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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14화 (414/1,108)

414화

사천립이 떠나자 범한의 이맛살이 강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는 조직이라니. 그게 무얼 뜻하는 걸까? 범한이 소리쳤다.

그러자 줄곧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고달이 서재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최근 들어 범한은 무슨 일을 하든 고달을 덜 피하고 있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호위를 통해 경도 용좌에 계시는 그분께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일부러라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라는 방법을 써보는 중이었다. 이 방법으로 실력이 고강한 호위들을 진정한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 보는 중이었다.

범한은 고달에게 6처 검수 대장을 데려오도록 했다. 그런 후 부하들을 향해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소주성에 몇 명이 더 있지?”

6처 검수들의 인원수를 묻는 것이었다. 황제 폐하가 보내준 호위는 몇 명밖에 되지 않았고 그들은 범한 곁을 떠나서는 안 되었다. 이들 말고도 3 황자 곁에도 호위가 몇 명 있었는데, 그들 역시 다른 곳으로 인원 이동을 할 수 없었다. 한편 감찰원 6처 검수 대부분은 그림자와 함께 강남 지역을 누비며 동이성에서 내려온 고수들을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그러니 지금 범한이 동원할 수 있는 검수는 몇 명 되지 않았다.

“6처에는 지금 7명이 있고······ 4처 주소주 순찰사에는 적지 않은 인원이 있습니다.”

부하가 낮게 깔린 음성으로 답했다.

지금 계년조의 진짜 우두머리인 왕계년은 북제에 있었고, 등자월도 경도에 있었다. 그리고 소문성은 범한이 민북에 있는 황실 금고 3대 작업장에 남겨 둔 상태였다. 지금 이 순간 범한의 직속 부하 중 가장 필요한 사람은, 하필이면 6처 출신의 소문무였다. 계년조 일원 중 방위 업무에 가장 능통한 자이기 때문이었다.

“4처 사람은 움직일 필요 없네.”

범한이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어 갔다.

“그들은 싸우거나 살인하는 데 능통하지 않으니까. 혹시라도 손실이 생기면 우리가 그들을 마음대로 가져다 쓴 걸 언빙운이 알 거네. 언빙운의 성격을 보면, 어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경도로 돌아갔을 때 내게 한소리 하겠지.”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고달과 계년조 일원들은 웃음이 터져버렸다.

조금 전 답변을 한 부하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대인, 오늘 무슨 행동에 나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한 사람을 보호해야 하거든.”

범한이 목소리를 깔고 말을 이어 갔다.

“6처에 남아 있는 검수 일곱을 모두 데리고 얼른 강남거로 가게. 그곳에서 가서 하서비를 찾아. 그런 후 내가 호위 무사로 붙여주어서 왔다고 말하게. 또 황실 금고 입찰이 끝나는 즉시 자네들은 나에게 돌아갈 것이니 의심하지 말라고도 전하고.”

의심하는 사람은 쓰지 않고, 사람을 쓸 때는 의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범한이 하서비 곁에 정말로 첩자를 심어두었는지 여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호부에서 온 늙은 관원 몇몇을 보낸 걸 제외하면, 감찰원은 겉으로는 하서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지 않았다. 이것이야 말로 쌍방이 함께 할 때 지켜야 하는 도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하서비 곁에 검수들을 보내면서 굳이 그 이유까지 설명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자 부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인, 남은 사람을 몽땅 그곳으로 보내시면 대인과 황자자마의 안위는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러자 범한이 고달을 쓱 쳐다보며 자신감에 찬 웃음을 내보였다.

“내 안전은 고달이 알아서 걱정할 걸세. 그러니 자네들의 임무는 황실 금고 입찰이 열리기 전까지 하서비가 안전하게 보호하는 걸세.”

범한의 말에 고달은 칼자루를 쥐고 범한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6처 부하는 더 이상 질문을 않고 담담하게 범한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가 문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몇 마디 툭 던졌다.

“조심들 하게나.”

