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명씨 가문 사람들이 먼저 물러나고 검사를 마친 상인들마저 황실 금고 저택에서 물러나자, 남은 건 관원들뿐이었다. 관원들은 황실 금고에서 해야 할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이왕 장사로 벌어먹는 거, 이들에게는 4할인 계약금 은표를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고관 세 사람은 응접실에 서서 호부와 전운사 관원이 기록을 기입하고 봉인 작업을 하는 걸 지켜보았다.
범한은 명씨 가문이 내놓은 마지막 400만 냥의 계약금 중 가장 아래에 끼워져 있는 두툼한 초상 전장의 은표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드디어 성공을 한 것이었다.
범한의 원래 계획은 마지막 묶음 네 개 항목에서 명씨 가문을 압박해 초상 전장이 써준 일람 출급 어음을 쓰도록 할 생각이었다. 한 차례 더 괴롭힐 생각이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초상의 신용이 천하 보다 떨어지지 않던가. 그러니 그때가 되면 황 내관과 곽쟁이 명씨 가문을 위해 무언가 말을 해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범한은 또 깔끔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한데 명청달이 이렇게나 속이 시원하게 결정을 내려주다니. 생각지도 못한 결과였다. 범한 역시 별것도 아닌 일에 계속 무언가를 덧대는 게 내키지 않았다. 한데 맨 마지막에 명청달이 기절한 건······.
“연기라. 계속 연기하라지 뭐.”
범한은 속으로는 싸늘하게 웃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동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옆에 있는 황 내관에게 탄식을 하며 말을 걸었다.
“명씨 가문이 어려운 가운데 낙찰을 받았군요. 명시 어르신이 연로해서 그런지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절한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이 있었는데, 장례나 치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황 내관은 긴장이 가시지 않은 채 은표를 바라보며 손을 비비고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흠차 대인의 말이 들려오자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손으로 ‘우드득’ 소리를 내며 욕을 할 뻔했다. 한데 차마 욕은 할 수 없어 속으로만 욕을 해댔다.
‘사람 가지고 놀아 놓고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 건 네놈 말고는 또 없을 거다!’
황 내관은 잔뜩 화만 난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곽쟁이 오히려 거짓 웃음을 지으며 입을 뗐다.
“올해 황실 금고가 벌어들인 돈이 과거보다 8할이나 늘었어요. 이 일이 경도로 알려지면 황제 폐하께서 분명 작은 범 대인에게 상을 내리실 겁니다. 왕이나 제후로 봉해질 가능성도 있을 걸요!”
범한의 신분과 지금 그가 지닌 권력을 보면 왕이나 제후로 봉해지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범한은 곽쟁의 알랑방귀가 듣기 싫어 싸늘하게 웃어 보였다.
“모두 대인들 덕분이고, 강남 상인들이 조정을 돌봐준 덕분이죠. 장사 밑천까지 손해 보면서 황실 금고를 도와준 것이니······ 본관은 이번 일에서 한 게 없습니다.”
곽쟁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
‘명씨 가문이 바지까지 전당 잡히게 된 건 네가 핍박해서 그런 게 아니더냐! 그러고도 이번 일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말할 낯짝은 있는 것이냐?’
곽쟁은 소리 내어 싸늘하게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는 계속해서 범한을 비난했다.
‘어디 계속해보라지! 계속 아닌 척 해보라고!’
* * *
“1황자마마께서 호마(胡馬)를 죽일 때 쓰신 동자선(銅刺線: 구리선의 일종)이 어떻게 발명된 건지 알아요?”
“네? 철로 만든 거 아니었어요?”
“차이가 큰 건 아니지요. 아무튼 알아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북제에는 동자선 같은 게 없었다. 그래서 북제의 군주와 신하들은 경국 황실 금고의 3 작업장에서 만든 군용 제품에 가장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오늘 한쪽이 알아서 이 이야기를 꺼내자 다른 한쪽인 낭자가 어렵사리 찾아온 기회에 기뻐하며 성실하게 답을 했다.
“몰라요.”
