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화
명씨 가문이 손해를 보게 된 건 범한이 몰아치듯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명씨 가문이 기대고 있는 황 내관과 곽쟁은 동요하지도, 심지어는 현 상황을 마음에 두지도 않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설청 총독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한 후 작은 소리로 몇 마디 건네었다.
그러자 설청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런 후 설청은 뒷짐을 지고는 가마에 올라타고 황실 금고를 떠났다.
이제 저택 앞에 남아 있는 사람은 황 내관과 곽쟁 어사 두 사람 뿐이었다. 그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강남 총독의 가마가 골목길을 돌아 사라지는 걸 보고 있었다. 한데 그 광경을 지켜보는 그들의 낯빛에 잠시 어둠이 어렸다.
곽쟁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저 총독 대인은 일을 너무 소심하게 처리하는군요. 연명 상소를 올리는 게 뭐 그리 몸을 사릴 일이라고.”
그러자 황 내관이 껄껄 웃었다.
“곽 대인, 이 세상에 대인처럼 도의를 어깨에 짊어지고 굳건히 나아가는 자가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 작년에 형부 대당에서 대인께서는 권력에게 굴하지 않고 범한을 엄히 심판하셨지요. 대인이 그리 하셔서 황궁에서도 상당히 좋아하셨답니다.”
곽쟁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 일은 언급하지 말아주시지요.”
그러자 황 내관이 갑자기 소리를 낮추었다.
“설청 그 사람은 황제 폐하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습니다. 관리들 사이에서는 둥글둥글하게 행동하며 자기 생각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있고요······ 이번에 범한이 하서비를 몰래 움직여 판매권을 빼앗도록 한 것과 관련해 대인은 어사이시니 풍문도 상서로 올리실 수 있지요. 하나 실질적 증거를 댈 방도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설청 대인 입장에서는 연명 상소를 올리는 데에는 참여할 수 없는 겁니다. 앞서 물어본 것도 그냥 그의 태도를 탐문해 보기 위해서일 뿐이었고요. 아시다시피, 우리가 보고 있는 곳이 원래는 강남이 아니지 않습니까.”
곽쟁이 아주 옅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야 자연스레 그리될 수밖에요. 관원은 장사를 해서는 안 되고, 조정에서 오래 전부터 그와 같은 규정을 정해 운영해 왔지만, 대인들 중 지킨 사람이 있는 줄 아십니까? 하서비가 범한의 졸개라는 증거를 가지고 조정에 상소를 올려도······ 어쩌면 황제 폐하께서는 웃어넘기시고 말 것입니다. 그동안 개입을 하지 않으셨을 뿐더러, 또 현재 범한에 대한 황제 폐하의 총애가 깊으시니 더더욱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곽쟁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강남의 일은 어떻게든 경도에서 결판을 내야 합니다. 황 내관 대인, 범한이 그 많은 은전을 어디에서 조달했을까요? 은전이 어떻게 강남까지 왔는지 알아내지는 못하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그 은전이 가득 들어차 있는 방은 찾아내야겠지만······. 어쩌면 지금쯤이면 범씨 가문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을지도 모르겠군요.”
황 내관이 흐흐흐, 하고 음험하게 웃었다.
“황궁에 계신 몇몇 주인님들께서도 그리 생각하고 계십니다. 강남은 흠차 대인이 이리저리 헤집어 놓도록 내버려 둡시다······ 이틀 후면, 어쩌면 경도에서도 호부 조사에 나설 테니까요.”
* * *
범한은 화원(華園) 서재에 있는 중이었고, 지금 책상 위에서 아래쪽을 굽어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붓을 쥐고 있는 작은 손이 있었다. 범한은 그 작은 손이 써내려가고 있는 글자들을 보고 있었다.
이 나잇대 아이 중 3 황자는 글씨를 제법 잘 쓰는 축에 속했다. 3 황자의 글자체는 아름다웠고 유약해 보이지도 않았다. 골격이 살아 있는데도 획이 둥글고 매끄러웠다. 힘 있게 써내려간 글자체는 그 힘이 은근하게 드러나 있었다. 글자체로 사람의 성품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이에 범한은 3 황자가 과거 자신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얼굴에는 항상 부끄러운 미소를 띠고 있지만, 그는 실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저 나이가 어려 여러 일에서 사리 분별력이 떨어지는 것뿐이었다.
