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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05화 (405/1,108)

405화

양만리는 가끔 알 수 없는 단어를 사용해 말하는 범한의 대화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대략적으로만 알아들어도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태감이 아니네.”

범한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은전과 같은 것들을 모으는 데 취미 따위는 없어.”

양만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은전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사천립의 명의로 기생집을 경영하는 거지? 더욱이 명씨 집안과 황실 금고에서 착복한 은전을 조정에 돌려주겠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가던 돈줄을 끊었지만, 과연 얼마나 조정에 돌려줄지는 알 수가 없는 거지.’

제자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범한이 직설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이번에 자네를 부른 것은 맡길 일이 있어서이네.”

양만리는 범한의 몇몇 행동이나 일 처리 방식이 자신의 신념에 저촉되었기에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범한이 맡기는 일이 법률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최선을 다해 처리했다.

“대인, 분부해 주십시오.”

한껏 진지해진 범한의 표정을 본 양만리는 맡길 일이 정무와 관련 있는 일이라 짐작하고는 호칭을 ‘대인’으로 바꾸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범한의 지시를 기다렸다.

공손하게 명령을 기다리는 그를 바라보던 범한이 넌지시 말했다.

“곧 경도에서 자네를 공부(工部)로 전근시킨다는 조서가 내려올 거네. 놀라 허둥대지 말라고 미리 말해 주는 거네.”

놀란 양만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관례대로 자신이 부춘현에서 문제없이 근무를 마친다면 내년에는 주로 들어가 근무를 할 수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아주 순탄한 벼슬길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무난하고 합리적인 과정이었다. 양만리는 고지식한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료 사회의 복잡한 내막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범한이 자신을 비롯한 세 명의 제자들을 경도가 아닌 지방 주와 군에 발령한 이유가 뭔지 알고 있었다.

이미 경도에 세력을 두텁게 다진 범씨 집안으로서는 지방 세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양만리가 부춘현에 발령된 이유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공부로 전근 가게 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품계가 낮아도 경도 밖에서는 스승이 하는 일을 도울 수 있었지만 경도로 돌아간다면 낮은 관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스승에게 무언가 깊은 뜻이 있으리라 짐작하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가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자 범한이 설명했다.

“지방 관리가 공부로 전근 가는 것은 살짝 승진하는 정도이니 내가 일부러 뭘 했다고 생각하지는 말게. 그리고 자신이 공부로 가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양만리가 여전히 의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범한이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공부에는 네 개의 사(司)가 있네. 그중에서 수부사(水部司)는 경국 원년 신정 때 수청리사(水淸吏司)로 개편되었지. 이번에 자네가 가게 될 곳은 바로 수청리사네.”

범한의 의도를 알아챈 양만리는 입을 살짝 벌렸다. 하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대인, 치수 공사를 하는 데 은전이 많이 들기는 하지만 이 은전을······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범한이 뭔 소리냐는 표정을 짓다가 피식 웃었다.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항주성에서 그렇게 혼이 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게야?”

양만리는 그동안 스승이 명씨 가문과 황실 금고를 공격하면서까지 은전을 긁어모으려 했던 이유가 강 정비 사업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인 양만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의 우악스러운 성격도 고칠 필요가 있네. 내 앞에서 직설적으로 말하는 건 괜찮지만 공부에서 간사한 관리들에게 그렇게 행동한다면 내가 어찌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는가?”

양만리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스승님 말씀대로 앞으로는 신중하게 하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양만리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설명했다.

“수청리사는······ 강 정비 사업에 들어가는 돈을 심사하여 결정하는 자리이네. 자네도 알다시피 강 정비 사업을 진행하려면 은전이 많이 필요하지. 게다가 작년 큰 강의 제방이 무너지면서 많은 사람이 수몰되어 죽었네. 그러니 올해 다시 그런 참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폐하께서는 국고의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즉시 정비 사업에 돈을 투입하실 걸게. 내가 자네를 수청리사로 보내려는 이유는······ 자네가 그 돈을 감시하길 바라서야.”

양만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강 정비 사업? 제방? 홍수? 나보고 그 돈을 관리하라고?’

강 정비 사업은 명실상부 국가에서 돈이 가장 많이 드는 사업이었다. 더욱이 경국은 지난 십여 년 동안 매년 강 정비 작업을 했지만 매년 둑은 무너졌고 은전은 홍수와 함께 사라졌다. 한마디로 매년 인명 피해가 계속되는 홍수는 자연재해이자 인재였다. 경도의 공부와 하운 총독부의 관리들이 강 정비 사업에 쓰일 은전을 착복했고 이는 자연재해보다 더 큰 참사를 낳았다.

경국 황제도 그런 문제를 알고 있었기에 4년 전 큰 강 제방이 무너졌을 때 감찰원에게 조사를 맡겼고 조정은 하운 총독을 사형에 처했다. 소문에 따르면 국가 돈을 착복한 하운 총독의 배후에는 황태후가 있었다고 한다. 경국 황제가 사형이라는 엄벌을 내렸음에도 강 정비 사업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부패는 근절시키지 못했고 하운 총독의 자리는 4년째 비어 있었다.

게다가 근 몇 년 동안 황실 금고 수입이 예전만 못한 데다가 두 번의 전쟁으로 국고가 비게 되면서 큰 강의 제방을 수리하는 일은 장기간 방치되어 왔고 결국 작년 홍수로 제방이 무너지면서 상당한 인명 피해를 초래하였다.

‘황제 폐하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일을······ 나보고 하라고?’

