 단어를 연달아 사용함으로써 다른 여지를 전혀 남겨 놓지 않고 있었다.

밖에 있던 백성들이 시끄럽게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은 자상한 노부인으로 그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선행을 하신 분이었다. 그런 분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거지?

사실 명씨 가문의 일곱째 공자가 과거 실종되었을 때 그들도 큰 노마님 및 현 가주인 명청달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걸 속으로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한데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믿음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하서비가 명청달의 죄상을 말하자 사람들은 야유를 보냈다.

소주부 지주 역시 이맛살을 찌푸리며 듣기 싫다는 듯이 받아쳤다.

“중차대한 일이다. 그러니 언행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고발장은 어디에 있느냐?”

하서비가 품에서 고발장을 꺼내 두 손으로 재판대 아래쪽에 있는 고문에게 건네자 고문이 그것을 다시 지주 대인에게 건넸다. 그러자 두 사람 모두 잠시 같은 곳에 시선이 멈추더니 속으로 깜짝 놀라 버렸다.

고발장은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을 날카롭게 겨누고 있으면서도 그것과 관련한 경국 법률의 규정을 교묘하게 피하고 있었다. 돌아가신 명씨 어르신의 유서에만 초점을 맞추어 놓아서였다. 그리고 그동안 하서비 자신이 불쌍하게 떠돌이 생활을 한 사실을 필묵을 아끼지 않고 써 내려가 읽는 이의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지주 대인은 마음이 움직인 사람처럼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싸늘하게 웃어넘겨 버렸다. 그리고 이 정도 문장이면 연극용 소설로는 꽤 괜찮겠지만, 소송을 할 때는 별로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경당목(驚堂木)을 내리치며 엄하게 꾸짖었다.

“하서비! 제시할 증거가 있느냐?”

하서비가 한껏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명씨 가문 사람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인께서는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 것입니까?”

하서비의 차분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에 지주 대인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설마 저자가 치명적인 무기라도 손에 쥐고 있는 것인가?’

지주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문과 두어 마디 상의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명씨 가문에게 소송에 응하러 재판장에 나오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경국 법전에 쓰여 있는 주석을 보면 이번 민사 소송 건은 피고가 나와서 응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 큰 안건이고, 양측의 배후 세력도 너무 크고, 강남 일대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어 소주부 지주도 감히 부주의하게 일을 처리할 수 없었다. 지주는 명씨 가문이 모른 척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기에 사람을 보낸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속이 밖으로 나가는데 명씨 가문 사람이 관아 안으로 들어왔다. 명씨 가문에서도 소송에 응할 사람을 일찌감치 마련해 두고 이길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한데 찾아온 사람을 보며 소주 지부가 또 이맛살을 찌푸리며 싸늘하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러자 귀공자가 살며시 웃으며 몸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명란석이 대인께 인사드리옵니다.”

명씨 가문의 도령은 소주부 지주가 지금 연기하는 중이란 걸 다 알고 있었다. 백성들 앞에서 강직하고 권세에 아첨하지 않는 모습을 연기하고 있느라 이리 냉담하게 말한 것이라고 말이다. 평소 소주부 지주는 명란석에게 매우 친절했다. 한데 요 며칠 명씨 가문이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번 가산을 둘러싼 소송은 자신들이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었다. 이에 명란석은 소주부 지주의 생각을 꿰뚫어 보고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래.”

소주부 지주가 말을 이어 갔다.

“명씨 어르신께서 최근 몸이 편찮으시니 장손인 그대가 이번 소송에 응하는 건 합당하다고 본다. 여봐라! 고소장을 명란석에게 보여주어라.”

고문이 고소장을 건네주는데도 명란석은 받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예를 올려 인사나 올렸다.

“대인, 우리 명씨 가문은 소송에 능할 정도로 악인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 쟁점에 대해 잘 모르옵니다. 그러니 소송대리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명란석은 말을 마친 후 옆을 잠시 바라보았다. 소위 ‘소송에 능한 악인’이란 당연히 옆에 서 있는 하서비를 이르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서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큰 조카에게 잠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명란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쪽에서 사람 하나가 재빨리 들어왔다. 그는 고문이 들고 있던 고소장을 양손으로 받아들고는 비위를 맞추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소주부 지주와 고문은 그자를 보는 순간 걱정을 놓아 버렸다. 이 소송대리인은 성은 진이고 이름은 백상으로 강남 일대에서는 가장 유명한 자였다. 그런데 어쩌면 가장 악명 높은 소송 거간꾼일 수도 있었고, 주부(州府)와는 가장 의기투합해 있는 사람이었다. 이 자가 소송을 맡으면 검은색도 흰색으로 변하고, 죽은 것도 산 것이 되고, 남자도 여자가 되었다. 그만큼 말주변이 좋았고 경국 법률을 손바닥 안에 놓고 들여다보고 있어 지금껏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오늘 명씨 가문은 진백상을 내보낸 것도 모자라 경국 법률 중 적자 승계의 사문화된 법률의 보호까지 받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가산 관련 소송에서 명씨 가문은 패할 리 없었다.

