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내막을 모르는 고문이 멋쩍은 웃음만 짓다가 호기심에 슬쩍 물었다.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 대해서 흠차 대인이······ 대인께 뭐라 한 말이 있습니까?”
관료 사회의 관례대로라면 황실 금고와 같은 이익이 큰 사업은 한 파벌에서 독식할 수 없었다. 더욱이 설청은 지위가 높고 강남에 뿌리가 깊은 만큼 범한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공개 입찰이 시작되기 전 총독부의 의견을 알아봤을 것이었다.
설청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작은 범 대인이 이 일에 대해 언급하긴 했었네. 나이가 많지 않은데도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더군. 그런 걸 보면 범 상서와 진 원장이 정말 잘 가르친 것 같네. 다만 이번에는 본관이 작은 범 대인의 호의를 거절했네.”
“네?”
놀란 고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의를 거절했다니? 작은 호의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십여만 냥은 되는 액수인데 그걸 거절했다는 말인가? 총독 대인이 이득을 거절한 이유가 뭐지? 설마 사이가 틀어진 것인가?’
설청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가까운 거리이기는 하지만 이만 출발하는 게 좋겠네. 작은 범 대인도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을 거고 곽쟁과 황궁 내관도 교지를 가지고 왔을 테니 늦어서는 안 되네.”
그는 아내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인 고문들에게도 자신이 범한의 호의를 거절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황실 금고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겉으로는 범한과 장 공수 사이의 이익 다툼으로 보이지만 그 뒤에 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걸 설청은 알고 있었다. 이 일이 황자들의 권력 다툼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만큼 폐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심히 행동해야 했다. 설청처럼 상당한 힘을 가진 사람이 너무 일찍 편을 선택하는 건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황실 금고의 성대한 만찬을 함께 즐기자는 범한의 호의를 거절한 것이다.
시위들이 지키고 있는 강남 총독부 정문에 나온 설청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편액을 바라봤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편액을 바라보던 그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요 몇 년 동안 폐하의 행동은 갈수록······ 이상했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경도를 주시하며 앞으로의 상황을 추측했다. 하지만 조정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해지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관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그리고 경국 황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걸까?
* * *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 참여할 상인들은 이미 각 방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을 주관할 범한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경도에서 온 내관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황실 금고는 황실의 재산인 만큼 규정대로 태상사와 내정이 함께 관리, 감독했다. 다만 범한이 태상사 소경이므로 태상사에서는 오늘 따로 인력을 소주에 보내지 않았기에 범한은 골칫거리를 하나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황궁을 대신해 온 태감은 그에게는 아주 큰 골칫거리였다.
“황 내관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범한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본관도 쓸데없이 참견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건 이전 규정대로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황궁에서 오늘과 같이 중요한 임무를 처리하기 위해 보낸 내관이니 분명 지위가 상당히 높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뒤룩뒤룩 살찐 황 내관이 범한의 말에 거짓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인께서 이 일을 맡으시니 저희는 마음이 놓입니다.”
깊은 황궁에서 생활하는 그는 일찌감치 범한의 명성을 알고 있었지만 황제의 명을 받은 이상 상대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소주에 있는 며칠 동안 범한이 그를 장원에 초대하지 않자 무시받은 것 같아 기분이 불쾌했다.
사실 황 내관이 이곳에 온 이유는 공개 입찰을 감독하는 것도 있었지만 황태후의 말을 전해 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바로 이전의 규정대로 공개 입찰을 진행하고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었다. 범한의 심기를 건드리는 이 말은 황태후가 범한에게 보내는 명령이자 경고였다.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이전의 규정을 따르라고?’
범한은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보기에 황태후의 말은 명씨 집안을 건들지 말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의미였다. 아무래도 장 공주가 경도로 돌아온 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황태후가 직접 나선 것 같았다.
이것은 황태후가 자신에게 보내는 명백한 경고였다. 지나치게 참견해서 황족 구성원들의 이익을 건들지 말라는. 이런 생각이 들자 범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일대 제왕이라 불리는 황제가 일을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해도 되는 건가? 가업을 맡은 아들에게 어머니와 누이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게 당연하다는 건가?’
황제는 비범한 인물임은 틀림없었지만 몇몇 일들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굳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를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로잡기 위해서는 먼저 혼란이 따라야 한다는 것인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던 그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내뱉었다.
“뭐라 하셨습니까?”
그의 옆에 있던 황 내관이 물었다.
“아니네.”
범한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말을 전하려 먼 길을 왔구먼. 고생했네.”
황 내관이 교만한 표정을 지으며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
“황태후께서 이 노비를 믿고 말씀을 전하라 하시니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제 체면을 세워 주신 작은 범 대인께도 감사드립니다.”
범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돼지머리처럼 살찐 황 내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잠시 뒤 말했다.
“자네의 체면이라고?”
뜬금없는 말에 황 내관이 살며시 범한의 눈치를 살폈다.
