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정오가 되고, 황실 금고의 입찰도 잠시 일단락되었다. 소주부와 전운사 소속 아속들이 각 대인들과 상인들이 먹을 식사를 내왔다. 거부들에게 관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집에서 먹는 음식보다 못했다. 하지만 상인들은 식사를 맛있게 하고는 의기소침해져 있는 천주의 손씨 가문 사람 옆으로 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었다.
모두들 오후에 있을 최후의 결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에 이미 은전 5백만 냥이라는 가공할만한 금액이 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오후에는 얼마나 더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어줄 일이 일어날지 모두들 기대하는 중이었다.
명청달이 아무 소리도 않고 정당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명청달은 고관들이 식사하고 있는 편청으로 걸어 들어가 싫은 기색 없이 미소를 지은 얼굴로 말을 건넸다.
“황 내관과 곽 어사를 뵈옵니다. 이 늙은이 흠차 대인께 드릴 말이 있어 그러니 두 분께서는 편의를 좀 봐주시지요.”
황 내관과 곽쟁은 순간 깜짝 놀랐다.
‘이건 대체 무슨 일이지? 설마 명씨 가문이 내 앞에서 범한 편으로 들어가려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할리가······.’
명청달은 오랫동안 명씨 가문을 맡아 왔고, 조정의 높은 관리들과 왕래가 있는 편이라 스스로 위엄을 갖추려 노력했다. 황 내관과 곽쟁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웃는 얼굴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명청달을 굳게 믿고 있던 지라 범한과 단 둘이서 말할 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 * *
편청에 있던 다른 이들이 물러나자 명청달이 힘겹게 앞섶을 젖히고는 범한 앞에 말없이 꿇어앉았다.
그런데 범한은 한 손에는 밥그릇을 다른 한 손에는 젓가락을 쥐고 차려진 음식 중에서 뭐가 맛있을지 고르기나 했다. 그리고 명청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상태에서 몇 마디 해주었다.
“다음에 진행될 네 개 항목은······ 본관이 가져갈 생각입니다.”
범한의 젓가락이 쟁반 위를 이리저리 헤집더니 기름기가 좔좔 도는 쇠고기를 집어 밥 위에 올렸다. 범한은 그것을 천천히 입으로 넣더니 꼭꼭 씹어 맛이나 음미 할 뿐 자기 옆에 꿇어앉아 있는 명청달은 상대도 하지 않았다.
명청달은 비범한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무릎을 꿇었다는 건 절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범한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을 마친 범한이 들고 있던 밥그릇과 젓가락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명씨 어르신, 당신은 저보다 한참 윗 연배십니다. 이러지 마시지요.”
범한이 슬쩍 부축하는 척을 하자 명청달도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관리와 상인 간 대화는 매우 차분하게 가라앉은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범한이 명청달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어르신께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러 오셨습니까?”
대체 어떤 말을 해야 범한 부하들의 목숨값을 치를 정도가 될까? 어떻게 말해야 범한이 명씨 가문을 놔줄까? 명청달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알지 못했을뿐더러 알 필요도 없었다. 그는 오로지 범한이 명씨 가문을 잠시 놔주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가문과 경도 쪽을 위해 어떻게든 충돌을 완화할 시간을 벌 필요가 있던 것이었다. 현 상황이 불투명하니 줏대 없는 사람이 되어서라도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올지 알아내야 했던 것이고······.
그러니 그는 행동을 취해 구걸을 하는 중이었다. 흠차 대인이 조금이나마 자신의 숨통을 트여주고, 자신들을 믿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는 흠차 대인이 자신들 쪽으로 기울었으면 하는 강한 바람 때문이기도 했다.
범한은 심계가 깊은 명씨 어르신이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성의가 없으니, 항복을 해도 다 부질없는 행동입니다.”
명청달이 차분한 표정이었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흠차 대인께서는 제가 못 미더우시겠지요.”
“못 미더워서 그런 게 아닙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스스로도 자신을 믿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 배에 너무 오래 있었으니, 내려오려면······ 어렵겠지요. 지금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알 겁니다. 아직도 그 배에 타고 있을 생각이라면, 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언제든 당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려 하겠지요. 그런데도 본관의 배에 탄다면, 예전 배에 두고 온 물건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범한이 언급한 물건이란 게 실물로 된 물건이 아님을 명청달은 알고 있었다. 이에 젊은 흠차 대인을 설득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그는 피곤한 기색을 내보이며 자조적인 자세로 부탁했다.
“대인, 부디 제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십시오.”
그러자 범한은 탁자 위에 놓인 맛깔스러운 음식만 바라보며 생각을 해보다가 잠시 후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형제가 많던데, 최근에 듣자 하니······ 을열 여섯 번째 방의 하 당주와 형제라면서요?”
명청달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속이 쓰렸다. 명씨 가문은 범한의 적(敵)을 따른 지 너무 오래 되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명씨 가문이 정말로 범한을 따르려 한다는 걸 믿도록 만들려면, 그에게 가문의 통제권을 완전히 넘겨주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하서비는 분명 범한이 명씨 가문을 통제하기 위해 쓰는 말이지 않던가. 그러니 다른 사람으로 바꾼다면 범한은 이 협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조금 전 범한의 말은 분명 명청달 자신에게 조건을 제시한 것이었다. 다만 그 조건이란 게 명청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명청달은 가문의 사업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하서비의 얼음장 같은 눈빛과 옷에 가려져 있는 처참한 채찍 자국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했다.