“그랬군요. 동선(銅線)이라는 물건은 끌어당기기가 힘들어요.”
부드럽고 나긋한 음성으로 탄식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강남 상인들이 동판 한 덩이를 훔치려고 고집스레 끌어당기다가 만들어진 거랍니다.”
원래는 재밌는 이야기였지만, 그가 말을 하니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이에 낭자도 잠깐 입가만 올렸다 내렸다.
그가 다시 물었다.
“사주에 있는 사호 제방에 강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뚫었는데, 어떻게 뚫었을까요?”
낭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의 농담에 장단을 맞춰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머리를 흔들며 정답을 말해주었다.
“강남 상인들이 동판을 제방에 있던 쥐 동굴에 떨어뜨려서래요.”
해당타타가 웃긴 이야기랍시고 말하고 있는 범한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이야기 인지는 알아들었어요. 그런데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런 이야기를 한 거죠?”
범한이 목에서 머리카락이 난 부위를 긁어댔다. 사사는 요 이틀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그래서 범한의 머리를 빗겨줄 때 너무 힘을 주고 있었다. 특히 뒤통수 쪽 머리카락을 너무 세게 당겨서 빗는 바람에 범한의 머리카락이 난 목 쪽에 붉은 반점이 올라와 있었다. 이에 범한이 목이 간지러워 긁적이며 말했다.
“상인에게는 인색함이 최고의 미덕이고, 이익은 영원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란 걸 이 두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지요.”
사실 이 이야기는 그가 전생에 들었던 유태인 이야기를 강남 상인으로 바꾸어 말한 것이었다. 한데 이야기는 강남 상인으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한 게 없었다.
범한이 해당타타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자기 등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방금 전 긁적이던 곳으로, 간지러운 부위가 계속 확장돼 빌어먹게도 등 정중앙까지 가려운 지경이 되어서였다. 범한은 자신의 잔재주를 동원해 그곳까지 손은 가져다 대기는 했지만, 그래도 썩 만족스럽지는 않던 터였다.
그래서 해당타타 쪽으로 몸을 돌려 자신의 등 가운데를 가리킨 것이었다.
해당타타는 범한을 잠시 노려보았지만 그녀의 손은 어느새 앞으로 나아가 옷 위쪽을 살며시 긁어주고 있었다.
범한에게 경묘 2제사를 가볍게 이긴 오묘한 손이 느껴졌다. 자신의 간지러운 곳을 천일도의 무상 심법으로 긁어주니 범한은 온몸이 노근노근해지는 것만 같았다.
“인색함은 상인들의 천성이에요. 그러니 명청달이 이렇게 살점을 잘라낸 건 의외의 행동이었어요. 더군다나 이익과 관련된 일이니, 내년에는 천주의 손씨 가문과 올해 떨어진 상인 가문을 위로해줘야겠지요. 그래서 당신 황제 폐하께 내년에도 기껏해야 올해 정도의 몫만 드릴 수 있고, 더 많이 드리는 건 정말로 힘들다고 말씀드려줘요. ”
해당타타는 긍정을 표하며 “응,”이라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바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명씨 가문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죠? 보아하니 명청달의 태도가 마음에 든 것 같던데요.”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진지하게 답했다.
“그의 태도가 명씨 가문의 태도를 대표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어요. 그날 밤 일은 아직 안 끝났고, 나도 이대로 관둘 수는 없어요. 명씨 가문은 오로지 경제적인 면에서만 피해를 입었어요. 이후 1년 동안은 황실 금고의 물건으로 그자를 압박해 계속 피를 흘리도록 할 수 있는데······. 그래도 명씨 가문은 아직 전체적으로는 건강한 편이에요. 내가 그들을 단번에 먹으려 해도 그럴 수는 없는 거지요. 그러니 강남에 있는 한 나는 그들의 살점을 도려낼 겁니다.”
잠식이란 단어가 있는데, 범한은 어쩌면 이런 의미로 말을 한 것이리라. 한데 해당타타만은 명청달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씨 어르신이란 자는 저자세를 취했는데도 범한이 추진하고 있는 강력한 계획을 통제할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자 범한이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해명을 했다.
