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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26화 (426/1,108)

426화

“내가 빌려준 돈을 강가 공사에 썼다면 그럭저럭 괜찮았을 텐데. 그런데 우리 북제의 은전을······ 기생집 여는 데 쓰다니. 이 소식이 상경으로 들어가면 황제 폐하께서 이 작은 사고(師姑) 때문에 웃겨 죽겠다고 하실 수도 있겠네요.”

자신이 기생집을 연 일에 대해 북제 성녀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는 건 범한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범한이 정색을 하며 말을 했다.

“강가 공사는 선행을 하는 일이에요. 타타도 알다시피, 내가 곧 시작할 유민 정착 작업도 선행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생집을 여는 게······ 역시나 선행을 하는 거란 걸 타타는 모르고 있어요.”

해당타타는 범한의 말이 너무나 미심쩍었다.

‘기생집은 여인들에게 억지로 그런 불쌍한 일을 시키는 거잖아. 그런 일이 선행과 무슨 상관이람?’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직업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살수, 하나는 기생이에요.”

범한이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더니 다시 등을 가리켰다. 해당타타에게 멈추지 말고 계속 등을 긁어달란 뜻이었다.

“그건 당신도 나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에요. 심지어는 내 어머니께서도 바꿀 수 없었고요······ 그 말뜻은 이 직업은 영원히 남아 있을 거란 거예요. 그렇다면, 아예 이 일을 영원히 내 손에 쥐고 있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것도 일련의 규정을 만들어서 그 불쌍한 여인들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해주면서요.”

앞서 말한 건 전생의 무협 소설가 구롱(古龍: 고룡)이 한 말로 과거 사천립을 설득할 때 했던 말을 다시 하는 것이었다. 범한이 엄숙하게 결말을 내렸다.

“내가 기생집을 여는 건 그 기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예요. 머리에 도덕은 이고 살면서 이 세상에 그런 일은 없다는 듯 두 눈 꼭 감고 상관도 않는 거야말로 진정 어진 마음이 없는 거고, 그 기생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거라고요.”

범한은 포월루를 경영하기 위해 내놓은 ‘신정(新政)’ 내용들을 해당타타에게 구체적으로 말해주었다. 예를 들어, 의원을 모시고, 매달 휴가를 주는 등에 관해서 말이다. 해당타타는 어느새 범한을 긁어주고 있던 손동작을 멈추고 살짝 놀란 사람처럼 범한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이 단순히 체면치레로 거짓말 한 게 아닌, 정말로 이런 일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범한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에는 해당타타의 얼굴에서 잠시 감탄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에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안지의 말이 일리가 있네요.”

“네?”

너무 의외의 반응이어서 범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해당타타에게서 진지하게 반응이 나오자 기분이 이상했다.

범한이 고개를 가로로 내저어 갑자기 연상된 슬픈 장면을 머릿속에서 내몰았다. 그리고 두서 없이 말을 툭 던졌다.

“타타, 미안해요.”

그러자 이번에는 해당타타가 생각지도 못하게 “네.”, 라고 답했다.

범한이 말했다.

“며칠 전, 우리 둘이 조금 싸웠잖아요. 그 후에 생각을 좀 해봤는데, 주로 내 문제 때문이었지만, 그래도 당신 문제도 있더라고요. 그래도 결국에는 내 문제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해당타타로서는 범한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상하다 못해 말 중간에 생뚱맞게 등장하는 말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북제 상경성 밖, 옛 길에서 범한이 해준 햇살 같았던 말이 곧 떠올랐다. 세계는 당신 것이고 내 것이란 이야기 말이다.

이에 해당타타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며 옅은 웃음이 지워졌다.

범한이 박수를 치며 해당타타의의 두 눈을 주시했다.

“사치스런 감정이겠으나, 나는 친구 간에는 솔직 하려 해요. 하지만 사실 당신에게는 충분히 솔직하지 못했으니, 그건 내 문제였던 거죠. 당신은 북제를 떠나 강남으로 온 후로는 날마다 그 많은 은전을 지켜봐야 했고,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해 걱정해야 했죠. 압박감이 컸을 테고, 마음이 편하지 않고, 기분이 예전만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그 압박감을 제대로 사그라뜨릴 수 없었겠지요. 이게 당신 문제였어요. 한데 당신도 압박감을 느끼고 있듯이 나도 나도 그래요. 그런데 그 압박감은 결국에는 내가 만든 것이니, 그 문제는 내 문제였던 거지요.”

