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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21화 (421/1,108)

421화

이날 밤, 많은 사람이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또 여럿은 바삐 움직였으며, 심지어 일부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듯 소주성에서 큰일이 터졌지만, 황실 금고 봄 입찰의 둘째 날은 예정대로 찾아왔다.

규정이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 예전부터 지켜오던 규정 말이다.

그래서 황 내관과 곽쟁이 소주성의 방어 문제와 하서비 자객 사건을 이유로 전운사에게 입찰 날짜를 며칠 뒤로 미루자고 요구했지만, 범한은 단호했다. 제 시간에, 그것도 일각도 늦어서는 안 된다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주장했다.

명씨 가문은 이미 하룻밤이란 시간을 벌지 않았나. 그러니 그들에게 더 대응할 시간을 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범한은 줄지어 들어오는 상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피곤한 기색을 억지로 감추기 위해 지끈거리는 미간을 연신 문질러댔다. 강남 거상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하지만 범한에게는 그들 눈동자에 섞여 있는 기이한 감정이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하서비가 자객을 만난 일 때문에 저들도 큰 곤욕을 겪은 것이었다. 그런데 범한은 이러한 변화가 자신의 계획에 호재로 작용할지 아니면······ 악재로 작용할지 아직은 섣부르게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명씨 가문의 부자는 끝에서 두 번째로 황실 금고 저택 정원으로 들어왔다. 뒤따라오던 명씨 가문 심부름꾼과 회계 담당자는 한껏 온화한 얼굴로 사방에 예절 바르게 인사부터 건넸다 그러자 관원과 상인들의 눈동자가 그들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범한 앞에서 명씨 가문에게 과하게 친한 척을 할 수 없었다.

명씨 가문의 부자가 정당 앞에서 인사를 올리자 황 내관과 곽쟁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화답을 해주었다. 그들에게 지지 의사를 분명히 표한 것이었다. 범한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며 어서 자리에 들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지만, 눈빛만큼은 싸늘했다. 명청달의 눈빛이 매우 기괴했고 무척이나 차분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명청달은 어젯밤에 일어난 하서비 자객 사건 때문에 보복 당할 걸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대문이 닫히기 전, 강남 수채 사람들이 당도했다.

하서비 뒤에는 범한이 보내준 호부의 나이 많은 관원 외에도 호위 무사 셋이 더 있었다. 호위 무사가 셋 밖에 없었던 건 나머지 형제들이 어젯밤에 강남거 앞 큰길에서 목숨을 잃어서였다.

하서비는 안색이 창백했다. 중상을 입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오늘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 걸려 있어 억지로라도 참석한 것이었다.

몸에 두른 붕대와 대조적으로 이마에 묶은 흰 띠는 눈에 거슬릴 정도로 새하얬다. 한데 그의 뒤에 있던 부하들도 머리에 흰 띠가 두르고 있어, 이들은 봄날에 눈발이 날리는 것 같은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누군가가 상복을 입고 황실 금고에 들어온 건, 몇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저택에 내 모든 이의 이목이 상복을 입고 온몸에서 살기를 내뿜고 있는 을열 여섯 번째 방 도적들에게 쏠렸다. 영남의 웅씨 가문과 천주의 손씨 가문을 필두로 한 상인 몇몇이 방에서 나와 하서비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지막한 소리로 안부의 말을 전했다.

하서비는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정당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첫 번째 방에 앉아 있는 명씨 가문 부자(父子)는 본체만체하고는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하 아무개, 그래도 왔습니다.”

순간 홍 내관과 곽쟁의 낯빛이 조금 이상해졌다.

범한은 눈가가 실룩였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는 오른손을 뻗어 차분하고 강단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기만 한다면야, 여기에 자네 자리는 계속 있을 거네.”

모두들 범한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황 내관과 곽쟁은 이 말을 가지고 범한에게 이래라저래라 말참견할 수 없었다. 오늘 강남 총독 설청은 와병으로 불참한 상태였다. 그러니 황실 금고 저택 내부에서 제일 고위급 관원은 범한이었다. 다시 말해, 설청이 범한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빠져준 것이었다.

하지만 명씨 가문의 뒷배들은 모든 국면이 범한에 의해 좌우되도록 놔둘 수만은 없었다. 이에 황 내관이 살짝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뗐다.