현 상황에서 공격하는 쪽은 감찰원이고, 방어하는 쪽은 명씨 가문이었다. 더군다나 명씨 가문은 퇴보를 거듭하고 있었다. 오늘 황실 금고의 입찰 가격이 크게 오른 건 향후 줄줄이 일어날 일의 서막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제 곧 명씨 가문은 폭풍우를 맞아 흔들릴 것이다.
이 순간, 명청달은 깨달은 게 있었다. 이 젊은 흠차 대인이 원래는 뼛속 깊이 보수적이고, 신중하며, 가혹하고 음험한 자란 사실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제시한 거대한 유혹에 전혀 흔들림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제야 명청달은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것보다 범한이 훨씬 더 많은 걸 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40만 냥으로 그칠 일이 아니었다. 향후 명씨 가문이 강남에서 암암리에 협조해야 하는 것에서 그칠 일도 아니었다. 오만하게도 범한은 황실 금고의 사업과 생산에 관한 모든 걸 통제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대인 부디 살길을 내주십시오.”
명청달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는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달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는 살길을 내달라는 말밖에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후반부의 네 항목도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제 가문의 만여 명의 식솔과 고용된 무수한 종들이 내년에는 굶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명씨 가문에서 은전이 부족할 리 없지요.”
자기 앞에 있는 명씨 가문의 주인을 보고 있던 범한은 상대가 갈수록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협박하고 있기는 했지만, 부드러운 방식으로 자신을 한껏 낮추고 있어 귀에 거슬리지도 않을뿐더러 유순하게 들려서였다.
“이따가 진행될 네 개 항목은······ 명씨 가문이 몇 년 동안 꿀꺽한 은전을 토해 놓는 셈 치면 됩니다.”
범한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패색 짙은 명청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명씨 가문 주인이 속으로 어떤 계산 중인지 쉼 없이 따져보았다.
“본관이 과거에 어떻게 했는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동안 당신이 물건을 팔아치우던 수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물론 본관은 무조건 억지를 부리는 비적은 아닙니다. 그러니 그쪽에서 일처리를 타당하게 한다면 본관도 자연스레 그리 할 것입니다.”
타당한 일 처리란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지적한 것이었다.
범한이 젓가락 끝으로 도자기로 된 접시 가장자리를 내리쳤다. 날카롭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범한이 마지막으로 말을 이었다.
“밥그릇을 잡을 때는 용이 토해낸 여의주를 잡듯이 하고, 젓가락질을 할 때는 봉황이 부리로 쪼듯이 해야 하며, 밥을 8할 먹었는데 배부르면 남은 건 싸가야 하지요······ 사람의 도리와 일을 하는 방식은 모두 밥 먹는 것과 같습니다. 자세가 멋져야 할뿐만 아니라 분수에도 맞게 행동해야 해요. 그게 제일 좋은 거랍니다.”
명청달은 여기에서 계속 흠차 대인과 이야기를 해봤자 무슨 진전이 있지는 않을 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범한의 마지막 말에 그래도 마음이 조금 편해진 건 있었다. 전부 믿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범한이 명씨 가문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갈 생각은 아니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생겼다. 범한은 명씨 가문을 무너뜨리려 한다기보다는 오로지 통제할 생각뿐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거대한 명씨 가문을 통제하려면······ 하서비도, 어머니도 아닌 명청달 자신이어야 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 묶음 네 개 항목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흠차 대인과 협의할 게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상인은 본디 협의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흥정이 특기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명청달은 범한에게 매우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명씨 가문의 현 주인은 살짝 몸을 굽힌 채 밖으로 나갔다. 그의 늙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범한이 젓가락을 탁자 위에 놓고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명청달의 심계가 대체 얼마나 깊은지 아직 가늠이 되지 않아서였다.
아까 명청달이 무릎을 꿇은 건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패배의 인정? 화친 요구? 항복? 어젯밤 일에 대한 보상? 만약 명씨 가문이 정말로 범한에게 기울 의향이라면 오늘 황실 금고라는 광명정대한 장소는 오히려 속마음을 가장 드러내기 가장 좋은 장소인데······.
문제는 저 어르신이 자진해서 항복했다는 사실을 범한은 아예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아직 패를 다 꺼내 보이지 않았고, 명씨 가문도 아직은 끝까지 온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건너편 기슭에 있는 거대한 나무를 뽑아다가 자신이 있는 쪽 기슭에 이식하려면, 반드시 고통스러운 대가가 따라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명씨 가문은 그런 건 원치 않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상대방은 왜 이렇게 비굴한 모습을 보인 걸까? 그의 위에는 아직 큰 노마님이 있었고, 명씨 가문의 선택은 만여 명에 이르는 가문 사람과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명청달은 분명 독단적으로 결정을 할 능력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에 무릎을 꿇은 건 은밀히 진행된 일이 아니었으므로 분명 누군가가 봤을 게 뻔하고, 또 바로 소문이 날 것이었다. 범한은 눈을 더 가느다랗게 떴다. 설마 동정표를 얻으려고 한 짓이었나? 동정표 구하기는 나름 해볼 만한 방법이었다. 일부러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범한 자신에게 무릎을 꿇었으니, 대체 얼마나 불쌍해 보였을까?
만약 명청달이 다른 관원 앞에서 이와 같은 행동을 했다면, 그 관원은 분명 속으로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은 생각이 달랐다. 명청달이 예상했던 것처럼 범한은 너무 많은 걸 원했다. 그것은 명씨 가문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일을 위해 무척 오랫동안 준비해 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범한은 명씨 가문을 통째로 먹어버리기를 원했지 명씨 가문의 투항을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어찌되었든 범한은 언제든 명씨 가문을 먹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무엇 하러 명씨 가문과 이런 저런 흥정을 하면서 상대방의 투항을 받아줄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닌, 그냥 그럴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