강남에서의 업무 외에 범한이 가장 중시하고 있는 일은 태학 사업이란 직책이었다. 바로 3 황자의 학업과 수양을 책임지는 일이었다. 3 황자의 교육과 관련해, 요 며칠 설청의 호의로 강남에서 유명한 훈장들이 3 황자에게 수업을 진행했었다. 하지만 3 황자는 그들을 모두 문밖으로 내쫓아버렸다.
이 소식은 소주로 돌아온 범한에게도 전해졌다. 범한은 이를 듣고 벌컥 화를 내더니, 3 황자를 데리고 강남 서원으로 찾아가 그 훈장들에게 예를 갖추어 사과를 하도록 했다. 그런 후 좋은 말로 훈장들을 구슬려 그들에게 다시 화원으로 찾아와 3 황자를 가르치도록 했다. 거처로 돌아온 후 범한은 서재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 3 황자의 손바닥을 매섭게 때려주었다.
매가 손바닥 위로 떨어질 때마다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특히나 3 황자의 손바닥 위로 떨어지고 있다 보니 자의 기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의기양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설청이 서둘러 찾아왔지만, 범한이 이미 손바닥을 다 때리고 난 후였다. 3 황자는 눈가가 시뻘겋게 부은 채로 고분고분하게 있었다. 이 모습에 설청은 저도 모르게 마음의 동요가 크게 일었다. 범한이 아무리 황제 폐하께서 정한 3 황자의 스승이라고는 하나, 이리도 인정사정없이 매질을 하다니······ 어린 범 대인의 담력이 커도 어지간히 큰 게 아니었다.
한데 이 일이 널리 알려지자 강남 문인들은 범한은 과연 문인의 빛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줄곧 고공행진 중이던 범한의 명성은 스승과 도를 중시하는 문인들에 의해 더 아름답게 빛나게 되었다.
한데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게 있었다. 범한이 3 황자를 엄하게 교육한 건 황제 폐하의 뜻과는 무관하게 순전히 의 귀빈의 정중한 부탁을 저버리기 싫어서였다.
“마마, 그 정도면 됐습니다.”
범한이 책상 위에 고개를 숙이고 진지하게 글자를 써 내려 가고 있던 3 황자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스승님, 아직 두 장 더 써야 합니다.”
3 황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범한이 이렇게나 부드럽게 나올 줄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범한이 웃으며 답해주었다.
“아직 손바닥이 아프시지요? 내일 이어서 마저 쓰십시오. 오늘은 일단 쉬시고, 이제 그만 나가서 노시지요.”
범한이 3 황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는 과하게 친근한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이치대로라면, 스승이라 함은 높이 솟은 의자에 단정하게 앉아 함부로 웃거나 말을 건네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한데 하필 3 황자의 신분으로 이런 일을 당해서 그런지, 아니면 황궁 안에서 자란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신체적으로 접촉 결핍증에 걸려서인지 몰라도, 요 어린 녀석은 빙그레 웃으며 범한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건네고는 곧장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물론 이리 잽싸게 뛰어 나간 건 화원에서 또 어떤 재미난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뛰어나가는 3 황자의 뒷모습에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범한은 마음이 허전했다. 그리고 이내 저 멀리 북제로 보낸 동생이 그리웠다. 왕계년이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범사철은 최근에 감찰원의 도움을 받아 최씨 가문이 깔아 둔 북제 노선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한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일곱째 섭 대행수를 출국시킬 수 없다보니, 어린 나이에 혼자서 그 일을 하느라 고생 깨나 하고 있었다.
범한은 3 황자가 왜 이렇게 팔딱거리며 뛰어 나가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해당타타에게 그를 맡겼기 때문이었다. 존엄한 신분인 황자가 천일도 문파에 들어가고 싶다고 한다면 고하도 그다지 반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설령 천일도 문파의 제자가 되는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고 해도, 셋째가 해당타타에게서 무예를 익혀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게 되고, 이렇게라도 두 사람을 억지로라도 사제 관계를 맺도록 해두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서재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한창 이런 저런 생각 중이던 범한이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사천립이었다. 고개를 돌려 정원 쪽을 바라보고 있던 사천립이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문을 두드린 것이었다.
범한이 참지 못하고 웃기 시작했다.
“들어오게. 뭐 볼게 있다고 그러고 있는 건가?”
사천립이 씁쓸하게 웃으며 문안으로 들어섰다.
“스승님, 3 황자마마께 해당타타 낭자에게 무예를 배우도록 한 건 스승님이니 가능한 일 같습니다만······ 해당타타 낭자는 북제 성녀인데······ 이 일이 경도에 소문이라도 났다가는 적잖이 골치 아프실 수 있습니다.”