해당타타가 입을 가리고 반짝이는 푸른 호수 같은 눈동자만 내놓고 웃기 시작했다.

살짝 어리둥절한 기분에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눈이 정말 예쁘네요.”

“네?”

두 사람 사이에서 세 번째로 “네.”라고 반응이 나온 것이었다.

그러자 범한이 껄껄껄 웃었다.

“타타에게도 어린 낭자 같은 구석이 있었군요······ 하지만 결국에는 오늘도 말해주지 않는군요. 대체 몇 살인지 말이죠.”

그러자 해당타타가 살짝 성이 난 기색으로 말은 않고 손만 휘휘 내저었다.

“화제를 돌리다니! 아까 내가 왜 요 이틀 동안 명씨 가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느냐고 질문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기생집 공사를 하느라 바쁘다고 답했고요.”

해당타타도 어색하기는 해도 농담을 할 줄 알았다.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어 보였다.

“그거야, 당연히 가장 중요한 문제라······ 하서비가 나을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에요.”

* * *

3월 26일 저녁, 소주 성 서쪽 일대에 황실 소금 상인 저택이 밀집한 지역에 홍등이 높이 내걸리고, 포죽 소리가 하늘 가득 울려 퍼져 즐거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동안 황실 금고 일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냈던 강남 수채의 대두목 하서비가 소주성 안에 정식으로 집을 마련하고 오늘 처음으로 손님을 맞는 것이었다.

사실 진정한 강남 거부는 소주성 밖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들은 물가 근처에 자신들만의 웅장한 저택을 가지고 있으면서 평소에는 그곳 장원에 머물다가 가끔씩 성 안에서 머물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모두 소주 성 서쪽 일대에 호화로운 거주지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고 집안의 실력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 서쪽의 땅값은 매우 비쌌고, 그 누구도 집을 팔려고 하지 않아 누구에게나 이곳에 들어와 살 자격이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하서비가 이곳에 자신의 저택을 마련할 수 있었던 건 황실 금고의 일을 맡게 되어 강남 지역에서 자격을 인정받아서였다.

물론 소주성으로 들어간 하서비는 과거의 모든 걸 깨끗이 털어내야만 했다. 얼굴에 암흑가의 흔적을 티끌만큼도 남겨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강남 수채 대두목 신분으로는 이곳에 입주할 수는 없었고, 이제 그의 신분은 하명기의 주인이었다.

하명기는 새로 연 상점이었다. 상점 이름에는 숨은 뜻이 있었는데, 축하 인사를 하러 온 상인들은 그 뜻을 다 알아보았다. 이에 그들에게 명씨 가문은 눈에 띄면서도 거슬리는 존재였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오늘 사람이 올지는 확실히 알고 있지 못했다. 명씨 가문의 주인 명청달 어르신이 그날 기절한 후 꼬박 이틀이 지나서야 깨어났고, 몸 상태가 엉망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마차 한 대가 하서비 저택 앞에 멈추었다. 온통 시커먼 색으로 아무런 표식이 없었다. 하지만 주변을 살벌하게 살피고 있는 호위 무사들과 거리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사람들 때문에라도 사람들은 마차에 타고 있는 자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하서비 저택 문 앞에 둘러 서 있던 상인들은 서둘러 다가와 마차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리고 한껏 친절하게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을 맞을 준비를 했다.

마차 안에서 범한이 3 황자에게 온화하게 말했다.

“마마, 정말로 구경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조금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자 3 황자가 귀엽게 활짝 웃었다.

“스승님께서 무얼 걱정하시는지 잘 알고 있어요. 하오나 스승님께서 하서비를 도와주러 오기로 하셨으니, 제자 한 사람이 더 추가된다 한들 별일 아니지 않습니까.”

