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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07화 (407/1,108)

407화

사실 항주성 서호에 온 이후로 범한은 이전처럼 매일 새벽과 저녁에 명상을 하기 시작했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해당타타에게 숨겨 왔다. 그런데 해당타타가 묻자 범한은 아무 말 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해당타타가 옅게 웃으며 물었다.

“대인이 방금 은전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한 말은 정말 신선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이 많이 있고, 가난에 허덕이며 힘겨운 삶을 사는 백성들도 정말 많은데 어째서 강 정비 사업에 돈을 쓰려 하십니까?”

“각 지역에 자선 단체가 점차 열릴 겁니다. 그리고 강북 일대의 유랑민들이 정착할 방법을 조정에서 마련하기로 폐하와 이야기를 한 상태입니다.”

범한이 침착하게 말했다.

“황실 금고의 은전 일부는 제가 합당한 일에 쓸 생각입니다.”

“혹시 어느 분이 생전에 바라신 일입니까?”

해당타타가 호기심에 묻자 범한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대인께서는 아직 첫 번째로 강 정비 사업을 선택한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해당타타가 질문을 상기시켰지만 범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머릿속으로 한 장면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황색 옷을 입은 여인이 강가 청색 돌 위에 서서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맹렬한 기세로 흐르는 강물과 힘겹게 제방을 쌓고 있는 인부들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일단은 쉬어야겠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내일 열릴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서 한바탕 전쟁이 벌어질 테니까요.”

경력 6년 3월 22일은 대길이었다. 그리고 흠차 대인이자 황실 전운사 정사인 범한이 강남에 내려온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알록달록 아름다운 봄 경치에 따뜻한 산들바람이 불자 소주성에 있던 귀족가 자제들과 여인들은 봄 경치를 즐기러 성 밖으로 나갔다. 넓은 도로 위에 핀 풀들이 마차 바퀴에 눌려 눕고 꾀꼬리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인파에 놀랐는지 허둥대며 울어 댔다. 성 밖 청산의 곳곳이 푸른색으로 물들었고, 남녀가 함께 모여 정을 나누는 곳마다 맑고 아름다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처럼 화창한 봄날에 소주성 안에서는 또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강남 총독부에서 남쪽으로 일흔네 장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운사 관아였다. 강남로에 있는 관아든 소주부에 있는 관아든 관료 냄새가 가득한 이곳은 평상시 경비가 매우 삼엄했다. 오늘도 손에 긴 창을 쥔 군사들이 양쪽 길 끝을 오가며 경계를 서고 있었고 관아에서 일하는 아속들도 춘곤증을 가까스로 몰아내며 이상한 낌새가 없는지 주변을 살폈다. 상당히 큰 구역이었지만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매년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이 열리는 날에는 많은 사람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이곳을 찾아왔다. 먼저 각 지역의 상인들은 엄청난 은전을 가지고 입찰에 참여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리고 공개 입찰 진행을 책임진 전운사 관리들과 강남로 총독도 현장에 나왔다. 뿐만 아니라 관리 감독을 위해 황궁에서 보낸 태감들과 도찰원에서 종일 할 일 없이 지내는 어사들까지 한 무리가 왔다. 한마디로 오늘 이곳에 수많은 은전과 중요한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안전 문제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날이었다.

다행히 소주는 큰 강 연안 깊숙이 위치해 있었고 경국의 군사력이 강했기 때문에 어떤 세력도 함부로 이곳에 찾아와 탐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더구나 소주성 안에서 활동하는 좀도둑들도 봄놀이를 나간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러 성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전운사의 관례에 따라 큰 건물은 비어 있었다. 안의 넓은 공간에는 정당과 칸을 막은 작은 공간이 두 줄로 쭉 이어져 있었는데, 과거 왕조에서 이곳을 시험장으로 썼다고 했다. 과거 경국 황제가 황실 금고를 시찰하러 남쪽에 내려왔을 때 이곳을 발견하고는 공개 입찰을 진행하기에 알맞은 장소라 판단했고, 이후로 이곳에서 공개 입찰을 진행하는 게 관례가 되었다. 평상시에는 소주 총독부에서 이 건물을 관리했고 3월에만 전운사가 사용했다.

십여 일 전부터 청소와 수리를 시작한 터라 오늘 이곳은 먼지 한 점 보이지 않을 만큼 깔끔했다.

