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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17화 (417/1,108)

417화

강력한 진동 때문에 하서비는 양 콧구멍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양손으로 몸 앞을 막고 있었으며, 한껏 겁에 질린 표정으로 삿갓을 쓴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넓은 길 건너편에 있던 광폭한 칼날이 하서비에게 다가왔다. 칼날은 그 와중에 한 사람의 몸을 베어버리고 하서비에게도 내상을 입혔다. 9등급 고수에게서나 볼 수 있는 가공할만한 경지였다. 그런데 강남에 이런 절정의 고수가 있었던가?

폭주한 칼날은 인정사정없이 밤하늘 찌르고 베었다. 그리고 잠시 고요가 찾아온 순간, 사람들은 그제야 삿갓을 쓴 자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삿갓을 쓴 자는 키가 컸고, 칼자루를 쥔 채 온몸에서 엄격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칼날은 눈처럼 새하얗게 빛났고, 칼자루는 유난히도 길었다. 마치 연극이나 전장에서나 볼법한 기다란 칼이었다. 길이가 족히 8척은 되어 보여, 조금 전까지 그걸 어떻게 몸 뒤에 숨기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이 모든 건 찰나의 시간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하서비는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사력을 다해 칼을 막은 것이었다.

한데 눈을 깜빡 한 사이 무서운 일이 하나 더 일어나 있었다. 삿갓을 쓴 자 옆에 있던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모두 하서비 자신을 죽이러 온 자들이었으니, 사라진 두 사람이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사실 삿갓을 쓴 사람이 몸 뒤쪽에서 장도를 뽑고 길 맞은편을 향해 용맹하게 뻗어 나올 때, 옆에 있던 나머지 두 고수도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들은 스르륵 움직여 거리에 있던 강남 수채의 장정 하나를 제쳤다. 그런 후 제비처럼 우아하고 매끈한 곡선을 그리며 어둠 속에서도 쏜살같이 하서비가 있는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들은 장도와 함께 날아올랐다.

만약 의외의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아직 경황이 없던 하서비는 벌써 죽었으리라. 하서비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건, 그가 가까스로 칼날을 막았을 때 길게 뻗은 거리 위에서 새로운 변수가 나타난 덕분이었다.

강남 수채 장정들이 하서비 옆으로 다가가 막아설 때였다. 이들 중 네 사람이 매우 괴이한 움직임으로 양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두 고수가 양쪽에서 제비처럼 빠른 속도로 스치고 지나갈 때, 사람 넷이 손바닥을 뒤집어 긴 도포 아래에 숨겨 두었던 쇠꼬챙이를 꺼내 들고는 내질렀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일격은 두 고수의 복부 음부 쪽을 정확히 파고들었고, 이에 고수들은 어쩔 수 없이 피해야만 했다. 이들 넷은 다름 아닌 범한이 오늘밤 급히 파견한 6처 검수들이었다.

6처 검수의 실력은, 어쩌면 오늘 밤 사람을 죽이러 온 고수들 보다 떨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판세를 읽고, 상대가 살인을 위해 접근하는 경로를 판단하는 능력에 있어 검수들은 타고나게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그들은 연합 공격을 펼치려던 제비 두 마리를 막을 수 있었다.

작고 날카로운 소리가 순식간에 수도 없이 울렸다. 강남거 앞 큰길에서 소리가 연속해서 들려왔다. 봄을 맞아 풍광이 수려해진 소주성에 갑자기 자잘한 우박이 쏟아진 것마냥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비처럼 날렵한 두 고수는 양손에 단도를 쥐고 있었다. 독이 발린 칼날은 달빛을 맞아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6처 검수들은 손에 쇠꼬챙이를 쥐고 있었다. 쇠꼬챙이 위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고 어둠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수도 없이 끄응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찰나의 시간 동안 이루어진 일이다 보니 그 모든 소리가 마치 동시에 새어 나온 것처럼 들려왔다.

