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화
줄곧 매서운 태도로 일관했던 큰 노마님은 아들과 손자가 후원에서 나가자 곧바로 피로가 밀려들었다. 그녀가 무력하게 새끼손가락을 치켜들더니 의자 팔걸이 부분을 두드렸다.
옆에 있던 여종이 노부인의 입가로 다가왔다.
그러자 큰 노마님이 두 눈을 감았다. 그런 후 그녀는 한동안 새끼손가락을 든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어떤 중요한 일을 두고 저울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곱째라고?’
순간 굳게 닫고 있던 눈꺼풀에서 어느 장면이 떠올랐다. 그 장면 속에서는 여우 같이 생긴 여자가 낯익은 남자의 몸 아래에서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자신에게는 대놓고 오만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화면이 바뀌고 그녀가 낳은 아이가 명원 이곳저곳을 자랑스럽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은방울 같은 아이의 웃는 소리가······ 나풀나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큰 노마님이 갑자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두 눈에는 살얼음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새끼손가락이 격렬하게 떨리며 살짝 구부러졌다.
그녀는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묵직한 곤장이 그 여자의 몸 위로 떨어질 때 붉은 핏방울이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자신이 그 여인을 우물 밑에 가둬 버린 날에는 하늘 가득 눈꽃송이가 하늘하늘 휘날렸었고. 그 여인의 시체는 일찌감치 해골이 되었을 텐데. 쥐들에게 몸뚱이를 갉아 먹히느라 듣기 괴로운 소리만 내질러 댔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은방울 같았던 맑은 웃음소리는 이제는 영원히 들을 필요가 없었는데.
그 몹쓸 여자가 죽고, 집에는 대충 둘러대어 마무리를 지었었다. 하지만 그 여자를 죽였다고 해서 그녀가 낳은 아이까지 죽일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아이는 명의상으로는 명씨 가문의 혈육이었으니까. 다행히 청달이가 마음이 악랄해 날마다 채찍으로 때렸고, 굴욕과 고통을 견디지 못한 아이는 어느 날 새벽 명원에서 도망을 쳤었지.
‘어쩌면 그 아이도 영원히 모를 거야.’
그때 자신이 문 뒤에서 싸늘하게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아이는 영원히 모를 거야.’
자신이 일찌감치 살수를 대기시켜 그 아이가 명원 밖으로 나가는 순간 제 어미와 함께 있게 해주라며 오래된 우물 속에 처넣었다는 사실을.
‘그런데······ 어째서 아직 살아 있는 거지? 왜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냐고!’
* * *
명씨 가문 큰 노마님이 눈동자에 불현 듯 노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줄곧 살짝 구부려진 채 치켜 올라가 있던 새끼손가락이 드디어 차분하게 의자 등받이 위에 착지했다. 같은 시각, 살짝 마른 입술이 열리고 그녀가 입가에 붙어 있던 여종에게 속삭였다.
“주 선생을 모셔와.”
* * *
명씨 가문 큰 노마님이 드디어 결정을 내렸을 때 그녀의 아들과 손자는 나란히 후원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
명란석이 만면에 감탄하는 기색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머님께서 그 못된 놈에게 손을 쓸 거라 아버지가 말씀하셨었죠?”
“무슨 못된 놈 말이냐?”
명청달이 환하게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자는 네 7 숙부이니라. 비록 지금은 우리의 적이지만, 어찌되었거나 네게는 작은 삼촌이란다.”
그러자 명란석이 자조적인 웃음을 내보이다가 갑자기 이맛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일곱째 숙부를 죽여야 이번 일을 온전히 마무리 지을 텐데 말입니다······ 하오나 흠차 대인이 어찌 나올까요? 군산회가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해도 반역까지 저지를 정도는 아닙니다.”
“네 할머니도 늙으셨구나.”
명청달이 탄식하며 말했다.
“네 할머니께서 애당초 잘못된 방법을 쓰셔서 그래.”
명란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명청달이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의 잘못이니, 명씨 가문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 이번에 네 7 숙부가 재수가 없다면,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닐 거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 말이다.”