건물 밖은 군대가 지키고 있었고 안은 평범하게 생긴 시위들이 지키고 있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아 살짝 어두운 정당에는 희미하게 큰 탁자 하나와 팔걸이 나무 의자 네 개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신풍관 소주 분점의 접당 왕만두가 모두 팔리고 나자 비로소 건물 문이 열렸다. 각 주에서 온 거상들은 옆에서 자신들을 뚫어지게 감시하는 병사들의 눈빛을 못 본 척하며 질서 정연하게 계단을 올랐다. 십여 년간의 경험을 통해 이들은 오늘 벌어질 일들을 훤히 알고 있었다.

오늘 이곳에 온 상인들은 집안을 대표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집안 뒤에는 관료 사회의 파벌이 버티고 있었다.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 참여할 만한 자격을 갖춘 상인들의 수가 많지 않은 만큼 부리는 종과 회계 담당자까지 데려왔는데도 인원은 많지 않았다. 모두 상자와 장부를 비롯해 공개 입찰에 필요한 물품들을 들고 들어왔다.

이러한 상인들 속에는 당연하게도 명씨 집안의 대표도 있었다. 작년부터 명씨 집안은 대부분의 일을 명란석에게 맡겼고 아버지인 명청달은 얼굴을 내미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많은 거상의 예상을 깨고 오늘은 명씨 집안의 주인인 명청달이 직접 이곳에 등장했다.

피곤한지 눈을 게슴츠레 뜬 명청달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손을 맞잡고 공손히 인사했다. 그러고는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강남 상인들은 재빨리 명청달에게 답인사를 한 뒤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면서 서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오늘이 명씨 집안에게 중요한 날인 건 사실이었지만 명청달이 긴장한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에 사람들은 황실 금고 전운사 정사로 새로 부임한 흠차 대인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명씨 집안 공자가 암암리에 상인들을 찾아다니며 분위기를 살피던 것이 떠올랐다. 오늘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은 이전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도 않을 것이며 봄날처럼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끝나지도 않을 거란 생각이 스쳤다.

처마 밑에 좌우로 나란히 있는 방 앞에는 각자의 이름이 붙어 있었고 상인들은 이름을 찾아 순서대로 들어갔다. 명씨 집안은 데리고 온 사람들만 열여섯 명이 되는 만큼 일행이 가장 많았기에 왼쪽 첫 번째 큰 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전운사에서 일하는 아속들이 차와 정성껏 만든 간식 그리고 김이 나는 뜨거운 수건을 가지고 왔다.

관아에서 하는 공개 입찰이었지만 이들은 부유한 상인들을 잘 대접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전에 범한이 돼지를 잡으려면 먼저 잘 먹여서 살을 찌워야 한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의자에 앉은 명청달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문밖 맑은 하늘을 바라봤다. 들어오기 전에 상인들과 인사를 하며 눈을 맞춘 그는 모두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걸 확인했다. 이익 앞에서 서로 가격을 올리며 경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거니와 더욱이 이들 상인 중에서 자신의 눈 밖에 나길 바라는 사람은 없었다.

마음이 약간은 안심이 된 명청달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나 더 걸릴 것 같느냐?”

공손하게 아버지 옆을 지키고 있던 명란석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곧 시작될 것입니다.”

그가 피 한번 묻혀 본 적 없는 것 같은 하얀 손을 뻗어 아버지 옆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명청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하에서 자신과 재력을 다툴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입술이 말랐다. 그러다 나이가 많아서인지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의문에 휩싸였다.

‘어머니는 이미 연로한 나이이신데도 어쩜 그렇게 정정하실 수 있지?’

명청달이 고개를 돌려 칸막이 방들을 찬찬히 훑어봤다. 그는 그 안에 어느 집안 상인이 들어가 있는지 훤히 다 알고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직접 상업계에 나타난 적이 거의 없었지만 평생을 교류해 온 만큼 서로를 잘 알았다. 오늘 온 사람들은 대부분 2세의 후손들이었다. 황실 금고의 열여섯 개 항목 중 최씨 집안이 원래 담당하던 부분은 가격 경쟁을 벌일 수 있었지만 명씨 집안이 줄곧 해온 여덟 개 항목은 건들 수 없다는 걸 잘알고 있었다.