범한은 잠시 웃고 말았다. 요 어린놈은 의 귀빈마마의 가르침을 한시도 잊고 있지 않고 어떻게든 자신과 함께하려 했다. 심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물리적 거리로도 말이다.

소주성의 두 귀인이 당당하게 마차에서 내리자 마차 밖에서 환호성과 인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 *

범한은 방안에 서서 새로 만든 책상을 손으로 만지며 코끝으로 전해오는 은은한 나무 향을 맡으며 생각했다.

‘이 세계는 다른 건 별로인데 새로 꾸민 서재에서 화학품 냄새가 안 나는 건 정말 좋아.’

순간 범한은 깜짝 놀랐다. 벌써 오랫동안 전생 세계에서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이 세계에 점점 적응하고 있는 것일 수도. 하지만 왜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갈망이 계속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하는 것인지. 그런데도 자신은 스스로가 뭘 갈망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다니.

대체 무엇 때문인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서비와 3 황자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 범한은 저도 모르게 자조적으로 웃어버렸다.

“명청성 자네는 아직 다친 몸이니 난 상관 말고 앉아 있게. 나는 자주 멍하니 있는 편이네.”

흠차 대인과 3 황자마마가 동시에 방문하자 먼저 축하인를 하러 와 있던 강남 상인들은 속으로 운 좋은 하서비를 부러워했다. 그리고 흠차 대인과 3 황자마마가 사람들의 이목을 꺼리지 않고 나타난 사실에 놀라워했다. 한데 두 사람이 나타난 것 때문에 상인들은 너무 시끌벅적하게 있을 수 없었다. 이에 앞뜰에서 흥겹게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원 서재에서의 대화를 방해할 정도로 떠들지는 않았다.

사실 범한의 등장은 하서비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를 따라 온 사람이 3 황자마마라니.

범한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강남에서는 자네와 나 사이 관계를 모두 알고 있다네. 경도에서도 아마 알고 있을 걸. 이왕 이렇게 된 거 감춰서 무얼 하겠는가?”

하서비가 3 황자를 잠시 바라보고는 작업장에서 나온 말이 생각나 피하지 않고 바로 말을 해버렸다.

“제사 대인, 소인이 대인을 번거롭게 해드릴까 두렵습니다.”

“무슨 번거로운 일 말인가?”

범한이 그를 바라보며 온화하게 말을 이어 갔다.

“자네는 조정을 위해 일하고 있네. 최근에 제법 멋져 보이기는 했어도, 실제로는 손해를 적지 않게 보지 않았는가.”

하서비는 그날 밤 죽은 형제들이 생각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친 건 좀 나았는가?”

범한이 물었다.

하서비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

범한이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다시 입을 뗐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명씨 가문과 관련해 내 태도는 굳건하네. 어쩌면 진도가 좀 느려질 수는 있어. 하지만······ 본관이 누군가의 태도에 속았다고 생각하지는 말게나.”

명씨 가문의 주인인 명청달이 황실 금고 저택에서 무릎을 꿇은 일과 낙찰 후 기절했을 때를 말한 것이었다. 이 일들은 이미 소주성 안팎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범한이 쥐고 있던 칼인 하서비는 바로 그 칼을 쥐고 있는 손이 걱정스러웠던 차였다. 갑자기 생각을 바꾸지는 않을까하고 말이다. 그런데 범한이 약속을 해주자 아직 상처가 낫지 않은 하서비는 저도 모르게 정신이 번쩍 났다. 복수, 명씨 가문을 되찾아 오는 일! 그에게 있어 이번 생의 가장 큰 염원이었다. 한데 범한의 도움이 없다면 영원히 이룰 수 없는 일 아니던가.

범한이 하서비의 표정을 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자네가 조정을 위해 일을 하니, 조정이 자네 뒤를 봐주는 거네.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자네가 본관의 사람이니 본관이 떳떳하게 세상 사람에게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 우리의 관계는 회피하거나 숨길 필요가 없어. 이제 자네는 강남에서 일을 하면서 북쪽으로 물건을 내다 팔 것이네. 그러니 이런 일이 있으면 모든 게 훨씬 수월해 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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