“황 내관, 본관의 앞에서 쓸데없는 짓은 벌이지 않는 게 좋을 거네. 황 내관보다는 분수를 잘 알던······ 요 내관, 대 내관, 후 내관처럼 행동하게.”
황 내관은 모욕적인 말에 화가 치솟았지만 놀라기도 했다. 범한이 언급한 세 사람은 황궁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비록 대 내관이야 세력을 잃기는 했지만 최근 동궁의 수령 태감이 된 홍죽을 제외하면 요 내관과 후 내관은 황 내관보다 직위가 높았다. 그러니 범한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요 내관과 후 내관도 자신 앞에서는 공손하게 행동하니 황 내관도 오만하게 나서지 말라는 의미였다.
황 내관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얼굴도 붉으락푸르락했지만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대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실 여전히 범한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사방에 적을 만드는 젊은 권신의 앞날이 좋을 리 없거니와 자신은 황태후의 측근이므로 함부로 못 할 거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범한이 웃는 듯 마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황 내관, 소주성에서는 고분고분 행동하는 게 가장 좋을 거네.”
황 내관이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흠차 대인께서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경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네.”
범한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본관이 가장 싫어하는 게 황태후마마를 이용해 나를 겁박하는 거네. 자네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본관은 아니야. 만일 황 내관이 경도로 돌아가 사방에 말을 퍼뜨리고 다닌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라네.”
범한의 협박을 들은 황 내관은 눈에 독기가 가득하고 이도 으드득 가는 것이 상당히 화가 나 보였다. 그가 벌겋게 화가 오른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일개 신하 주제에 황태후의 말을 무시하다니! 정말 네가 그 작은 목숨 하나도 부지하고 싶지 않은가 보구나!’
범한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히 그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양 소매를 털고는 옆 복도를 따라 정당으로 걸어가다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자네의 신분을 정확하게 알도록 하게. 자네는 홍씨가 아니지 않은가!”
늙은 홍 태감을 제외하고 음산한 황궁 안에서 범한에게 경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 * *
범한이 정당 앞 돌계단 앞에 서자 양쪽 방 안에 있던 상인들이 앞다투어 나와 허리를 굽히고 인사했다. 하지만 그는 바로 앞 정문만 바라볼 뿐 자신과 가장 가까운 방인 갑(甲) 열 첫 번째 방 앞에 서 있는 명씨 집안 부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때 정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한 사람이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이 사람은 상인처럼 부유해 보이지도, 관리처럼 근엄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민간에서 피를 묻히며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양들 속에 갑자기 늑대가 나타난 것처럼 지금 안에 있는 상인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바로 강남 수채 대두목 하서비였다. 오늘 하서비는 담청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몸에 배어 있는 쇠 냄새와 피 냄새를 숨기지는 못했고, 표정을 침착했지만 가는 눈동자에는 흥분과 긴장감이 가득했다.
하서비가 두 손을 모아서 들어 올리며 범한에게 인사했다.
“정사 대인, 늦어서 죄송합니다.”
“늦지 않았네.”
범한이 차가운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딱 맞게 왔어.”
강남의 거상들은 종종 떳떳하게 드러낼 수 없는 장사를 할 때면 여러 지방의 민간 힘을 빌리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강남 수채 대두목인 하서비는 비밀리에 오늘 공개 입찰에 참여한 상인들이나 심지어 명씨 집안과도 왕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하서비의 진짜 얼굴을 알고 있었다. 오늘 그가 부하를 몇 명 이끌고 이곳에 등장하자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하더니 연이어 놀라 헉!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비적이 황실 금고 입찰에 참여한다고?!’
거상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서비를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돌계단 위에 서 있는 범한을 바라봤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적이 장사를 한다고? 그럼 우리 상인들은 뭘 하라는 거지? 산에 들어가서 도둑질이라도 하라는 건가? 이게 무슨······. 작은 범 대인이 나타난 뒤로 모든 게 다 뒤죽박죽돼서 상황을 예측하기 힘들었지만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이야. 게다가 하서비가 사방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았다고 한들 입찰에 참여할 만한 은전은 모으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여기 들어온 거지? 강남 수채 사람들이 여기 들어와 있다는 건 이미 보증금을 지급했다는 거야. 세상에, 약탈로 그 돈을 모았다는 것인가? 그럼 약탈이나 해서 돈을 벌면 되지 뭣 하러 힘들게 장사를 하려는 거야?’
돌계단에서 가장 가까운 방문 앞에 서 있던 명청달이 미간을 찌푸리며 하서비를 바라보다가 아들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냐?”
“하서비입니다.”
명란석이 아버지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강남 수채의 대두목입니다. 저도 이전에 몇 번 연락한 적이 있었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들의 말을 들은 명청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 사람이 흠차 대인이 준비해 패인 것 같구나.”
바로 그때 하서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명씨 집안의 주인인 그를 바라보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끝없는 적의와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 담긴 미소였다. 어머니가 살해당하고 재산까지 뺏긴 명씨 집안 일곱 번째 공자가 범한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정정당당하게 복수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