“하 선생, 소주성에서 강호인 살인 사건이 일어나 귀하의 부하들이 적잖이 해를 입었다고 들었네······ 허나, 그렇다고 상복을 입고 황실 금고에 온 건 예에 맞지 않는 행동이군.”

하서비는 신분 자체가 내세울 게 없는 이였다. 그래서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이 군산회 고수에게 그를 죽여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하서비가 살수의 손에 죽었다면, 많은 문제가 해결됐을 게 뻔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일을 단순히 강호인들 끼리 서로 공격하고 싸운 걸로 몰아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 황 내관이 말을 한 건 이와 같은 점을 명확히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범한은 상대방이 형식적인 걸 가지고 일일이 따지는 건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복을 입고 온 게 예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는 황 내관의 말에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나지막하게 말하고 말았다.

“황 내관, 본관의 화를 그만 돋우시지요.”

자그마한 소리로 한 말이었지만 마치 땅속 깊은 곳에 있던 음성이 빙산의 갈라진 틈을 타고 튀어나온 것 같아······ 너무나도 차갑고 음험해 듣는 이를 부들부들 떨게 만들어 버렸다.

‘본관의 화를 그만 돋우시지요.’

이 말은 황 내관의 귀를 파고들어갔다. 그리고 이 늙은 내관이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며 얼른 입을 다물도록 만들었다.

‘저 천벌 받을 우라질 놈이 애처럼 고집이나 피우지 않게 하려면 하서비부터 후딱 보내줘야겠군! 어찌되었든 명씨 가문은 밤새도록 방책을 세웠잖아. 이따가 내가 살펴보기만 한다면야 문제가 일어날 리는 없겠지. 이런 상황에서 범한이 트집이라도 잡아 갑자기 버럭 화라도 내버리면 저 놈을 진정시킬 사람도 없잖아!? 일단 대사를 그르치지 않는 게 우선이야!’

옆에 있다가 한마디 하려던 곽쟁도 순간 심장이 오그라들어 내뱉으려던 말을 서둘러 삼켜 버렸다. 어젯밤에 이들은 크게 진노한 범한이 인정사정없이 손을 쓸 거란 생각에 상주문을 써서 나름의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바로 범한의 약점을 잡을 준비였다.

한데 이들의 생각과 달리 범한은 줄곧 차분했다. 이에 황 내관과 곽쟁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대체 언제 폭발할지는 모르겠지만, 범한은 마음속의 사악한 불길을 꾹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곽쟁은 순간 범한의 손에 거꾸러진 상서 대신들이 떠올라 일단은 뒤로 물러섰다. 장 공주께서 지키려는 건 명씨 가문의 몫이지 명씨 가문의 체면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 * *

또 폭죽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황실 금고 저택 밖에 종잇조각이 어지럽게 날리고 먼지가 자욱하게 깔렸다.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지금 이 광경이 무언가 익숙하게 느껴져서였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작년에 북제 상경에서의 그날이 떠올랐다. 장묵한 대가의 서거 소식을 듣던 그 순간, 그리고 그날 말이다. 상경성 밖에서는 사절단을 배웅하는 예포가 터졌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장묵한 대가를 배웅하기 위한 것 같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오늘 울린 폭죽은 어젯밤에 죽은 이들을 배웅하기 위한 것일까?

하서비가 침묵 속에서 부하들을 이끌고 을열 여섯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후 머리에 둘렀던 흰 띠를 벗어 조심스레 탁상 위에 반듯하게 펼쳐 놓았다. 뒤에 있던 형제들 역시 큰형님을 따라 흰 띠를 벗은 후 절도 있게 그것을 한 줄 한 줄 탁자 위에 반듯하게 펼쳐 놓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범한의 눈가에 알 듯 말 듯 하게 살짝 주름이 잡혔다.

황실 금고의 의례 진행자 관원이 다시 돌계단 위로 올라가 둘째 날 입찰 개시를 정식으로 선포했다.

어제 모두 5개의 항목이 낙찰되었다. 황실 금고에서는 모두 16개 항목에 대해 입찰을 진행했다. 맨 마지막에 두 개로 묶어서 진행하는 8개 항목을 제외한 3개 항목이 먼저 입찰에 들어갔다.