하서비를 죽이기 위해 접근했던 두 고수는 비틀거리며 길가 반대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의 옷은 쇠꼬챙이에 찔려 수십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깊게 찔린 곳은 피부도 찢어진 것처럼 보였다.

물론 6처 살수들도 이번에는 처참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한 사람은 왼손을 여러 차례 칼에 베어 뼈가 드러나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은 어깨에 칼을 맞아 피범벅이 되어 낯빛이 갈수록 괴이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피가 흥건한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잠깐 마주했을 뿐인데도 서로에게 되돌릴 수 없는 손실을 입혀 놓았다. 자그마하게 소리가 몇 번 울렸을 뿐인데, 대체 그동안 어떤 험악한 일이 벌어졌던 건지.

하지만 심하게 중상을 입고도 6처 검수들은 끄응 하는 소리를 두 차례만 냈을 뿐이었다. 과연 일반적인 강호 인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굳은 의지의 소유자들이었다.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세 사람은 3처가 처방해준 해독용 환약을 먹고 뒤로 물러나 방어선을 조밀하게 짰다. 어떻게든 하서비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 * *

맞은편으로 퇴각한 제비 두 마리는 자신들에게 상해를 입힐 정도의 실력을 지닌 전문적인 살수가 하서비 곁에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는 눈치였다.

두 사람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저들이 감찰원 사람인 걸 알아챘다는 의미였다. 감찰원의 독약은 가공할 위력을 지녔다는 걸 모두 알고 있던 터였다. 더군다나 비개 선생이 직접 만든 독약이니 누가 막을 수 있으랴.

이에 두 사람은 깔끔하게 자리를 떠버렸다. 발끝으로 담벼락을 밟아 어둠으로 물든 공중으로 뛰어오르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모두 강호 무림의 진정한 고수요, 살수였다. 오늘 하서비를 죽여 달라는 부탁을 받아 이곳까지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기에서 소중한 목숨을 묻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저 멀리 밤이 내려앉은 작은 골목에서 자그마한 소리가 한 차례 들려왔다.

* * *

길 맞은편에 서 있던 세 명의 고수 중 둘이 떠났다. 하지만 하서비는 자신의 상황이 호전됐다고 여길 수 없었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큰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양쪽에서 당당당, 하며 전투 소리가 울려 퍼질 때 그 칼이, 연극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장도가 다시금 자신을 죽이기 위해 공격을 해와서였다.

그 칼날에 맞선 적은 일합도 버텨내지 못하고 사지육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죽어버렸다.

칼날은 눈발을 흩날리듯 움직였다. 그리고 존경스러우리만치 용맹하게 맞서는 수채 장정들의 사지와 머리를 자르고 분해해버렸다. 칼날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피가 솟구쳤고 잘려나간 몸뚱이는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이렇게 칼날은 점점 하서비를 향해 갔다.

거리에서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형제들이 하서비의 눈에 들어왔다. 영혼까지 얼어붙게 만들 칼날 휘두르는 소리와 비명 소리. 진하고 비릿한 피 냄새. 그리고 형제들의 피를 밟으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삿갓을 쓴 고수. 하서비는 고집스레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자가 순간 마귀처럼 보였다.

하서비의 마음은 꽁꽁 얼어붙어 버렸지만, 피만은 들끓고 있었다. 두 눈이 찢어져라 크게 부릅뜨고 있는 하서비. 앞으로 나서서 형제들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은 굴뚝같았다. 저 삿갓을 쓴 고수와 거하게 한 판 싸울 수만 있다면, 저 칼에 죽어버려도 그만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이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슬프게도 그의 몸은 뒤로만 후퇴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강남거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자신을 죽이러 왔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은 매우 쓸모가 많지 않은가. 복수하려면, 적을 제대로 먹고 자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러려면 자신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설령 그게 굴욕적인 방법일 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삿갓을 쓴 사람은 하서비와 겨우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때 다친 6처 검수들도 드디어 하서비를 구하기 위해 제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다친 몸으로는 삿갓을 쓴 고수의 경천동지할 검의 기세를 이겨내지 못했다. 쇠꼬챙이는 여러 조각으로 잘려 나갔고, 세 사람은 그 충격에 날아가 버렸다.