양만리가 초점 없는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아는 그는 자신에게 군이나 주를 다스릴 능력은 있을지 몰라도 천하 백성들의 생사가 걸린 강 정비 사업과 같은 일을 맡을 능력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가 범한에게 절을 하며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하고 싶지 않다고 사정을 하자 범한은 한심스럽다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며 타일렀다.

“무서울 게 뭐가 있다고 그러는가? 내가 자네에게 제방을 수리하라고 그랬는가? 그냥 은전이 제대로 쓰이는지 지켜보라는 거네.”

“차라리 직접 흙으로 강둑을 메우는 게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양만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스승님께서 제게 맡기신 일은 이번 강 정비 사업과 상당한 관련이 있지 않습니까. 만일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어 홍수로 백성들이 죽는 비극이 발생한다면 저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범한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물었다.

“청사에 이름을 남길 청렴한 관리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었나? 그래서 내가 경국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관리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청렴함을 드러내라 하는 건데 못 하겠다는 겐가?”

양만리가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범한도 더는 말하지 않고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용기를 낸 양만리가 고개를 들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대인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하운 관아 문 앞에서 죽임을 당하더라도 스승이 국가를 위해 일할 기회를 준 만큼 몸을 사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범한은 비장한 결심을 한 그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목숨을 내놓을 각오까지 한 걸 보니······ 잘하면 총독도 끌어내리겠구먼.”

범한이 애써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하물며 지금까지 하운 총독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범씨 집안과 감찰원에서 자네를 보내려 하는 것이네. 하운 관아가 위험한 곳이긴 하지만 그곳 탐관들이 자네를 몰래 해치려 한다면······ 내 보복을 감당해야 할 거야.”

양만리가 무언가 깨달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맞다, 내 뒤에는 스승님이 계시는데 하운 관리들이 뭘 할 수 있겠어?’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놓이면서 의욕이 불타올랐다. 당장이라도 경도에 보고한 뒤 큰 강 연안으로 달려가 조정의 은전이 제대로 쓰이는지 감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범한이 양만리의 의욕에 불타는 눈빛을 바라보다가 애써 웃음을 참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머릿속에 주의 깊게 새겨 두어야 할 게 있네.”

“네, 말씀하십시오.”

“자네는······ 은전만 관리하는 거니 강 정비 사업에는 관여할 수 없네.”

범한이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당부했지만 양만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 정비 사업은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해 중요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왜 내가 관여하면 안 된다는 거지?’

제자의 마음을 아는 범한이 진지하게 설명했다.

“강 정비 사업은 전문 기술을 가진 공부사 관리들이 해야 하는 일인 만큼 자네는 은전이 제대로 쓰이는지만 감시하고 강 정비 사업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전문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끼어드는 거네. 설마 자네는 강 정비 사업이 그냥 제방을 높이 쌓으면 끝나는 일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양만리가 자신도 그 정도는 안다는 표정을 짓자 범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자네를 공부로 보내는 이유는 주류에 휩쓸리지 않고 청렴함을 지킬 줄 알며 불의를 보고 참지 않기 때문이네. 나는 자네가 해본 적도 없는 강 정비 사업에서 뭔가를 해낼 거라는 기대는 눈곱만큼도 하고 있지 않아.”

범한은 자신이 여러 번 말하는데도 양만리가 다른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큰 소리로 말했다.

“내 말을 흘려들어서는 안 되네. 양만리, 내 말 듣고 있는가!”

정신을 차린 양만리가 벌떡 일어나자 범한은 그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만일 자네가 내 명성을 등에 업고 강 정비 사업의 구체적인 일에 함부로 관여한다는 말이 들린다면 사람을 보내 자네를 갈기갈기 토막 내버릴 거네.”

범한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에 겁을 먹은 양만리가 덜덜 떨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이후 해야 할 구체적인 일들과 하운 총독부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처럼 세밀한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누던 범한은 자신이 이전에 양만리를 아둔한 사람으로 봤던 게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지시한 일을 비교적 원만하게 해결할 거란 확신이 들자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일러 주기 시작했다.

“내가 자네에게 수청리사에 가라고 하는 이유는 사실 자네가 강 정비 사업의 해묵은 부패를 해결하길 바라서가 아니네.”

범한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천천히 사실을 털어놨다.

“사실 감찰원에서도 많은 밀정을 보냈지만 관리들이 너무 많고 조정과 깊이 결탁하고 있어 제대로 처리해 오지 못했네.”

양만리는 솔직히 약간 놀랐지만 질문하지 않고 조용히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큰 강 정비 사업에 쓰일 은전이······ 항상 부족했던 거지.”

범한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자네가 믿든 믿지 않든 상관은 없지만 강 정비 사업에 쓰이는 은전은 늘 부족했네. 설사 폐하께서 은전 2백만 냥을 보내도 공부에서는 부족하다고 외칠 거야.”

말을 멈춘 범한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물론 천천히 해결한다면 이런 상황을 고칠 수 없는 것도 아니네. 하지만 시간이 없네. 작년 큰 강의 제방이 무너지면서 댐과 둑이 손상되었어. 작년 겨울이 오랜 시간 방치된 둑과 제방을 수리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였지만 국고에 돈이 없어서 할 수가 없었지. 만약 이대로 간다면 올해 어떤 일이 발생할 것 같나? 이대로라면 올해 홍수가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수밖에는 없어.”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냉소를 띠었다.

“만일 올해 큰 홍수가 일어난다면 작년처럼 수많은 사람이 죽을 걸세. 그러니 강 정비 사업에 전문성을 가진 관리들을 감찰원에서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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