* * *

오늘따라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은 기분이 영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매일 먹던 몸보신용 비둘기 탕을 입도 대지 않고 주방으로 돌려보냈을 정도였다. 그리고 명씨 어르신과 도련님은 오늘 소주성에서 돌아온 후 곧장 후원으로 들어가 밖으로 나올 기미가 없었다.

한편 각 방에 있는 형제와 친척들에게 명령이 떨어지자 이들은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둘러 명원의 아름다운 복도와 호수 정자를 지나 큰 노마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린 여종들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평소 새장을 들고 산책하기 좋아하는 넷째 어르신, 첩과 놀기를 좋아하는 셋째 어르신, 무술 하는 사람들과 씨름 하는 거나 좋아하는 여섯째 어르신이 불편한 낯빛으로 급히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이들은 명씨 가문 모임에 좀처럼 참여하지 않는 남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지?’라고 의아할 수밖에.

명원이 순식간에 긴장과 불안감에 휩싸였다.

한편 소문이란 놈의 전파 속도는 경국이 자랑스러워하는 우편 전달 체계보다도 빨랐다. 이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명원에 있는 종들도 놀랄만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바로 오늘 소주성의 황실 금고 입찰에서 명씨 가문에 대적하는 적이 갑자기 등장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적이 바로······ 이미 한참 전에 죽었다던 소문으로만 듣던 명칠 도련님이란 점이었다.

명씨 가문의 윗대 주인이 가장 사랑한 여인은 명칠 공자의 어머니였다. 그래서 유언을 남길 때 거의 모든 재산을 불쌍한 명칠 공자에게 남겨 주었다.

한데 너무 오래 전에 지난 일이라 명씨 가문은 이미 장자의 소유물이 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으니, 어쩌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모두 진정하거라.”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큰 노마님이 후원 한곳에 모여 있는 남자들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사내들이 이런 별것도 아닌 일로 허둥대며 호들갑을 떠는 게 못마땅해서였다. 그리고 아울러 자신이 죽은 후 이 거대한 가업을 어찌 안심하고 저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지 걱정이 밀려들어서였다.

“형님, 갑자기 그런 소문을 들었으니 아이들도 당황할 수밖에요.”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 곁에는 옛 명씨 어르신의 첩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정실인 큰 노마님에게 아첨을 잘해 오늘날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다. 그녀가 큰 노마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그······ 하가란 놈이 정말로 일곱째라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소문이란 걸 알면서도 뭘 그렇게 당황하는 게야!”

큰 노마님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날카롭게 내질렀다. 기묘하게 굴욕감 같은 게 어려 있는 제법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도자기를 칼끝으로 긁는 걸 연상시키는 끔찍한 소리이기도 했다.

옆에 앉아 있던 작은 노마님은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더니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가 앉고는 더 이상 말참견하지 않았다.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은 시기심이 강하고 마음이 모질었다. 그래서 과거 명씨 어르신은 모두 세 명의 첩을 두었지만, 그들 중 지금 남아 있는 건 한 명뿐이었다. 다행히 명씨 가문에 아들 복은 있어서 그런지, 지금 강남거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하서비를 제외해도 아들은 모두 여섯이었다. 명청달이 맏이에 장남이었고, 현재 명씨 가문의 주인이었다. 셋째와 넷째는 모두 작은 노마님의 소생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친모가 큰 노마님에게 한소리 듣자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큰 노마님의 위세에 눌려온 터라 그 누구도 감히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장자인 명청달이 나서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짧게 설명을 더했다. 한데 큰 노마님은 명씨 가문의 명의상 주인의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싸늘한 얼굴을 내보이며 말했다.

“명심하거라! 명씨 가문의 일곱째는 십여 년 전에 이미 죽었느니라. 그러니 지금 소주성에 있는 그 하당주란 이는······ 십여 년 전 소문을 가지고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게다. 그러니 우리 명씨 가문에서는 그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

명청달은 체면이 깎였는데도 외려 얼굴에 미소를 드리우고 온화하게 말했다.

“어머니, 황당한 소문이니 당연히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혹시라도 조정에서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는 하서비가 범한의 졸개란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이었다. 그리고 범한이 내세운 조정 세력이 이번 기회에 무력도 동원하지 않고 명씨 가문의 방대한 가산과 실력을 거둬간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국면이라고 말한 것이었다.