명씨 가문의 표면상 주인은 속으로 냉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절대 통제할 수 없는 군산회와 감찰원은 이참에 충돌이나 해버려라, 라는 마음이었다. 심계가 깊은 그에게는 이번 패배 국면을 수습할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자신도 아직은 무슨 수단을 동원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6 숙부께서 이번에도 잘 보이셨나 봐요.”
명란석이 갑자기 비웃었다.
그러자 명청달이 귀엽다는 듯 아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설명을 해주었다.
“할머니께서는 항상 막내아들을 아끼시잖니······ 물론, 그분이 직접 낳은 자식이기도 하고 말이다.”
* * *
명씨 가문이 한바탕 뒤죽박죽이 되자 쥐새끼들은 그런 명씨 가문을 물고 뜯어버릴 생각에 머리를 굴려대기 시작했다. 명씨 가문의 막내아들 명청성은 현재 강남 수채의 대두목 하서비였다. 그리고 암암리에 감찰원 4처 주강남로 순찰사 감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소주성 강남거 맨 꼭대기 층에 서 있었다.
그는 건물 가장자리에 서서 나무 난간을 가볍게 문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라도 잠긴 듯 성 밖 모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과거 자신이 살던 집이었지만 이미 오랫동안 들러보지도 않은 곳, 명원이었다.
강남 상인들의 집회가 끝났다. 구체적인 절차가 정해진 건 아니었지만, 영남의 웅씨 가문과 천주의 손씨 가문의 탐욕적인 눈빛에서 하서비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제사 대인의 계책이 이미 먹히고 있음을 말이다. 내일 명씨 가문은 하서비 뿐만 아니라 웅씨와 손씨 가문처럼 연합해 공세를 펼치는 이들에게도 맹공을 퍼부을 것이다. 상인에게는 본래 뜯어 먹을 게 있어야 하지 않던가. 그런데 너무 오래 굶었으니, 저들은 분명 네 것 내 것 따지려들지 않을 것이다.
하서비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명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우뚝 솟은 강남거 맨 꼭대기 층에서 명원을 바라보니 새어나오는 등불조차 보이지 않아서였다.
오늘은 그가 운 좋게 살아남은 이래로 가장 속이 후련했던 하루였다. 드디어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 있게 자신의 이름이 명청성임을 밝혔으니까.
한편 은전을 가지고 사람을 짓밟는 쾌감이라든가, 강호인의 신분에서 벗어나 경국 조정의 무대에 선 것은 그에게는 별 것 아니었다.
하서비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힌 건 명씨 가문의 악독한 노부인의 귀싸대기를 후려갈긴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복수를 했다는 쾌감이 모든 기분을 덮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오늘 밤 범한이 검수 일곱을 자신에게 보낸 일로 하서비는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범한에게 무한히 감격하고 있었다.
하서비는 오늘 일어난 모든 일 때문에 도취감과 상실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맞은편 거리에 몇몇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지만, 강호의 영웅호걸이었던 그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강남거에서 나온 하서비는 바로 고개를 살짝 숙여 버렸다. 큰길로 나오기 전 밤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해서였지만, 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형님.”
거리에서 십여 명의 장정들이 그를 에워쌌다. 그들은 경외심과 낯설음이 담긴 낯빛으로 하서비를 바라보며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강남 수채에서 무공이 뛰어난 자들로, 황실 금고 입찰 일로 하서비를 따라 소주성으로 들어온 이들이었다. 그런데 소주성은 항상 경비가 삼엄했고, 이들 비적 중 몇몇은 초상화까지 그려진 체포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그러니 이들은 평소 같았다면 소주성까지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데 도적질이나 일삼는 이들이 지금은 소주성을 당당하게 거닐고 있다니. 그리고 큰 형님이란 자는 강남에서 최고로 돈 많은 상단 가문들과 한 자리에 나란히 앉고 말이다.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들 상인들은 평소 형제들의 목숨을 노리고 돈까지 내건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런 상인들이 하서비 큰 형님 앞에서 이렇게나 공손하게 굴다니. 그들에게 오늘은 생각지도 못한 하루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들 장정들 가슴에 허영심과 거만함이 치솟기 시작했다. 세상을 사는 이치가 과거와 달라져서였다.
