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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29화 (429/1,108)

429화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사람이 이끌고 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직접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그는 옆에서 죽을 마시며 엿듣고 있는 3 황자를 잠시 바라보고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해 도련님께서는 나가 달라는 눈치를 주었다.

3 황자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가자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까 들어올 때 왜 그런 이상한 표정을 지은 거죠?”

등자월이 사방을 살펴보고는 쓴웃음을 내지었다.

“경도를 떠나올 때 경도에서 흉악한 소문이 돌았는데······ 모두들 대인께서 북제 성녀인 해당타타 낭자와 바깥출입 때는 동행하고, 앉을 때는 동석하고, 누울 때는······ 아무튼 조정에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대인께서는 황실 금고를 쥐고 계시니 불화는 피하셔야 하는데, 조정 관원들은 이 일로 대인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한데 화원에 들어서자마자 뜻밖에도 해당타타 낭자가 보여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직감해 걱정이 들었던 겁니다.”

“누울 때는 동침한다고요?”

범한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이 생각해 낸 거니 다행이네요. 그러니 그 일은 그만 이야기하고, 가져온 물건이나 보여줘요.”

그러자 등자월에 품에서 조심스레 납작한 함을 하나 꺼내 범한에게 건넸다.

범한이 함을 열어 가운데에 누워 있는 종이를 꼼꼼하고 진중하게 살펴보았다. 살짝 누렇게 뜨고 가장자리는 살짝 말려 있는 흰 종이로, 딱 봐도 오래 된 것이었다. 종이 위에 쓰여 있는 글자가 살짝 비뚤배뚤한 것이 글씨를 쓴 이가 생명이 거의 다했을 무렵 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잘 만들었군.”

범한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유서가 무슨 역할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산을 둘러싼 소송을 연기시키려면 이게 있어야 하지.”

그러자 등자월이 보고를 했다.

“대인, 염려 마십시오. 2처와 3처에서 협력해서 만든 것입니다. 과거 명씨 가문 주인이 남긴 무수히 많은 글씨체를 참고했고, 종이도 요즘 찾기 힘든 그때 만들어진 종이를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오래 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처리까지 해서 세밀하게 들여다보아도 아무도 가짜란 걸 알아챌 수 없습니다.”

“명씨 가문에서는 가짜란 걸 알 겁니다. 진본은 일찌감치 없애버렸을 테니까요.”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가짜로 진실을 숨기는 일과 관련해 우리 감찰원 내부에 전문 인사들이 제법 있었군요. 나중에 가짜 골동품으로 장사나 해야겠습니다. 어쩌면 돈을 제법 벌어들일 겁니다.”

“이따가 이걸 하서비에게 보내요. 내일 개정하고 사건을 심의할 테니, 이 유서를 거기에 던져 놓으면······ 어쩌면 소주부에서 눈이 휘둥그레질 겁니다.”

명씨 가문에 대한 조사는 계속하고 있지만 아직 성과가 없었다. 명씨 가문의 흔적을 지우는 기술이 너무 심오하고, 강남 관료들과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그들을 보호해주고 있어서였다. 소주부도 그중 하나였다. 범한은 직접적으로 소주부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비밀리에 제작된 옛 유서’로 강남로 관원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면,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바깥 대청에 혼자 남게 되자 범한은 가슴팍에 넣어 두었던 서한 두 통을 꺼냈다. 그는 서한을 우선 대충 훑어 본 후 다시 자세히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임완아의 편지에는 경도에서 벌어진 잡다한 일이 주된 내용이었고 가끔씩 황궁 상황을 언급되어 있었다. 한데 내용이 비교적 이해하기 힘들게 어렵게 쓰여 있었다.

아내를 경도에 두고 오니 가장 좋은 건, 범한에게 황궁의 풍향계가 어디로 향하는지 곧바로 알려주는 이가 있다는 점이었다.

