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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27화 (427/1,108)

427화

하서비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어리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제사 대인이 왜 이렇게 급히 밝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살짝 황송해 당황스러웠다. 사실 하서비는 지금까지 자신이 조정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범한이 그를 쓴다고 해서 조정에서까지 그를 기용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하서비에게 과거 최씨 가문이 썼던 노선을 이용해 물건을 북쪽으로 보내도록 하는 것. 다시 그에게 북제에 있는 범사철과 만나도록 하는 것. 또 남쪽에 있는 범한이 북제 황제의 비호 아래에서 북제로 가는 밀수 노선을 다시 새롭게 뚫는 것. 이것이 범한의 목적이었다.

지금 남쪽에서는 감찰원이 암암리에 관리하고 있고, 북쪽에서는 진무사 지휘사 위화가 관리를 하고 있었다. 위화는 범한과 아는 사이였고, 북제의 나이 어린 황제에게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밀수 노선은 이미 천의무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필요한 건, 두어 번 더 단련이 필요한······ 시작점에 있는 하서비 본인이었다.

범한이 논란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온 건 다름이 아니라 세인의 말을 이용해 하서비를 자기 곁에 확고히 묶어두기 위해서였다. 이제 모두들 하서비가 범한의 신복일 거라 믿게 될 것이다. 그러면 밀수가 시작된 후 하서비가 범한을 배신하려 해도 그의 말을 믿어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범한의 적도 하서비를 겨냥할 것이다. 이미 강남거 앞에서 제법 괜찮은 시작이 있었으니, 하서비는 어쩔 수 없이 범한을 더 꽉 끌어안을 수밖에······.

이 자리는 본래 외환(外患)으로 마음을 굳힌 하서비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 배에 타도록 하는 계획이었다. 한데 3 황자가 억지를 부리며 자기도 같이 배에 오르겠다고 하다니. 하서비는 그 배에 오르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 * *

“모레네.”

범한이 하서비의 저택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에게 분부를 해두었다.

“필요한 수속은 모두 마쳐놨네. 그러니 때가 되면 바로 나가야 하네.”

하서비는 살짝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는 제사 대인이 자기를 이용해 명씨 가문의 주의력만 끌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자신은 어찌되었든 소주부에서 목소리 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에 하서비는 자신이 인생의 목표에서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범한이 탄식을 하며 하서비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경국 법률에는 이런 사건과 관련한 선례가 없다네. 상대방은 종갓집 장자이니, 법률에 따르면, 이득을 얻는 쪽은 그자네. 감찰원에서 도와준다 해도 이상적인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거고······. 그래도 잃어버린 걸 다시 가져오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니까 급히 서두르지도 말고, 너무 실망하지도 말게나.”

하서비는 가슴이 떨렸다. 앞에 있는 젊은 제사 대인이 명씨 가문의 일을 언급해서 뿐만 아니라 순간 두 사람 간에 있는 가산(家産)이란 공통점을 떠올리게 해 무언가 동질감이 느끼도록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하서비는 두 손을 맞잡고 감동한 사람처럼 말했다.

“이 하 아무개의 일로 대인께서 마음을 쓰시다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일이네.”

범한이 딱하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처음부터 말해주지 않았나. 본관 역시 이익을 우선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네. 그러니 지나치게 마음에 담아두지 말게.”

범한이 이익을 강조하자 하서비는 상대를 더 진실 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연신 인사를 올리고는 범한과 3 황자를 배웅했다. 정확히 말하면, 범한과 3 황자는 저택에 잠시 서 있다가 떠난 것이었다.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도 안 되었지만, 그 사이에 겉으로 드러났던 태도와 결심들은 상인과 관원들의 입을 통해 소문으로 퍼져나가고, 또 명씨 가문의 주요 인사들의 귀에도 전달될 게 뻔했다.

마차는 하서비의 저택을 떠난 후 서둘러 화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성 북쪽으로 향했다. 소주 성 북쪽에는 강호인이 많이 있었던 탓에 마차에서 호위하는 이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모레가 무슨 날입니까?”

3 황자가 순진무구한 두 눈을 깜빡이며 범한에게 물었다.

그러자 범한이 대답을 해주었다.

“하서비가 소주부 관아로 가 명씨 가문이 자신의 가산을 빼앗아 갔다고 고발하는 날입니다.”

조용하고 길게 쭉 뻗은 소주 도로 위로 마차 바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소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소리를 덮어주고 있었다.

3 황자가 놀라 물었다.

“그게 가능한 소송입니까?”

“왜 안 됩니까?”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소송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이기고 나서 다시 말하시지요. 하지만 어떻게든 소송은 걸어야 합니다.”

3 황자는 어찌되었든 이제 겨우 아홉 살 난 어린아이였다. 그러니 범한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내 흥미를 느꼈다.

“스승님, 우리 구경 가요! 듣기로는 하서비의 생모를······ 큰 노마님이란 사람이 때려서 죽였다고 했어요.”

범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에 할 소송은 가산을 돌려받으려는 것입니다. 살인과 관련한 옛 사건이 아니고요. 그리고 문서화 된 경국 법률 조문이나 다룰 테니 재미 따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3 황자가 궁금해 하며 물었다.

“스승님, 계획을 세워두지 않으셨습니까?”

“안 세워뒀습니다.”

범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계획을 세워뒀다면······ 무엇하러 그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했겠습니까? 그냥 시간에 맡길 뿐이고, 오래 맡길수록 좋은 겁니다.”

그러자 3 화자가 시무룩해져서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뒤로 지나가고 있는 주변의 낯선 거리 풍경이나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화원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어딜 가시는 겁니까?”