한데 부하들이 놀라 허둥대면서도 기뻐하는 복잡한 표정을 내보이자 하서비는 너무 웃겨서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봐 형제들, 좀 많이 배워야겠어. 이번에 나이 많은 선생들을 뵙게 되었으니, 평소 한가할 때 그분들께 가르침을 좀 구해.”
하서비가 언급한 선생들이란 흠차 대신 범한이 이번 입찰을 위해 호부에서 데려온 나이 많은 관원들을 일렀다. 강남 수채가 상단으로 변모해가고 있는 와중이니, 하서비는 자신의 심복들이 하루 속히 장사 기술을 익히기를 바랐고, 적어도 계산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위기가 한창 화기애애한데 하서비에게 문득 차가운 기운 같은 게 느껴졌다.
이에 고개를 들어보니 밝은 달이 둥근 천장 끝에 달려 있었다. 바야흐로 봄이 찾아온 맑은 날이었지만 한밤중이 되니 아직은 싸늘했다.
시선을 거둬들인 후 다시 길 맞은편을 보니, 이상한 사람 셋이 서 있었다.
이들이 이상해 보였던 이유는, 갑자기 나타나 하서비가 있는 길가 쪽을 찬바람이 쌩쌩 도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어서였다. 밤이 되어 돌아가는 여행자도, 다른 놀 거리를 찾는 취객도 아니었다. 옷을 평범하게 입고 있었지만, 중간에 있는 사람은 삿갓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 한밤중에 입고 있는 복장치고는 너무나도 특이했다.
어려서부터 생과 사의 경계에서 싸우며 오랫동안 강호에서 구른 하서비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뼛속까지 느껴지는 한기와 위험하다는 직감 때문에 싸늘한 눈빛으로 괴상한 소리를 내며 발끝으로 바닥을 세 번 찍었다. 그러자 강남거 문 쪽에 있던 사람들이 스르륵 나타났다.
그가 발끝으로 바닥을 찍을 때였다. 길 맞은편에 있던 세 사람 중 가운데 사람이 손을 어깨 뒤로 넘겨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그러자 이내 눈발이 흩뿌려지듯 칼날의 빛이 흩뿌려졌다. 그는 물새가 물 위를 미끄러지듯 밀고 나오는 것처럼 다가와 하서비를 칼로 베어 버렸다.
“죽여!”
이에 강남 수채의 장정들도 대응에 나섰다. 그들은 뼛속 깊이 스며 있던 용맹함으로 큰 형님의 목숨을 앗아갈 듯 달려드는 칼날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 속도는 삿갓을 쓴 사람이 휘두르는 칼날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자 하서비와 가장 가까이 있던 측근이 미친 듯이 큰 소리를 내지르며 옷 속에 숨겨 두었던 직도(直刀)를 꺼내 상대의 칼날을 막아냈다.
칼날이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한데 강남 수채 장정의 손에 들려 있던 직도는 어느새 부드러운 연근처럼 적의 칼날에 두 동강이 나버렸다.
이어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광폭한 칼날이 장정의 몸을 잘라 버렸다. 장정의 몸은 끔찍하게도 두 토막의 고깃덩어리가 되어 사방으로 선혈을 내뿜었고, 내부 장기들을 바닥으로 후루룩 쏟아냈다. 그런데도 몸에서 분리되어버린 손은 여전히 칼자루와 칼날을 쥔 채 무력하고 처참하게 방어를 이어가고 있었다.
칼날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때는 고요한 밤, 강남거 앞에서는 살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자의 발끝이 땅바닥에 닿았을 때, 그는 이미 하서비 앞에 와 있었다.
직선으로 뻗는 칼의 기세는 사람이든 땅이든 모두 베어버렸다. 거리에 깔려 있던 청석판 바닥을 파괴한 것은 물론이고 그 아래에 있던 돌 파편까지 드러나도록 했다.
그리고 이내 펑,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강남거 앞에서 돌과 먼지가 어지럽게 날리기 시작했다. 먼지 속에서는 하서비의 고함 소리만 들려왔다. 하서비가 두 손바닥으로 앞을 막으며 자신에게 날아드는 거센 칼날에 맞선 것이었다.
칼날의 빛이 갑자기 사라지자 먼지도 점점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