장 공주는 광신궁으로 돌아왔고, 2 황자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태자의 동향이 가장 은밀했으며, 황태후는 범한이 강남에서 날뛰고 다니는 게 조금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가장 이상했던 건 황제는 아직도 차분하다는 점이었다. 한데 이······ 뒈질 황제는 천하를 이따위로 어지럽혀 놓으면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이득이 있어 이러는 건지! 그런 근거 없는 믿음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거야?!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으로 향이 배어 있는 서한을 가볍게 쓰다듬고 있는데 문득 임완아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수개월 동안 못 보았지만 그는 아내가 경도에서 자기 걱정을 하며 방법을 강구 중인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서한을 다 읽은 범한은 그제야 그분이 임대보를 강남으로 내려 보낸 목적을 알게 되었다.

범건 상서는 서한에서 신신당부를 해 놓았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임대보를 오주로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전임 재상 임약보는 관직에서 내려와 오주로 가서 지내느라 오랫동안 자기 아들을 보지 못했다. 이에 범한이 임대보를 오주로 데려가면, 심계가 깊은 장인을 자연스레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황제 폐하께서도 반대하기 힘든 아주 좋은 구실거리였다.

* * *

오늘 소주부에서는 엄청 황당한 일이 일어날 예정이었다. 이에 소주부 관아 문 앞에는 일찌감치 소문을 듣고 몰려온 백성들로 북적였다. 구경하기 좋아하고 관을 무서워 않는 이들 소주 백성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이야기 주제는 당연히 최근 소주성에서 무성하게 소문이 돌고 있는, 그리고 강남 전체가 주목하고 있는 명씨 가문의 가산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일찌감치 병사했다는 명칠 공자가 살아서 사람들 앞에 나타나다니. 그것도 강남 수채 대두목으로 암흑가에서 이름을 떨치던 이가 어느새 황실 금고와 관련한 일원이 되어, 그것도 북쪽 판매를 책임지는 황가 상단 중 하나가 되어 말이다. 그 누구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떠한 신분적인 변화를 거쳤든 가장 이목을 끄는 건 그의 신분이 여전히 명씨 가문의 자손이란 점이었다. 이에 오늘 하서비는 소주부에 고소장을 제출하고 가산을 둘러싼 소송을 제기한 것이었다. 하지만 명원에 있는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나저나 명씨 가문의 가산은 일국의 재정과 맞먹는 규모인데, 대체 누구 손에 떨어지게 될까?

절대 다수의 사람은 명씨 가문에게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왜냐하면 첫째, 명씨 가문이 자신들의 어두운 면을 제대로 감추어 강남 재상가와 권력가, 백성들에게 매우 깨끗한 사람들로 각인되어 있어서였다. 둘째, 명청달이 명씨 가문의 장자여서였다. 하서비가 정말로 명씨 가문의 일곱째라고 해도 경국 법률과 천년 동안 이어져 온 관습에 따라 가산은 자연스레 적장자에게 계승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하서비가 명청달이란 사실을 증명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은가.

소주부 관아 밖은 시끌벅적했지만, 관아 내부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소주부 지주가 머리가 너무 아파 커다란 책상 위에 반쯤 엎어진 채로 옆에 있는 고문에게 맥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을 좀 해보게. 오늘 어찌하면 좋겠나?”

명씨 가문은 백년 역사를 지닌 큰 가문이었다. 그러니 강남 관료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복잡하고도 많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한 명씨 가문에서 일이 터진다면, 강남 내 절반에 이르는 관원이 함께 손해를 볼 수 있었다. 한편 소주부라는 이 중요한 관아도 일찌감치 명씨 가문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하서비가 가산 관련 소송을 내자, 소주부 지주는 명청달과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 입장에 서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서비 뒤에는 흠차가 있었다. 지주 대인으로서는 감히 밉보여서는 안 되는 인물 말이다.

고문 역시 얼굴에 잔뜩 불안한 기색을 내보이며 초조하게 뱅글뱅글 돌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멈추어 서서 쥘부채를 접어 ‘팍!’, 하고 소리를 냈다.

“대인, 청렴한 관리가 되셔야 할 때입니다.”

