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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11화 (411/1,108)

411화

명씨 가문에서 값을 써냈다는 소식에 범한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상대방이 이렇게나 빨리, 그것도 노련하게 대응에 나설 줄은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범한의 속마음은 실제로는 매우 평온했다. 모든 게 예상했던 범위 내에서 흘러가고 있어서였다. 범한이 본 명씨 가문은 도살장에 끌려 나온 돼지는 아니었다. 그러니 아무리 눈앞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노련하고 심계가 깊은 명청달에게는 괜찮은 대응법이 있을 게 뻔했다.

황 내관과 곽쟁은 명씨 가문이 나섰다는 소식에 사기가 진작되었다. 이에 한동안 가만히 내버려두었던 어깨를 앞으로 쭉 내밀고 잔뜩 기대한 사람처럼 정원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한편 설청은 여전히 평온한 마음으로 찻잔에 담긴 차나 음미했다.

다섯 번째 입찰이 진행되는 중이었고, 이는 원래 명씨 가문이 노리고 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명씨 가문이 이번에 직접 값을 써낸 건 을열 여섯 번째 방에 있는 하서비 일행의 기세를 조금이나마 꺾기 위해서였다. 즉,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자 명씨 가문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입찰 진행을 늦추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번 호가 경쟁은 앞서 하서비와 영남 웅씨 가문이 살벌하게 칼날을 맞부딪히며 첨예하게 맞섰던 것에 비하면 정말 무미건조하고 재미없었다. 심지어는 바로 앞서 진행되었던 호가 경쟁과 비교해도 별 볼 일이 없었다.

명씨 가문에서 매우 낮은 가격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대단히 성의 없게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명청달 본인은 정작 그러한 점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아들과 가문 대행수들을 바라보며 꾸물거리며 시간이나 끌 뿐이었다.

명씨 가문은 가격을 써낼 때마다 오랫동안 시간을 끄는 공력을 십분 발휘했다. 계산을 할 때에는 초보자처럼 서투른 행동을 내보였고, 가격을 적어 낼 때는 아가씨처럼 부끄러워했으며, 소가죽 봉투를 전달할 때는 나이가 많아 몸이 불편한 노인처럼 느리게 행동했다.

어찌 되었든 시간이나 끌고 보자는 전략이었다. 주인과 회계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닌데 어찌나 호흡이 척척 잘 맞던지. 그들이 결정을 내리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잔뜩 조바심이 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항도 아니었다. 돌계단 위에 서 있던 의례 진행자, 전운사 관원도 다섯 번째 입찰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느새 하품이나 하고 있었다.

하서비는 명씨 가문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부른 상태였다. 하지만 세 번의 가격 제출 과정이 아직 끝나지 않은 탓에 그 누구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었다.

강남 상인들도 무료했는지 차나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들 늙은 여우들에게도 명씨 가문 어르신의 속셈이 무엇인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 하루 동안에는 다섯 번째 입찰까지만 진행하고 마치도록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하늘의 해도 어느새 처마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명씨 가문 사람들은 여전히 뭉그적거리며 모든 일을 천천히 진행시켰다. 정원에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하품하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왜 이 정원 안에서는 모든 게 다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행동했다.

명씨 가문은 급할 게 없었다.

강남 상인들도 급할 게 없었다.

황 내관과 곽쟁도 급할 게 없었다.

강남 총독 설청은 더더욱 급할 게 없었다.

을열 여섯 번째 방의 강도가 이런 뜸들이기 작전에 초조하고 불안해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탐색전을 지켜보고 있던 범한의 미간에는 은근하게 초조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명씨 가문의 악독하고도 후안무치한 수단에 한껏 감탄하고 있었다.

해가 점점 서산으로 기울어가고 있는 만큼 황실 금고 저택 내부의 그림자도 아가씨의 치마폭처럼 길게 드리워져갔다. 돌계단에서 풀 한포기도 찾지 못한 작은 새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고는 무언가 잔뜩 불만스러운 듯 꾸꾸, 하고 두어 번 울고는 날아가 버렸다.

‘댕-’,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황실 금고의 입찰이 성공리에 막을 내렸음을 알리는 폭죽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다섯 번째 항목의 입찰에서 세 번째 호가 경쟁이 이제 막 끝나서였다. 하서비가 다시 ‘힘겹게’ 명씨 가문을 이기고 북쪽으로 보내는 유리 제품의 판매권을 낙찰 받았다. 그리고 이로써 황실 금고 봄 입찰의 첫째 날이 겨우겨우 막을 내렸다.

정원에 있던 상인들이 “휴-”,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허리를 쭉 뻗었다. 그들은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식은땀까지 닦아냈다. 다행히 오늘 마지막에 명씨 가문이 나서주어서 억지로라도 시간을 끌어주었길 망정이지. 그게 아니라면 초반부터 몰아치는 을열 여섯 번째 방의 기세에 눌려 기름기가 좌르르 도는 황실 금고의 16개 판매권 중 이문이 가장 적게 남는 몇 개만 빼고 나머지는 하서비에게 몽땅 빼앗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 내관과 곽쟁이 서로를 바라보며 안도의 웃음을 내지었다. 하서비가 손을 쓴 건 그들로서는 확실히 의외였지만, 마지막에라도 상대방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린 건 확실히 다행이었다. 명씨 가문이 내일을 위해 밤새 단단히 준비하고 나올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 있던 범한이 고개를 들어 저택의 높은 담벼락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가에 남아 있는 붉은 빛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석양은 보이지 않았다.

