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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12화 (412/1,108)

412화

상인들이 자리를 떠나려 할 때였다. 흠차 대인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줄곧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하서비 일행을 부르는 것이었다.

이에 상인들은 문밖을 나서려다 멈춰 서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범한이 차분한 얼굴에 미소를 띠고 하서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손을 앞으로 나란히 모아 두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수신호를 보내며 동시에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 선생, 오늘 큰 활약을 했더군요.”

하서비가 웃으며 두 손을 모으고 주변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모두 여러분들께서 양보해주신 덕분이지요.”

상인들은 하서비가 미웠다. 하지만 하서비는 암흑가 사람이니 최대한 밉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자는 너무나 명확히도 흠차 대인의 심복 아니던가. 이에 상인들은 하서비 면전에서 “재야에 은둔 중이던 하 선생이 갑자기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하였군요.”, 등등 상찬의 말을 잠시 늘어놓았다.

명청달은 갑자기 자기 앞에 나타난 적을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로 바라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하 당주, 왜 갑자기 장사에 흥미를 갖게 된 것입니까?”

그러자 장내에 적막이 흘렀다.

하서비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참 만에 서서히 고개를 들어 명씨 가문 주인을 바라보고는 웃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닌 표정으로 입을 뗐다.

“하 아무개, 오랫동안 강호에 있기는 했으나 본래 대대손손 장사 하는 집안의 자손입니다. 이에 제 대에 와서 보탬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버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그런 것입니다.”

“그래요?”

명청달의 눈초리에 잡힌 주름이 더 진해지더니 그가 피곤한 기색으로 물었다.

“하 당주도 상인 가문 출신이었군요. 한데 어디에서 장사를 했나요? 옛날에 춘부장님과 내가 만나 뵈었을 수도 있겠군요.”

이 광경을 지켜보던 상인들은 모두 신기하다는 듯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하서비의 집안에서 대체 무슨 장사를 했을지 잔뜩 궁금해 했다.

하서비는 평소 악몽에서나 보던 명청달의 얼굴을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그저 지그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그의 입가가 살짝 실룩이더니 이내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만나 뵌 적 있겠지요. 제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니까요. 명씨 어르신, 설마 저를 못 알아보신 것입니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순간 하서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웅백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해서 귀를 팠고, 명청달은 살짝 얼이 나간 채로 앞에 있는 하서비를 우두커니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서비는 왜 아까 전에 흠차 대인이 그의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한 건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명씨 가문 사람 앞에 다시 서는 건 최근 몇 년 동안 그가 가장 강렬하게 바랐던 꿈이었다. 꿈을 이룬 지금, 하서비의 감정은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격앙되어 있었다.

비록 소맷자락에 숨은 오른손이 살짝 떨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서비가 명청달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느릿느릿하게,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큰형님, 십여 년 동안 못 봤다고 설마 이 일곱째를 못 알아보시는 겁니까?”

하서비가 명씨 가문의 일곱째 공자였다니!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명씨 가문의 진짜 계승자, 그리고 결국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던 명씨 가문의 일곱째 공자라니!

모두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하서비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무슨 지옥에서 살아 돌아 온 무서운 귀신이라도 보는 것만 같았다. 또 어떤 이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괴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비록 그 누구도 왈가왈부하며 끼어들 수 없었지만 명씨 가문의 큰 노마님과 여기에 있는 명씨 어르신이 일곱째 공자를 죽였다는 건 누구든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남아서 강남 수채의 대두목까지 된 거지?

명청달은 앞에 있는 하서비를 얼빠진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얼마나 오랫동안 주시하고 있었는지 모를 무렵, 느닷없이 그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하서비의 얼굴에서 익숙한 그림자를 발견한 때문이었다.

그 옛날, 풋풋하고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린 형제를 채찍으로 독하게 때렸었는데. 명청달이 하서비에게서 원한과 복수심으로 가득했던 동생의 얼굴을 발견한 것이었다.

“아버지!”

명란석도 순간 놀라움과 두려움이 한가득 밀려왔다. 이에 그는 바보처럼 멍하니 하서비를, 소문으로만 듣던 숙부를 바라보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몸을 휘청이며 쓰려지려 하자 그가 소리치며 서둘러 아버지를 부축했다.

명란석에게 오늘 황실 금고 저택은 무슨 묘지 같았고, 절대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되는 곳 같았다. 이에 그는 갑자기 창백하게 늙어버린 아버지를 부축해 가문 일원들을 이끌고 밖으로 걸어갔다.

현장에 있던 상인들은 놀란 얼굴로 하서비를 주시한 채 저들끼리 작은 소리로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명씨 가문 사람들이 대문 앞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모두의 생각대로 명씨 가문의 주인 명청달이 아들의 부축을 풀고 억지로 몸을 세우고 뒤돌아섰다.

명씨 가문 주인의 낯빛은 창백하지만 강력한 자기 통제력으로 잠시 평정심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가 정원에 있는 하서비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하 당주의 말이 웃기군요. 내 불쌍한 일곱째 동생은 불행히도 이미 십여 년 전에 병사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으로 이 늙은이의 마음을 가지고 놀지 말아 줬으면 좋겠네요.”

상인들은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지만, 명씨 가문 어르신이 방금 전 한 말은 다 의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 놀라 빈틈을 보인다면, 그리고 이 소식이 명씨 가문 사람의 반박도 없이 사방으로 소문이 되어 퍼진다면, 일이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돌계단 위에 서 있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명씨 가문의 늙은 주인을 고개를 살짝 갸우뚱한 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군. 그래도 대단하단 말이지!’