고문이 미간에 보기 싫게 주름을 잔뜩 지으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러자 소주부 지주가 당황해 크게 화를 냈다.

“무슨 쓸데없는 말인가! 설마 본관이 평소에 청렴한 관리라 아니란 뜻인가?”

말을 마친 지주 대인은 불현듯 어떤 일이 생각나 기가 죽어 말을 이어 갔다.

“이는 명씨 가문의 일이네. 본관 역시 모른 척할 수 없어. 과거에 큰 노마님에게 기댄 덕에 지금 이 자리까지 와 있는 거야.”

고문은 지주 어르신이 자신의 뜻을 오해했다는 걸 알고는 서둘러 다가가 소리를 죽여 짧게 해명을 했다.

“어르신, 명씨 가문에서 요 이틀 동안 뭔 말이라도 전하기 위해 누구든 보냈답니까?”

소주부 지주는 당황했다. 이에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이상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렇군. 명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본관과 소통을 한 게 없었군.”

그러자 고문이 음산하게 웃었다.

“명씨 가문도 다 생각이 있었군요. 이번 소송이 어찌 진행 되든, 또 하서비가 무슨 증거를 쥐고 있든······ 명씨 가문의 거대한 자산은 어떻게든 명씨 어르신께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군요······ 명씨 가문은 자신들이 이길 거라 믿고 있어 걱정하지 않는데, 무엇하러 어르신께서 대신 조바심을 내십니까?”

소주부 지주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고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 생각에는 본관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나?”

고문의 전공 분야는 법률이어서 그는 경국 법률에 빠삭한 인물이었다. 이에 촥, 소리와 함께 부채를 펼쳐 들고는 오만하게 말했다.

“하서비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줄 당시 사람을 찾아내 그가 명씨 가문의 일곱째 공자란 게 밝혀져도, 경국 법률에 따르면 그에게 돌아갈 가산은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양쪽에 밉보이셔서는 안 되지요. 한데 명씨 가문은 경국의 법률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얼 걱정하십니까? 오늘은 공적으로 일을 처리하실 때 법률에 따라 사건을 재판하시면······ 흠차 대인도 어르신께 잘못을 물으실 수 없을 것입니다.”

강남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니 셀 수 없이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에 소주 지부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한참을 생각해 보더니 고문이 말해준 법률에 따르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법률에 따라 사건을 심의하면, 범한에게 밉보일 일도 없고 명씨 가문의 성공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동시에 관리로서의 체면도 세울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방법 같아 보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드디어 마음이 홀가분해진 지주 대인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 함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로 무언가를 하는 거지.”

이때 관아 밖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주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저 하씨 성의 도적놈은 성미 한번 참으로 급하구나!”

말은 이리 했지만 한 시도 지체할 수 없었던 지부는 일단 의관부터 정제했다. 그리고 위엄과 자상함이 돋보이도록 얼굴에 웃음을 짓고는 서재를 나가 재판장으로 향했다.

* * *

재판장으로 들어서자 관아 밖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사람들의 기를 꺾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밖에서 떠드는 소주 백성들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지주 대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아래쪽을 바라보니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하서비가 재판장에 홀로 나온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데리고 나오지 않은 걸 보니, 흠차 대인이 하서비를 돕기 위해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이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민초는 하서비입니다.”

“무슨 일로 소송을 제기했느냐?”

하서비가 잠시 침묵했다. 잠시 주의력이 분산되어 순간 대답하는 걸 잊은 것이었다. 새파란 면 도포를 입은 상태에서 턱수염도 깨끗이 밀어 푸르스름한 피부가 드러나 있다 보니, 오늘따라 그는 한껏 용맹하고 기운차 보였다. 한데 옷소매 밖으로 드러난 양손이 살짝 떨리는 걸 보니, 오늘 일이 명칠 공자에게는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니고 있기는 했나 보다.

지주 대인이 살짝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하서비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 자가 재판장 한가운데에 오만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처럼 비추어져서였다. 더군다나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만 하고, 뜻밖에도······ 무릎을 꿇지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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