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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04화 (404/1,108)

404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노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직은 초상전장과 거래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일단은 공개 입찰에서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사천립이 찾은 돈의 액수가 크지는 않고, 둘째로 태평전장의 배후에는 사고검이 있어. 전장은 무엇보다도 신용이 가장 중요하다. 그들이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금액을 알려 준 이유는 사고검이 우리 명씨 집안이 동이성에 계속 상품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갑자기 초상전장과 거래를 하면 그들의 마음이 편하겠니? 마지막으로 초상전장이 심씨 집안의 돈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동이성의 귀족 가문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동이성은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곳이다. 만일 그 가문이 사고검의 눈엣가시라면 우리도 덩달아 사고검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 아니냐.”

명청달은 자신이 어머니가 온화한 목소리로 자신과 대화를 나눌 줄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노부인이 차분히 다음 말을 이어갔다.

“초상전장과는 적게 왕래하도록 해라.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의 보안을 유지하려면 태평전장을 이용해야만 해.”

명철달은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머니의 온화한 말 뒤에 피도 보이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칼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그 말에 굴복하지 않았다.

‘사업을 하려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여러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법인데 태평전장만 믿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두 모자 사이에 벌어진 작은 의견 차이는 앞으로 아주 골치 아픈 일을 초래할 것이었다.

“만약 흠차 대인이 우리 집안을 몇 년 동안 가만히 둔다면 네 말대로 하겠지만, 만약 그가······ 우리 명씨 집안을 사지로 몰아넣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명청달이 허리를 굽히고 공손히 대답했다.

“군산회가 다음 달에 열리는데 시간을 맞추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노부인이 냉혹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살인은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명씨 집안이 강남 무림을 양성하며 조정의 시선에서 오랜 시간 보호해 줬으니 군산회도 그에 대해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니?”

노부인이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살인은 바로 범한을 죽이는 일이었다. 군산회는 추뢰가 이전에 범한을 대항할 방법으로 말했던 무림 대회와는 다른 곳이었다. 경국에는 소위 강호라는 것이 있었지만 진정한 강호는 절대 서호 옆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닥석 위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초야에 강남 수채 공봉 대인과 같은 고수들이 얼마나 많이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군산회는 강남에서 소위 고수라 불리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모이는 곳이었다. 군산회는 지금껏 알려진 적이 없었기에 이곳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진 곳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만약 범한이 단호하게 명씨 집안을 몰락시키려 한다면 백여 년간 명맥을 유지해 온 명씨 집안 역시 반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지금 6처 그림자와 전문 자객들이 강남에서 동이성 검수들을 쫓고 있는 상황이라서 범한의 경호가 보이는 것만큼 치밀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일을 줄곧 반대해 온 명청달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동이성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군산회에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어머니께서 잊으셨는지 모르지만 흠차 대인은 상당한 고수인 데다 곁에는 폐하께서 보내신 호위 무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더구나 가장 거슬리는 것은······ 북제 성녀인 해당타타가 계속 그와 동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부인이 미련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봤다.

“살인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지 성공 확률을 따지며 하는 게 아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나를 죽이려 하는 상대를 죽일 수 있을지 계산만 하다가는 죽일 기회를 얻을 수 없어.”

명청달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며 반박했다.

“설사 범한을 죽인들 저희가 얻는 게 무엇입니까? 폐하의 미움과 천하의 질타 속에서 명씨 집안이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물샐틈없이 치밀하게 일을 처리하고 천하가 모두 믿을 수 있는 답을 던져 주면 되지 않느냐?”

노부인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범한이 죽는다면 그건 당연히 동이성 사고검이 한 짓이 될 텐데 우리 명씨 집안이 미움을 받을 일이 뭐가 있겠니? 사고검은 요 몇 년간 누명을 여러 차례 썼으니 이번에 한 번 더 쓴다 해도 신경을 쓰지 않을 거다.”

명청달은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방법으로는 천하 사람들은 물론이고 폐하와 감찰원도 속일 수 없습니다.”

“만약 범한을 죽일 수 있다면······.”

노부인이 확신에 찬 무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 평화를 유지하는 게 가장 좋기는 하다만 만약 정말로 범한을 죽인다면 우리 경국의 지혜로운 폐하께서는 사생아 하나 죽었다는 이유로 강남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거나 자신의 통치 기반을 흔드는 짓은 하지 않으실 게다. 오히려 일의 파장을 최소화하실 거야.”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설명했다.

“범한이 살아 있는 게 명씨 집안이 유지되는 것보다 열 배는 가치 있는 일이지만 범한이 죽는 게 명씨 집안이 무너지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폐하가 우리 명씨 집안을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 집안을 무너뜨릴 수도 없으시지. 그래서 폐하께서는 범한이 우리 집안을 완전히 빼앗아 조정의 손에 쥐여 주기를 바라시는 거야. 만약 네가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나도 안심하고 권한을 네가 넘겨줄 거다.”

노부인이 한기 서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때가 되면 내 목숨으로 메울 일이 생길 테니.”

만감이 교차한 명청달이 울먹이며 말했다.

“어머니께서는 왜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몰래 냉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어머니께서 나이가 드셔서 그런지 상황 판단이 흐려지셨어. 어머니께서는 정말로 범한을 죽이면 폐하께서 우리 가문이 살아날 길을 열어 주실 거라 생각하시는 건가? 그리고 자신의 목숨으로 메우겠다니? 늙은 목숨에 그만한 가치가 있을 리가 없잖아.’