명청달이 오랫동안 숨기고 있던 사실을 가지고 갑자기 공격했는데도 동요하지 않자 범한은 살짝 안타까웠다. 하지만 동시에 같은 이유 때문에 명청달에게 감탄했다.

하서비의 진짜 신분은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비밀 중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명씨 가문에서는 명칠 공자가 아직 살아 있는 걸 모르고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 하서비는 강남 수채의 노(老)채주에게 구조된 후 이곳의 대두목이 되어 명씨 가문과 거래를 하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니 만약 명청달이 일찌감치 하서비의 신분을 알았더라면, 그는 벌써부터 명칠 공자에게 대적할 방법을 생각해 두었을 것이다.

오늘 명칠 공자가 유령처럼 나타났는데도 명씨 가문의 현 주인은 살짝 허둥대기만 할 뿐이었고, 겉으로는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과연 경국 제일 부자다운 그리고 강남 거대 가문의 주인다운 심후한 내공이었다.

명씨 가문이 비록 경도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기는 했어도 하서비에 관한 사실까지는 알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범한이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던 건 작년 가을에 세운 올해 계획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에 따라 명씨 가문을 겨냥한 연구에 착수해 강남이란 철옹성을 비집고 들어갈 작은 틈을 찾아낸 덕분이었다.

물론 이는 모두 감찰원 4처 수장인 언빙운의 공이었다. 즉, 언빙운 공자의 자료 속 정보를 분석하고, 치밀하게 탐색해 내는 능력 덕분이었다. 줄곧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일하는 감찰원 고위 관료가 하서비 신분과 관련한 가장 은밀한 정보를 성공적으로 찾아낸 것이었다.

만약 범한이 사전에 계획의 토대를 다질 때 언빙운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범한은 이번 강남 행에서 이렇게나 순조롭게, 또 계획한대로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명씨 가문 일행은 놀란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고 조용히 황실 금고 저택 문을 나섰다. 그들이 병사들이 봉쇄한 길 입구를 나서자 마차는 이미 대기해 있었다. 명씨 가문 일행은 마차를 타고 성 밖에 있는 명원(明園)으로 돌아갔다. 한데 명칠 공자의 갑작스런 부활 소식에 오늘 밤 명원에서 어떤 소란이 일지, 명씨 가문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범한은 미소 지은 얼굴로 대저택 문 앞에 서서 황혼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명씨 가문의 마차를 바라보았다. 한데 범한 뒤에서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관원들과 강남 상인들은 저도 모르게 오싹한 기분에 휩싸여 버렸다. 흠차 대인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기는 했지만, 세상 누구보다도 싸늘한 냉혈한처럼 보여서였다.

이에 사람들의 시선이 저절로 하서비에게 향했다. 그들은 강남 수채의 도적 두목과 여러 해 전에 죽었다던 명씨 가문의 일곱째 도령이 한 사람이란 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있었다. 하서비의 뒤에는 흠차 대인이 있다. 그러니 명씨 가문의 어마어마한 유산과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과거 유언을 둘러싸고 언젠가는 분쟁이 일어날 것이다. 명씨 가문에서는 관련 사실을 모두 부인하고 절대 아니라고 맹세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일은 격화될 게 뻔했다.

그렇다면 이들 강남 사람들은 그 싸움에서 어떤 득을 보게 될까?

영남의 웅백령과 천주의 손길상이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그 순간 두 사람 모두 저녁에 강남거에서 만날 때······ 한 사람을 더 불러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데 하서비의 신분은 오늘 갑자기 밝혀진 터라 강남 상인들은 순간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하서비에게 손을 내미는 건 너무 경솔한 행동처럼 생각되었다. 다시 말해, 하씨 성의 명칠 공자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들로서는 감을 잡지 못한 것이었다.

하서비가 무슨 생각 중인지는 범한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는 언빙운이 자신에게 정해준 행동 수칙만 알 뿐이었다. 강남에서 범한은 반드시 좌와 우로 나누어 행동을 해야만 했다. 즉, 명씨 가문은 치고, 나머지 상인들에게는 유화책을 펴야 했다.

오늘 하서비가 이리 많이 낙찰을 받도록 한 건 강남 상인들이 연합해 내일 명씨 가문과 경쟁을 벌이도록 은연중에 압력을 넣은 것이었다. 그리고 하서비에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신분을 드러내도록 한 건 강남 상인들에게 이면에 숨은 음모와 기회를 포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본디 위험과 기회는 쌍둥이처럼 동시에 찾아오고, 상인들은 태생적으로 모험 정신을 지니고 있지 않던가.

그래서 범한은 하서비에게 수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하서비가 활짝 웃는 얼굴로 웅백령과 손길상 앞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은 살짝 경악한 눈빛을 내보였지만 그래도 하서비는 그들에게 나지막하게 몇 마디를 건넸다. 상인들 모두 작은 소리로 웃는 걸 보니 매우 재밌는 이야기가 오간 것 같았다. 이야기를 마친 이들은 각자 흩어져 황실 금고가 있는 거리를 떠났다.

범한이 몸을 돌려 설청과 황 내관에게 두어 마디 말을 건넸다. 그런 후 다시 곽쟁을 잠시 바라보고는 호위들의 엄호를 받으며 황실 금고를 떠났다. 범한은 자리를 뜨면서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어보았다. 하서비는 상인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라졌지만, 그래도 잠시 후 강남거에서의 모임에 분명 하서비가 앉을 의자도 마련되어 있을 거라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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