강남거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하서비가 섬돌 위로 뛰어 올랐다.

그러자 건물 입구에 있던 일꾼과 식객들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 허둥대며 비명을 질러댔다. 피 튀기는 끔찍한 장면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서서 도망가지 못했다.

삿갓을 쓴 고수는 아직 돌계단에서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가 칼을 내리치자 검의 기운이 하서비의 등으로 돌진했다.

그러자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선 식객이 강남거의 아름다운 대들보에 몸을 기댄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몸을 떨던 식객이 쇠꼬챙이를 꺼내들고는 삿갓을 쓴 고수의 대퇴부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했다. 키가 큰 삿갓을 쓴 고수는 위세가 대단했다. 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6처 검수는 이번 공격으로 하서비를 구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없었다. 그런데도 하서비 앞으로 다가온 검의 기운을 깨버리고 대퇴부를 공격한 건 그자의 급소를 찌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삿갓을 쓴 고수가 검수의 공격을 보지 못했는지 칼을 계속 아래쪽으로만 내리쳤던 것이었다.

이에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쇠꼬챙이가 고수의 대퇴부에 박혔다. 그런데 사람 피부가 아닌 무슨 철판에 꼬챙이가 꽂히는 것과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6처 검수는 순간 가슴이 서늘했다. ‘철포삼(鐵布衫)’이라는 미련한 무공을 연마한 자가 강호에 더는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철포삼을 연마해놓고도 검수의 쇠꼬챙이를 피하지 못하다니. 이건 그가 철포삼을 연마하기 위해 십 년이나 공을 들였어도, 전부 헛짓거리나 한 거란 의미였다. 이 무공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남녀 간의 환락과 욕구를 모두 끊었을 텐데 말이다.

6처 검수는 자기 실력으로는 고수의 칼을 막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하서비를 살려야 한다는 제사 대인의 엄명을 떠올리며 삿갓을 쓴 고수 앞으로 몸을 날렸다. 용감하게 몸을 가로로 날린 검수가 허공에서 신발 사이에 숨겨 두었던 작은 비도를 꺼냈다. 그리고 삿갓으로 가려져 있는 적의 눈을 인정사정없이 찔렀다.

그 순간 삿갓 쓴 고수가 내리친 칼날은 하서비 등으로부터 한 척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디선가 쇠꼬챙이 두 개가 더 나타났다.

하서비를 보호하기 위해 범한이 파견한 검수는 모두 일곱이었다. 그중 다섯은 이미 등장했고, 뒤에서 있던 두 사람은 앞서 하서비를 구출하고 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숨어 있다가 행동에 나선 검수처럼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기이하고 변태적인 무공을 쓰는 탓에 그들은 계획했던 방법이 통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더군다나 칼날이 하서비 바로 앞까지 오자 무리를 해서라도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쇠꼬챙이는 잘려나가지 않았지만 강한 진동을 일으키며 검수들의 손에서 이탈했다.

하서비는 검수들이 방어하는 틈을 타 몸을 앞으로 움직여 개처럼 굴욕적인 몰골로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했다.

순간 칼의 빛이 땅으로 떨어졌다. 강남거 돌계단에 한 줄로 커다란 흔적 생겼다.

하서비는 입에서 피를 토했다. 고수의 기세에 옴짝달싹 하지 못하던 하서비가 칼날이 내뿜는 기운에 정면으로 공격을 당해 누구보다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얼굴에는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서비가 왼쪽 겨드랑이 아래에 재빨리 오른손을 집어넣더니 소맷자락에 숨겨 두었던 쇠뇌의 방아쇠를 당겼다.

흠차 대인이 호신용으로 쓰라며 준 것이었다.

쇠뇌의 화살이 발사될 때 검수 여섯은 어느새 삿갓을 쓴 고수 앞에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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