다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맞은편 맨 끝에 있는 방이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것이었다. 어느 집안에서 입찰 문서를 냈는지 아직도 오지 않고 있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던 명청달이 미간을 찌푸렸다.

“을(乙) 열여섯 번째 방은 어느 집안이냐? 곧 있으면 시작될 텐데 왜 아직 안 온 거지?”

명란석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모든 걸 세밀하게 조사한 그도 저 방이 비어 있는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런 아들의 모습에 명청달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범한은 은전 40만 냥을 돌려보낸 뒤 줄곧 조용히 있어 도무지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아들을 노려봤다.

“물샐틈없이 철저하게 일을 준비했어야지. 입찰에 참여하는 사람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게냐? 그러다가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어쩌려고?”

명란석이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 잘못을 인정했다. 하지만 대호족 가문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겉모습과 달리 속으로는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아버지의 눈치를 살핀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어느 집 소금 장수일 겁니다. 원래 소금 장수들 속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챙길 게 있는지 알아보려고 온 거겠지요.”

명청달이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소금 상인은 절대 아니다. 일단 그들도 공개 입찰에 나서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고 설 대인도 그 점에 대해서는 보증을 했어.”

명씨 집안의 주인인 그가 비어 있는 방을 바라봤다. 굳게 닫힌 문과 은은하게 한기가 새어 나오는 유리창을 보니 불안감이 강렬하게 솟아올랐다.

* * *

“정말 아깝습니다.”

강남 총독부 서재에서 한 고문이 한숨을 쉬었다.

“최씨 집안이 몰락하면서 여섯 개 항목의 주인이 사라졌는데도 우리가 나설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눈앞에서 이렇게 큰 수입을 명씨 집안과 강남 지주들이 나눠 가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정말 아깝습니다.”

강남로 총독으로 지방 고관이자 1품 고위 관리인 설청 대인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는 다른 고문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양계미가 며칠 전까지 몇 번이나 찾아와서는 혹시나 대인이 자신을 위해 작은 범 대인에게 말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더군요. 대대로 소금 장사나 하던 놈이 황실 금고 이익을 보니 눈이 멀어 허튼짓을 하는 게지요.”

양계미는 양회 일대 가장 큰 소금 상인이자 소금 밀수꾼으로 총독부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었다.

설청이 피식 웃었다.

“눈이 멀었다고? 누군 눈이 멀지 않았는가? 양계미 그놈은······ 내가 그 좋은 장원을 달라고 했는데도 한사코 내주려 하지 않더니 이번에 작은 범 대인이 거주할 곳으로 내주더군. 본관이 그놈의 속셈과 작은 범 대인의 생각을 모르겠는가?”

강남 총독인 그는 나라의 7분에 1에 해당하는 지역의 군마와 민생을 관리하는 만큼 실력도 대단했고 정보를 얻는 눈과 귀도 많았다. 오늘 공개 입찰을 떠올리며 그가 한숨을 쉬었다.

“작은 범 대인이 양계미의 체면을 세워 주기는 하겠지만 황실 금고 일에서는······ 기회를 주지 않을 거네.”

옆에 있던 고문이 물었다.

“흠차 대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주인이 없는 여섯 개 항목을 누구에게 줄지 물어보셨습니까?”

미소 짓고 있던 설청의 얼굴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그건 물어볼 필요도 없지. 폐하가 그를 강남에 보냈다는 건 여섯 개 항목을 그가 가질 거라는 뜻이니까.”

그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이어서 계속 말했다.

“아마도 명씨 집안에서 그동안 운영해 왔던 여덟 개 항목을 모두 가져가려 한다면 엄청나게 기를 써야 할 거네.”

고문이 미간을 찌푸렸다.

“작은 범 대인께서 이번에 선택한 집안이 어디인지 짐작도 못 하겠습니다.”

설청이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그는 강남 전체를 다스리는 만큼 범한의 꿍꿍이를 알고 있었다.

“자네들은 상상도 못 할 사람이네. 흠차 대인도 정말이지 무서운 사람이야. 상인들 사이에서 사람을 선택하지 않고 일반인 중에서 선택하다니. 만일 평상시에 그런 사람이 당당하게 성안으로 들어오려 했다면 본관이 잡아서 감옥에 처넣었을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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