저택 내부의 청소가 시작되고 봉인할 것은 봉인이 되었다. 상인들이 가져 온 은표와 모든 도구들은 굳이 밖으로 들고 나갈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첫째로 편의를 위해서였고, 둘째는 안전을 위해서였다. 황실 금고 저택은 오늘 저녁부터 강남로, 감찰원, 전운사, 소주부, 이렇게 네 개 관아가 연합해 방범을 서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면 황실 금고 저택은 세상에서 가장 삼엄한 감시가 이루어지는, 가장 안전한 곳이 되는 것이었다.

사병들이 복도 옆으로 나 있는 방과 응접실 외부에 봉인 종이를 붙였다. 그 사이 상인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정원에서 삼삼오오 모여 한담을 나누었다. 그러다 명씨 가문의 주인과 작은 주인이 갑열 첫 번째 방에서 나오자 서둘러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모두들 작은 소리로 말을 나누었지만 주요 내용은 을열 여섯 번째 방에 있는 강도에 대해서였다.

하서비는 자기 수하들을 데리고 황실 금고 저택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담벼락 아래로 가 침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곳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상인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하서비가 있는 곳을, 또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들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들은 저 강도들이 쓴 수단은 생각하면 할수록 진절머리가 났다.

바로 이때 정당에서 고관 네 사람이 걸어 내려 왔다.

“황 내관께 인사 올립니다.”

“설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작은 범 대인, 이놈도 좀 먹고 살게 해주십시오!”

상인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고관 네 사람을 동시에 에워싸고는 인사를 올리고 앓는 소리를 해대는 통에 순간 분위기는 떠들썩하게 변해 버렸다. 그러자 범한도 순간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리고 살짝 노기에 차 있는 영남 웅씨 가문의 웅백령을 바라보며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곧바로 다시 비웃듯이 말을 이어 갔다.

“아직 항목이 11개나 남아 있는데, 뭘 그리 조바심을 낸답니까!”

그러자 각 집안의 대표들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남은 11개 항목 중 명씨 가문이 묶어서 가져가는 게 모두 8개나 되는데, 그것을 빼면 자기들이 먹을 게 있기는 하냐며 속으로 앓는 소리를 해댔다.

범한이 다시 탄식을 하며 말을 이어 갔다.

“항목을 너무 적게 나누어 놨어요. 그러니 누군가는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 조정의 규칙이다 보니 나 역시 달리 방도가 없군요.”

이 말을 듣자마자 사람들은 범한의 처음 제안을 떠올렸다. 그리고 범한이 내뱉은 ‘규칙’이란 두 글자에 절로 두 눈이 반짝였다. 웅백령이 갑자기 헤헤헤 웃으며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그 규칙이란 게······ 결국은 사람이 정하는 거 아닙니까.”

상인들은 오늘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니 내일 입찰이 진행되는 항목에 갈증이 생길 수밖에.

사람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방관자적 태도를 보이고 있던 명청달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흠차 대인이 명씨 가문이 다른 상인들과 몫을 나누어야 한다고 알게 모르게 부축이고 있어서였다. 이에 속으로는 싸늘하게 웃고 있던 그가 겉으로는 담담한 미소를 내보이며 황 내관 쪽을 은근슬쩍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뜻을 이해한 황 내관이 미소를 지으며 중간이 껴들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황궁 대표로 온 내관이 항목을 세분화 하자는 건의에 동의하자 상인들은 이제 성사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기뻐했다. 한데 황 내관은 곧바로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 갔다.

“한데 안타깝게도 조정의 규칙을 따라야 하니, 누가 함부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는지······ 그 일은 일단 경도로 돌아가서 황태후마마와 황제 폐하 앞에서 상세히 보고부터 해야 하는지라. 그러니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은, 내년이 올해 보다 나을 거란 말뿐이군요.”

어안이 벙벙해진 사람들은 얼굴에 난처한 기색을 한껏 드러냈다. 그리고 속으로는 저놈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았다고 한껏 욕을 퍼부었다.

그동안 범한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명씨 가문 쪽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에 명씨 어르신이란 자가 오늘 갑작스런 변고에 직면했는데도 정신만큼은 멀쩡한 상태이고, 정서적으로도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빠른 상황 판단력에 정확성까지 겸비하고 있다니. 범한은 무언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씨 가문을 궁지로 몰아넣어 정신을 못 차리게 할 생각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수를 더 동원해야 할 터.

* * *

황실 금고를 봉인하는 작업도 드디어 끝나고, 병력 배치도 어느새 마무리가 되었다. 황실 금고 저택의 대문이 오늘 두 번째로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거리의 맑은 공기가 저택 안으로 밀려 들어와 사람들에게 정신이 확 들도록 해주었다. 그러자 모두들 돌아가 내일 입찰과 관련한 상의를 해보고 내일 다시 도전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명씨 가문이든, 범씨 가문이든 상관 말고 판매권 몇 개는 획득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거상들은 범한의 말 몇 마디에 조정 내 어느 세력의 뜻을 알아챈 상태였다. 바로 명씨 가문에게서 이득이든, 세력이든 가져오란 뜻 말이다. 이에 정면충돌은 꿈도 꾸지 못했던 상인들은 명씨 가문의 몫에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영남의 웅씨 가문, 천주의 손씨 가문을 필두로 몇몇 큰 상단의 우두머리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괴이한 웃음을 내보이며 저녁에 강남거에서 함께 식사나 하자고 약속을 잡았다.

명씨 가문의 목표물을 빼앗아오기 위해 몰래 상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들은 명씨 가문 어르신의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그들의 눈에 명씨 가문의 어르신이 흠차 대인과 대화 중인 게 들어왔다. 노인과 젊은이가 웃는 얼굴로 매우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관리와 상인은 허위(虛僞)의 정점을 찍는 직업군 아니던가. 이런 그들에게 보여주기 신공은 너무나도 자연스레 펼칠 수 있는 것이라 그런지 모두들 이 장면을 기이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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