“골치 아플 게 뭐 있다고 그러나?”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서 내게 3 황자를 강남까지 데려가도록 맡기시지 않았나. 그러니 나로서는 당연히 있는 힘껏 가르쳐야지. 그리고 무예에 관해서는 해당타타가 나보다 더 적임자라 그러네.”
두 사람은 다시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사천립이 씁쓸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양계미가 또 왔습니다. 어떻게든 저에게 식사 대접을 하겠다면서요.”
양계미는 양회(兩淮) 일대에서 가장 큰 소금 상인이다. 범한이 지금 묵고 있는 화원도 그가 내준 곳이다. 양계미는 설청과 가까운 사람이었고, 범한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어 상대방의 체면을 살려줄 필요가 있었다. 이에 사천립의 말을 듣는 순간 올해 아무 재미도 못 본 양계미가 내년에는 황실 금고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범한이 웃으며 받아쳤다.
“이곳은 원래 양계미의 저택이네. 주인이 와서 보겠다는데 들어오지도 못하게 할 수는 없겠지······. 내게는 아첨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자네에게 아첨하려 하는 걸세. 같이 식사를 해주게. 나중에 강남에서 장사를 하려면 지역 건달들을 많이 알아두는 것도 좋을 걸세.”
“그런데 자네를 어디로 데려간다고 하던가?”
잠시 후 범한이 물었다.
“강남거입니다.”
소주성에서 가장 고급인 술집을 꼽으라면 강남거와 죽원관이 있었다. 범한이 처음 소주에 왔을 때 설청을 필두로 한 강남 관원들이 자신의 환영회를 해준 곳이 바로 강남거였다. 지금 명씨 가문의 죽원관은 반은 겁을 주다시피 해서 3 황자가 사들인 후 포월루 분점으로 개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양계미가 손님 접대를 하려면 선택지는 강남거 밖에 없었다. 이에 범한은 자신이 괜한 걸 물었다고 생각했다.
범한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강남 상인들이 강남거에서 모임을 갖는데······ 명씨 가문은 오늘 하서비에 맞설 방법을 상의할 테니, 그곳에 따로 사람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네. 양계미가 오늘 자네에게 어떻게든 식사 대접을 하려는 건 이참에 황실과 거래하는 상인들 사이에 끼기 위해서일 거네. 이번 기회에······ 자네가 양계미를 그자리에 데려가 주게나.”
지금 소주성에 있는 사람들은 포월루 분점 주인이 사천립이고, 그가 사실은 범한의 심복이란 것도 다 알고 있었다. 사천립이 이끌고 가는 것이니 황실 상인들은 분명 양계미를 기꺼이 받아줄 것이었다. 물론 범한이 이런 생각을 한 건 양계미와 설청의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것 말고도 다른 계획이 있어서였다.
“그자리에 가면 최대한 귀를 활짝 열고 있게.”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명씨 가문 사람은 그자리에 없을 테니, 황실 상인들은 자네를 피하지 않을 거네. 어쩌면 자네 귀를 통해 내일 계획을 내게 전달해 주려 할 것이네.”
사천립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살짝 긴장한 상태였다.
“하서비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할까요?”
범한과 오랜 시간을 함께 있다 보니, 책과 성현의 도만 알던 도덕군자 사천립은 어느새 음모론적 안목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하서비에 대한 불신도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자 범한이 웃음이 터져버렸다.
“염려 말게. 하서비는 똑똑한 사람이야. 그러니 지금은 날 배신할 리 없다네. 지금 날 배반해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거든.”
사천립이 살짝 궁색하게 웃으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대인, 저를 통해 강남의 황실 상단 사람들에게 전달할 말이 있으신지요?”
“그게······.”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이 말을 전해주게나.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이네. 그리고 올해는 거의 모두가 빈손으로 가게 되었으니, 내년에는 본관이 보상을 해줄 거라고 말이네.”
범한이 고개를 들어 신신 당부를 했다.
“물론, 그 말을 할 때 꾸며서 말하게. 너무 대놓고 적나라하게 말하지 말고 말일세.”
사천립은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러다 문득 양계미가 앞서 언급했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떠올라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입을 뗐다.
“아까 양계미에게 강남에 군산회라는 조직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알 수 없는 신비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대인, 부디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았지만 군산회라는 이름은 여전히 낯설었다. 감찰원의 안건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아 이맛살을 찌푸렸다.
“신비하다고 해서······ 강하다고 확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니,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