“명씨 가문은 가만히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문제는 이번에 언 공자가 정한 계획이 최씨 가문을 대적할 때와는 다르단 거예요. 감찰원이 동원하는 수단은 모두 떳떳하지 못한 것들이에요. 반면 이번에 진행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경국 법률을 따르고 있어요. 다시 말해, 음지에서 벌이는 음모가 아니라 양지에서 실행하는 계획인 거지요. 실력 차이가 있으니 명씨 가문이 정면으로 반격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명청달이 순순히 양보해가며 분쟁을 불식시키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는 타타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에요. 시간을 소모해가며 경도에서 판도가 뒤바뀌기를 기다리는 중이지요.”
범한이 조금 전보다 무겁게 말을 이어 갔다.
“명씨 가문 입장에서는 경도 판세는 변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조정에 먹히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자 해당타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편안하게 기다리도록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군요. 안지는 경도에서의 국면이 변하기 전에 그들의 실력을 최대한으로 약화시키려는 거고요.”
“맞아요.”
범한이 무표정하게 말을 이어 갔다.
“모든 걸 규정에 따라 하고 있어요. 그래서 명씨 가문의 명성이 좋은 게 이해가 잘 되지도 않을뿐더러 이게 내 유일한 걱정거리에요. 황실 금고 전운사의 회계 장부에서도 아무 문제를 찾을 수 없는 걸로 보아 그들이 흔적을 지우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뜻인데······. 지금 그 섬에서 또 소식이 오지 않고 있어요. 마치 누군가가 그들을 도와 은폐해주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들은 겉으로는 온화하고 덕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큰 가문이에요.그러니 나나 감찰원이 너무 바짝 압박한다면, 명씨 가문은 과하게 불쌍한 척 할 테고, 그러면 어쩌면 강남 문인들과 백성들의 반발이 일겠죠.”
“안지는 다른 사람의 의견은 신경 안 쓰는 사람이잖아요.”
해당타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범한도 웃었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내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황제 폐하께서도 신경을 안 쓰시는 건 아니에요. 황제 폐하께서는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기고, 또 군주의 권위를 공고히 하길 바라세요. 그런데 정말 번거로운 일이거든요. 그런 게 아니라면, 조정에서 명씨 가문을 직접적으로 제거해 버릴 방법이 널리고 널렸는데 지금껏 손을 쓰지 않을 리 없겠죠? 그러니 천하 사람들 마음에 천자가 박덕하고, 조정이 음흉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역사에 떳떳하지 않은 기록이 남는 게 걱정되어서 그러시는 거겠지요.”
“경국 황제 폐하께서는 그런 분이셨어요?”
해당타타가 궁금해 하며 물었다.
“날 믿어 봐요.”
범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서는 명예를 추구하시는 분이세요. 그게 아니라면 전에 상서로운 일들이 일어났을 때 북제의 황제께 공공연히 노기를 드러내실 필요는 없었겠죠······ 이번에 황제 폐하께서 나를 강남으로 보내 명씨 가문을 거둬들이도록 한 건 내가 일처리를 아주 깔끔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명씨 가문을 밟아 죽여 버리는 동시에 나쁜 평판을 만들지 않으니까요. 만약 그때 강남의, 더 나아가서는 천하 백성들이 명씨 가문 일 때문에 불평을 드러낸다면······ 경도에 있는 세력들이 다시 소란을 피우겠지요. 그러면 아무리 황제 폐하께서 내가 앞잡이 검둥개가 되기를 바라신다 해도 그분도 어쩔 수 없이 나를 경도로 불러들이셔야 할 거예요.”
“그럴 생각이면, 황실 금고 공개입찰로부터 나흘이나 지났는데 당신은 왜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 한 건데요?”
해당타타가 궁금해했다.
범한이 웃으며 답을 해주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했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포월루 일은 그래도 제법 마음을 쓰고 있다고요.”
갑자기 포월루가 툭 튀어나오자 해당타타는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