범한이 3 황자를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마마에게 저를 따라다니며 배우라 하셨지요. 마마께서도 줄곧 열심히 노력하셨고요. 오늘 마마께서 신을 따라 나오셨으니······ 길을 따라 가면서 장래에 꼭 배우셔야 하는 것들을 가르쳐드리려고요.”

3 황자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범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해서였다.

마차는 성 서쪽에서 성 북쪽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강호인들이 많이 있는 곳으로는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어느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더니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밤의 엄호를 받으며 뒤에서 따라오는 계년조의 경호를 받으며,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미행을 따돌리고 마차는 소주성에서 사라졌다.

* * *

마차는 어느 민가 밖에서 멈추었다. 이곳은 외지고 고요한 곳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는 곳이었다. 고달은 마부석에서 내려오자 등에 있는 장도 칼자루를 쥐고는 냉정하고 꼼꼼하게 주변부터 살폈다. 그런 후 그가 주먹을 쥐어 안전하다는 수신호를 보내자 범한은 그제야 3 황자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현재 범한 곁에 남아 있는 6처 검수는 모두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었다. 완쾌된 사람이 둘이 있었지만, 범한은 다시 그들에게 목숨을 걸도록 할 수 없었다. 이에 신병안전을 모두 호위와 계년조에게 맡겨 놓았더니 일을 하는 게 갈수록 조심스러워지고 있었다.

굴처럼 생긴 조용한 문을 따라 안으로 걸어가는데 3 황자는 털이 쭈뼛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사방이 온통 새카만 가운데 코에 화약 냄새가 전해져 와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범한의 손바닥을 더 꽉 쥐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서 다른 방으로 들어가자 침소가 나왔다. 방에는 모든 게 다 구비되어 있었다. 침대며 화장대에······ 심지어는 침대에서는 부부가 잠을 자고 있었다.

3 황자는 입을 떡 벌리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는 ‘이건 무슨 장난이지?’라고 생각했다. 범한도 살짝 놀라 고개를 돌려 길을 안내한 감찰원 관원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관원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곧장 침대로 걸어가 침대 틀에 있는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촤라락 하는 소리가 나더니 침대 위에 있던 장막이 서서히 열리고, 아래쪽으로 향하는 비스듬하게 난 길이 나타났다. 그러자 감찰원 관원이 ‘가시지요’라고 말하며 안내를 계속했다.

관원이 이 모든 걸 할 때, 침대에 있던 부부는 안쪽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그사이 부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귀머거리에 맹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침대 옆에 나타난 사람들을 쳐다보지도 않아 범한 일행은 순간 유령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범한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머리를 긁적였다. 전생에 읽은 어떤 소설 속 내용과 비슷한 장면이 뜬금없이 정말로 눈앞에 펼쳐져 있어서였다.

이 민가는 당연히 감찰원 4처가 소주성에 마련해 둔 비밀 가옥이었다.

* * *

이즈음 되자 3 황자도 오늘 자신이 어디에 온 것인지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래서 범한의 손을 잡고 통로를 따라 지하로 걸어 들어가는데 심장이 계속해서 방망이질을 해댔다. 3 황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스승님, 이 제자가 황자이기는 하나 그래도 조정의 규정을 따라야 합니다. 제자는 감찰원의 비밀 가옥에 들어올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설명을 해주었다.

“주마다 세 개에서 다섯 개의 비밀 가옥이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 생긴 것도 아니니, 규정에 따라 제가 옆에 있으면 아무도 무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는 감찰원 제사이고, 진평평의 친필 서한을 받은 후에는 감찰원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갖게 되었다.

범한의 말에 3 황자는 살짝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어두컴컴하게 등불이 비치는 가운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사실 감찰원 4처가 소주성에 마련해 둔 비밀 거처는 크기가 제일 큰 건 아니었지만 가장 은밀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밀실 앞에 당도했다.

실내 등불은 차분하게 타오르며 좁은 방을 어두컴컴하게 비추고 있었다. 방 안에는 숯불 화로가 피워져 있었고, 인두 두 개, 약물 몇 상자, 긴 걸상 몇 개, 길이와 모양이 제각기인 십여 개의 금속으로 된 뾰족한 물건들이 있었다.

바로 자백을 강요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본적인 물품들이었다. 특히나 형틀에 묶여 있는 숨을 헐떡이고 피범벅이 되어 있는 사람에게 쓰는 건 분명해 보였다.

익숙하고 친근한 냄새가 나자 범한은 참지 못하고 코를 벌름거렸다. 그리고 3 황자가 자신의 손을 더 꽉 쥔 게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속으로 웃고 말았다. 황궁에서는 잘도 음험한 일을 해대는 아이인데. 그래도 아이는 아이이다 보니 고문실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은 제대로 본 적 없었을 것이다.

자백을 받아내고 있는 4처 관원들은 열이 나서 그런지 상의를 탈의한 상태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상관(上官)과 상관의 상관이 갑자기 등장하자 깜짝 놀라 서둘러 옷부터 찾아 입었다.

그러자 범한이 손을 내저으며 그들에게 하던 걸 멈추도록 했다.

“하던 일이나 계속하게······ 자백은 좀 했는가?”

아직 팔 하나밖에 넣지 못한 관원이 낭패라는 듯 방구석에 있는 탁자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조심스레 종이 몇 장을 들어 건넸다. 모두 고문으로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범한이 종이를 받아들고 보더니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범한은 줄곧 군산회를 염두에 두고 있던 터라, 시간을 내 심문 상황을 보러 온 것이었다. 한데 예상과 달리 이미 여러 날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큰 진전은 없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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