큰 노마님이 혼탁한 두 눈을 깜빡이며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 범씨라는 관원이 직접 한 말이냐? 설마 조정에서 억지를 쓰고 있는 것이냐?”

명청달은 순간 조정이 언제 억지를 쓰지 않은 적 있느냐고 생각했다. 단지 과거에는 조정이 자기편에 서주어서 세상에서 입김, 주먹, 권세가 센 곳이 바로 자신들의 명씨 가문이었던 것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만약 조정 내부에서 분열이 일었다면 자신의 권세는 일찌감치 잘려나갔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차마 이런 식으로 자세히 말할 수는 없었다.

명청달이 씁쓸하게 웃었다.

“어머니 분부를 내려주시지요.”

오늘 입찰에서 하서비가 기세를 거세게 몰아붙인 걸 보니 지니고 있는 은전의 양이 상당한 것 같았다. 더군다나 흠차 대인의 지원까지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명씨 가문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이제 큰 노마님의 지침을 따를 필요가 있었다.

큰 노마님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속으로도 떳떳하다거나 거친 사람은 아니었다. 이에 명청달의 질문에 곧바로 답을 하지는 않고 자신의 거처에 모인 명씨 가문 자손들을 주시하고 있다가 다음과 같이 싸늘하게 말했다.

“현 시국은 과거와는 다르다. 얼마 전 란석이를 통해 숙부인 너희들에게 제대로 하라는 말을 전하도록 했거늘······ 이 늙은이가 다시 말하마. 이제부터 너희들은 명씨 가문에 그 어떤 폐를 끼쳐서도 안 된다. 새를 데리고 다니려면 집안에서만 하고, 같이 씨름하던 거친 사내들도 당장 이 집에서 내쫓거라!”

“그리고 이 일은 그 누구에게도 입도 뻥끗 말아라! 만약 그 누구 하나 허투루 입을 놀렸다가는 내가 그 혀를 뽑아버릴 것이니라!”

화를 내며 빠르게 말을 해서 그런지 큰 노마님이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여종이 서둘러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옆에 있던 손자 명란석도 공손한 자세로 서둘러 차 한 잔을 올렸다.

후원에 모여 있던 명씨 가문 자제들은 감히 큰 노마님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허리를 굽혀 그렇게 하겠노라는 뜻을 내보였다.

명청달의 경우는 어머님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내 관두었다.

큰 노마님은 속으로 싸늘하게 웃음을 내뱉었다. 일을 할 때 결단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들 녀석 때문이었다. 고얀 놈! 항상 어미가 직접 나서서 해줘야 하다니. 그녀가 재빨리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내일은 입찰 둘째 날이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흠차 대인이 우리 가문을 도발하고 있어. 내일 묶어서 입찰 받게 될 8개 항목 가격은 작년보다 훨씬 비싸질 게다. ”

그녀의 말에 후원에 있던 명씨 가문 남자들이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멍하니 떴다. 새를 돌보는 일이나 무술 대련 같은 건 잠깐 참아 넘기고 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몰래 챙겨 놓은 보잘 것 없는 양의 은전까지 꺼내 공금에 보태라니! 매년 황실 금고에서 입찰을 진행할 때마다 집안에서는 늘 충분한 양의 은전을 마련했었다. 만약 여덟 개 항목의 가격대가 너무 높으면, 낙찰 받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어찌하여 이다지도 사력을 다한단 말인지. 조정에서 낙찰 상한가를 정한 것도 아닌데, 대체 얼마나 많은 양의 은전이 들어갈지 알고 이러는 것인지.

이들 어르신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어도 계승자는 될 수 없기에 삶을 즐기는 데만 열중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황실 금고 입찰이 명씨 가문에 지니는 의의 같은 건 알지도 못했다. 그리고 뒷사정을 보아하니, 조정 내부의 권력 투쟁이 연관 되어 있는 것 같아 그들은 큰 노마님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아무런 동의도 표하고 싶지 않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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