진백상이 하서비의 고소장을 들고 세세히 읽어나갔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입가에서는 경멸을 담은 냉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대방을, 심지어는 상대방 뒤에 있는 흠차 대인까지 싸잡아서 얕본 것이었다.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경박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늘도 땅도 감동할만한 이야기군요······. 한데······ 하 두목의 일과 명씨 가문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송대리인이 하서비를 하 두목이라고 부른 건 여론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였다. 옆에서 듣고 있는 백성들에게 하서비가 강과 호수에서 살인을 밥 먹듯이 저지르는 암흑가 두목이란 걸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하서비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명씨 가문에서 20년간 있었던 이야기인데, 왜 명씨 가문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묻는 것이오?”

그러자 진백상이 갑자기 싸늘하게 두어 번 소리 내며 비웃기 시작했다.

“하 선생은 정말 웃기군요. 당신이 명씨 가문에서의 일이라고 말하면, 그게 정말로 그렇게 되는 건가요? 자신이 명씨 가문의 일곱째 어르신이라고 우기면 그렇게 되는 건가요?”

그가 재판대의 소주부 지주를 향해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하며 웃으며 말했다.

“대인, 이번 안건은 너무 황당합니다. 그러니 계속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소주부 지주는 거짓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찌하여 그런 맹랑한 말을 하느냐!”

그러자 진백상이 웃어보였다.

“실질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는데 혼자서만 자신이 명씨 가문의 일곱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인, 만약 지금 또 다른 이가 명씨 가문의 일곱째라고 나선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강남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 있습니다.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께서는 과거에 아들 일곱과 딸 넷을 기르셨지요. 그중 일곱째는 첩의 소생이었고, 어려서부터 병치레를 많이 하고 몸이 허약해 십여 년 전 불행히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명칠 공자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명씨 가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소송을 하도록 놔둔다면, 명씨 가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이고,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과 명씨 어르신의 깨끗한 명성은 중상을 입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하늘의 도일까요?”

그가 하서비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물론 지금 모두들 하 두목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건 다 알고 있기는 한데······ 하온데 황실 금고의 공개입찰 후 하 두목이 이리 황당한 행동을 하니, 소인이 보기에는 너무 이상합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뒤에 말 못할 음흉한 생각이라도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요?”

강호에서 제일 유명한 소송꾼은 오늘 소송은 전혀 도전적이지 않다고 생각해 시작부터 아예 맹공을 퍼부어 버렸다. 그는 하서비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고 공격을 해댔다. 그리고 하서비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소송을 걸면 안 되지요. 증인이 없으면, 함부로 입을 놀려서도 안 되고요······ 하 두목, 오늘 당신이 명씨 가문의 명성을 모욕했으니, 잠시 후 무고죄로 고발해주지.”

과거에 큰 노마님이 하서비의 생모를 때려죽이고 하서비를 쫓아낸 걸 아는 사람은 이미 십여 년 전에 입막음을 당한 상태였다. 그러니 하서비 손에는 물증이든 증인이든 있을 턱이 없었고, 이에 명씨 가문에서는 자신만만하게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소주부 관아 밖에서 듣는 순간 닭살 돋는 부드럽고 나른한 음성이 들려왔다.

“증거가 없으면 소송을 걸 수 없다고 누가 말했답니까? 또 증인이 없으면 살인이라 말할 수 없다고 누가 말한 건가요?”

“경력 원년, 정주 지역의 어느 첩이 남편을 죽인 사건이 있었지요. 증거가 없는데도 정실이 고발을 했습니다. 나중에 마구간에서 말을 탈 때 쓰는 칼이 나와 사건이 해결이 되었답니다. 형부에 기재된 사건으로 춘권(春卷) 137당(擋: 문서, 안건)에 나온 남월 송대왕 사건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3등급 민사 사건으로, 1만 관 이상의 금액이 연관된 사건이라 사문(死文)화된 법을 적용하지 않았고, 반좌(反坐: 거짓을 고해 남에게 벌을 받게 한 사람에게 같은 벌을 내리는 것)를 당하지 않았으며, 완벽한 증거가 필요 없었습니다. 하온데 명씨 가문의 가산 가치가 어찌 만 관만 되겠습니까? 두 가지 선례가 이미 있는데, 어찌하여 소송을 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증거란 건 고발한 후 관부가 현장을 조사하면서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소송꾼은 뭘 그리 서두르는 건가요?”

관아 밖에서 나타난 사람은 유삼이라는 소매 폭이 좁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 금선(金扇: 금색 부채)을 들고 있어 제법 잘난 척하는 오만한 사람 같아 보였다. 또한 말끝마다 형부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과거 사건을 언급해 억지 주장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기세등등한 태도로 명씨 가문을 성공적으로 압박하는 한편, 사람들의 이목까지 자신에게 집중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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