* * *

죽원관에서 나온 사천림이 깊은숨을 내쉬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그의 뒤에 있는 죽원관은 한창 수리가 진행 중이었다. 아직 개업까지는 시간이 있는 만큼 포월루를 강남에 진출시키는 계획은 수월하게 시작된 셈이었다. 다만 최근 이틀 동안 기생들을 사들이는 일에 작은 문제가 생겼다. 3 황자의 위세를 등에 업고 주변 기생집에서 기생들을 빼내기는 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인기 있는 기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사천립은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 아름다운 여자가 많기로 유명한 강남에서 왜 인기 있는 기생을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설마 누군가가 어디엔가 숨겨 둔 것일까. 방법을 찾지 못한 그는 결국 중개업자를 찾기로 했다. 하지만 중개업자가 성심껏 소개해 준 기생들은 대부분 강북에서 도망쳐 온 가여운 아이들이거나 부모가 팔아넘긴 아이들이었다. 만일 그런 아이들을 사들였다가는 범한이 불같이 화를 낼 게 뻔했다.

제자들 중에서 사천립은 머리 회전이 빠른 편이었지만 범한의 생각은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그저께 황실 금고에서 돌아온 범한은 소금 상인이 내준 장원 안에 종일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곧이어 있을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을 위해 어떤 준비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천립은 오늘 솜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상인이 되었음에도 십여 년 동안 힘들게 공부하면서 생긴 서생의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손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마차를 쓰다듬었다.

마차 옆을 지키고 있던 시위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마차에 오르지 않고 우두커니 밖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소주성 대로를 오가는 마차와 사람들을 본 사천립이 문득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어 즐거운 얼굴을 한 강남 백성들을 바라봤다. 미간을 찌푸리며 1년간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자신의 선택이 새삼 놀랍고 두려워졌다.

항주에서 양만리와 대화를 나눈 뒤부터 사천립은 줄곧 마음이 심란했다. 제자 네 명 모두 범한을 믿고 전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사천립은 세 명과는 달랐다. 그는 이미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벼슬길에 대한 희망이 옅어진 상태였다. 범한을 위해 은밀한 일들을 처리하고 남들은 모르는 비밀스러운 정보를 접하게 된 그는 갈수록 범한이 추측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스승인 범한이 자신처럼 천하를 돕고 백성을 위해 헌신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포월루를 강남에 진출시키는 이유는 범한이 감찰원 밖에서도 쉽게 천하의 정보를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돈세탁을 위해서였다. 범한이 하는 모든 일은 좋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희생되는 게 너무나도 많았다. 이를테면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거나 서생이 평생 지켜 온 정도가 무너지거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할 양심이 더럽혀지는 등의 일 말이다.

지금까지 범한을 근거리에서 봐온 사천립은 그가 자신이 바란 명신이 아닌 권신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확신하는 것은 역사에 이름을 남길 명신이 되려면 반드시 권력을 손에 쥐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과정에서 청렴함을 바라는 건 바보 같은 기대였다.

사천립은 지금 이 양립할 수 없는 철학적 문제에 빠져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자신의 스승을 믿고 묵묵히 마차에 오를 뿐이었다. 그가 오르자 마차는 곧바로 태평전장으로 향했다. 최근 사천립은 그곳에서 조달한 은전을 곳곳에 사용했다. 은전 5만 냥이란 액수는 그에게는 가슴 떨릴 정도로 무서운 액수였지만 작은 범 대인에게는 많다고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창밖 풍경을 바라보던 그는 속으로 앞으로 충분한 권력과 자원을 모아 자신이 원하는 천하를 위한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나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네.”

범한이 침착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양만리를 바라봤다. 황실 금고에서 소주로 돌아온 이후 그는 양만리를 불렀다. 규범을 따른다면 양만리는 함부로 근무지를 이탈할 수 없었지만 흠차 대인이 부춘현 관리를 부르는 만큼 다른 관리들도 양만리를 질책하지는 못했다.

양만리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제자가 걱정되어 그럽니다. 이 관료 사회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고 권력과 재물의 유혹도 상당하다 보니······.”

범한은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제자가 뭘 말하려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사실 범한은 네 명의 제자 중에서 양만리를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양만리는 말하는 게 직설적인 데다가 과거 어려웠던 시절을 항상 머릿속에 간직해 두고 청렴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은 청렴한 관리가 아님에도 범한은 양만리 같은 청렴한 관리들이 좋았다. 물론 사천립도 항상 청렴하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일을 할 때만큼은 그런 마음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두 제자 중에서 성가림은 타협할 건타협하고 거부할 건 거부하며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며, 후계상 역시 과거 경도에서 하종위와 함께 인재로 명성을 떨친 사람답게 생각이 냉철하고 일 처리도 과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먼 곳에 근무하고 있어 범한에게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범한이 지나친 걱정을 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저어 양만리의 말을 중단시켰다.

“내 뜻이 이렇게 단호한데 자네는 도대체 무슨 걱정을 하는 건가? 내가 어두운 길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 밝은 길을 보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인가?”

양만리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스승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걱정이 정말 지나친 건지 생각했다.

“금전은 도구일 뿐이네.”

제자의 이런 마음을 읽은 것인지 범한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

“탐욕스러운 사람들은 항상 은전을 이용해 어떤 생리나 심리적 즐거움을 얻으려 하지. 하지만 은전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 은전을 탐하는 것은······ 은전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네.”

양만리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욕망은 밑 빠진 독과 같아서 절대 채워질 수 없습니다. 세상에 은전이 충분히 있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은전을 탐내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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