이윽고 진행자가 이 3개 항목의 입찰 개시를 알렸다.

명씨 가문은 강남 상인들 간의 약속에 따라 가격을 부르지 않았다. 한편 하서비는 어제 저녁에 당한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듯 침착하게 가격을 내놓았고, 셋 중 하나를 낙찰 받았다. 나머지 두 개는 영남의 웅씨 가문과 항주의 진씨 가문에서 가져갔다. 모두 어젯밤에 강남거에서 상의한 대로 한 것이었다.

하서비가 낙찰 받은 건 어제와 마찬가지로 북제로 가는 항목이었다. 응접실에서 가격을 확인한 범한은 하서비가 낙찰 받을 걸 확인하고는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하서비가 감정적으로 일처리를 하지 않아 기뻐서였다.

세 개 항목의 호가 경합은 특이할 것 없이 평범하게 진행되었다. 낙찰가도 작년과 거의 비슷한 수준에서 결정 되었고, 누구 하나 놀라게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현장에 있던 모든 상인과 관원들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두 다 알다시피, 오늘 가장 중요한 항목은 뒤에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바로 명씨 가문이 어떻게든 확보하려는 8개 항목 말이다.

* * *

“동쪽과 남쪽, 해로(海路)로 보내는 2 작업장에서 나온 물건으로 모두 네 개 항목이오. 가격을 제시하고, 최고가를 쓴 상단에게······ 낙찰······ 되오.”

황실 금고 전운사 관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계단에 서서 소리쳤다. 대체 몇 번을 외쳤는지 모르겠지만, 매년 이 말이 터져 나오면 가격을 써내는 건 명씨 가문뿐이었다. 아무도 명씨 가문 것을 빼앗아 올 생각을 안 해서 그런지, 관원의 말투는 무미건조하고 전혀 흥이 올라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시작을 알리는 말이 떨어진 후 가장 먼저 소가죽 봉투를 건넨 건 을열 여섯 번째 방이었다.

저택 내부에서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소문에 명씨 가문에서 버린 7 공자란 하서비가 드디어 그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어서였다.

갑열 첫 번째 방에 있는 명청달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예견했다는 태도였다. 과거 몇 년 동안은 명씨 가문의 강력한 실력과 장 공주의 보살핌으로 강남로 상인들은 감히 그에게 맞서 가격을 써낼 수 없었다. 그래서 명씨 가문이 뒤쪽 8개 항목을 최씨 가문이 앞쪽 6개 항목을 나눠 가지며, 두 집안이 판을 휩쓴 것이었다.

계속 독무대를 하다보면 결국에는 물리기 마련 아닌가. 그래서 오늘 드디어 누군가가 명씨 가문과 한 판 붙으러 나서자 명청달은 경계하는 와중인데도 저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명청달이 웃는 얼굴로 옆에 있는 아들에게 말을 건넸다.

“2할을 더 얹어서 찍어 눌러 버리자.”

명란석이 대경실색했다.

‘아버지의 말씀은 첫 번째 호가에서 작년 낙찰 가격보다 2할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하란 뜻인 거야? 하서비가 정말로 은전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서 2차 호가 경합에서도 우리를 계속 따라오면 어쩌지? 우리가 과연 그걸 당해낼 수 있을까?’

명청달이 옆에 있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느긋하게 말했다.

“2할 더 얹은 건 하서비가 아닌 다른 사람을 누르기 위해서란다.”

명란석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오늘 황실 금고 저택에서 하서비를 지원해주고 있는 흠차 대인 말고 대체 또 누가 우리 집안과 입찰 경쟁을 하려는 거지?’

이 명씨 가문 도련님은 아직도 굳건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서비의 저력은 범한이 호부에서 사적으로 조달해 온 은전에서 나오는 것임을. 그러니 다른 사람은 그럴만한 실력이 없다고 말이다.

한데 명청달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만큼은 맑은 거울 같았다. 그래서 범한이 어제 하서비에게 이것저것 대량으로 판매권을 사들이게 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강남의 상인들을 굶주린 늑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굶주린 늑대는 누구든 물어뜯고 보게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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