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화
청와의 발걸음은 빠르지는 않았지만 단호했다. 그는 최대한 빨리 육지로 돌아가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돌아가야 하기도 했지만 정보를 보고하지 않으면 제사 대인이 조급해하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걸어가던 그는 자꾸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뒤에 시체가 되어 있는 해적들은 모두 죽어도 마땅한 이들이었지만 반년 동안 동고동락한 동료이기도 했다. 강철처럼 단단한 그의 마음에 어떤 감정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청와의 마음속에 분노라는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명씨 집안이 해적과 결탁한 증거야. 더욱이 어젯밤에 들이닥친 군대는 엄청나게 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어. 섬에 있는 해적을 모두 죽이려면 강력한 수군을 동원해야만 했을 텐데······ 설마 섭씨 집안에서 움직인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던 그는 자신에게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최대한 빨리 이 정보를 들고 소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청와란 사람은 바로 천주에 주둔한 감찰원 4처 순찰사 외곽 조직의 다섯 까마귀 중 하나로, 범한에게 명씨 집안과 해적의 관계를 보고하는 밀정이었다.
* * *
섬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강남 소주성 밖에 위치한 명원의 청아한 아름다움에는 세속적인 분위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서 명씨 집안의 주인인 명청달이 공손하게 의자에 앉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노부인이었다. 장 공주 앞에서도 이처럼 공손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명청달이지만 이 노부인 앞에서만큼은 고개를 숙이고 한없이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이 노부인은 명씨 집안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그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과거 노부인이 마음을 굳게 먹고 가장 큰 총애를 받았던 첩을 독살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일곱째를 집에서 내쫓지 않았다면 명씨 집안의 어마어마한 재산은 아마 명청달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졌을 것이다.
명청달은 자신의 연로하신 어머니를 볼 때마다 나이가 많을수록 지혜로워진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집에서 쫓겨난 일곱째가 생각났다.
‘이미 죽었겠지······. 일곱째의 시신은 어딘가에 백골이 되어 있을 거야.’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계속 살아 계시면 자신이 명씨 집안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낙심했다.
“너무 늦게 움직였어.”
노부인이 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냉혹한 얼굴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깨끗하게 씻어 내고 싶었으면 2년 전에는 움직였어야지.”
명청달은 총명하기로 유명했기에 명씨 집안의 막대한 재산을 관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 앞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한없이 고분고분 행동했다.
“2년 전에 움직였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야 2년 전에 황궁에서 범한과 임완아의 혼사가 결정되었으니까!”
노부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아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명청달은 마치 자신이 잘못했다는 양 공손한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설사 그때 범한이 강남에 내려와 황실 금고를 장악하리라는 걸 알았다고 한들 그가 황상의 사생아이고 섭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몰랐을 것 아닌가. 또 그가 훗날 감찰원을 이끌 거라고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어? 어머니는 정말이지 어리석으시다니까.’
노부인이 다시 큰소리로 야단을 쳤다.
“이번에 내가 늙은 몸을 이끌고 군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면 감찰원에서 그 섬을 조사했을 거다. 그럼 범한의 성격상 우리에게 어떤 짓을 했을지 상상이 가느냐?”
명청달은 속으로 냉소를 지으며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다가 잠시 뒤 공손하게 대답했다.
“어머니의 심기를 어지럽혔으니 소자의 잘못입니다.”
“란석이는 지금 어떠니?”
명씨 집안 노부인이 아들을 차갑게 노려보다가 손자에 대해 묻자 명청달은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그 아이도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압니다. 그리고 요 몇 년간 그녀에게 잘 대해 주기도 했고요.”
“사내란······.”
그의 어머니가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어쩜 이리도 한결같은지.”
노부인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란석이한테 원 대가와 교제를 줄이라고 해라. 며칠 전에 성안에서 기생집을 열려고 하는 흠차 대인 제자에게 죽원관을 팔고 난 뒤 원 대가와 함께 흠차 대인의 장사를 망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같더구나. 한마디로 우리가 세운 방법과 반대로 가려 하는 것이지.”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원 대가는 정왕 세자의 여인이니 란석이에게 넘볼 생각은 하지 말라고 당부해라. 게다가 너도 알다시피 범씨 집안은 원몽을 뼛속 깊숙이 미워하고 있다. 만일 범한이 원몽이 소주성 안에 있다는 걸 안다면 당상 찾아내 죽이려 할 거야. 이런 상황에서 란석이가 그녀와 교제한다면 위험하지 않겠니.”
알았다고 대답한 뒤 방을 나서려 하던 명청석의 귓가에 노부인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계획을 세워 두긴 했지만 작은 범 대인이 무지막지한 방법을 사용해 황실 금고를 장악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는구나.”
명청달이 잠시 생각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흠차 대인이라도 천하의 명망 있는 저희 집안을 아무런 증거도 없이 건들지는 못할 겁니다.”
머리와 눈썹이 모두 하얗게 세고 주름이 가득한 노부인의 얼굴에서 냉혹함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아들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차갑게 응수했다.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은전 40만 냥도 받지 않는 걸 보면 흠차 대인은 더 많은 걸 원하고 있는 거야. 이 세상에서 우리 명씨 집안 말고 그에게 그만한 은전을 안겨 줄 수 있는 곳이 있을 것 같으냐?”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은전 40만 냥을 마련해 범한에게 보낼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범한이 받지는 않았지만 역대 최대 뇌물 액수로 역사책이 남을 만한 일이었다. 범한이 은전 40만 냥은 마다했다는 것은 분명 더 많은 걸 원한다는 뜻이었다.
“소자가 보기에······.”
명청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흠차 대인이 은전을 받지 않은 게 꼭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작년 9월에 일석거에서 최씨 집안이 은전 2만 냥을 건넸을 때 작은 범 대인은 웃으며 받고는 최씨 집안을 무너뜨렸지요. 그러니 은전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의향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뇌물의 성격과 효과가 변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범한이 최씨 집안에게 은전 2만 냥을 받고 단숨에 무너뜨린 것은 굉장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 뇌물은 항상 통한다는 세상 사람들의 믿음을 깨뜨린 범한의 행동은 이후 강남 상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아들의 말에 노부인이 힘없이 축 처진 볼을 끌어 올리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최씨 집안은 너무 옹졸하게 행동했을 뿐만 아니라 사태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북제 상경에서 최씨 집안 공자가 범한의 심기를 건드려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 일이 있지 않았니. 그런데 은전 2만 냥이 모든 게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게 어리석은 게지. 작은 범 대인이 은전을 받은 것은 최씨 집안을 건들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경에서의 일을 더는 마음에 두지 않겠다는 표시였을 뿐이야. 이후의 일까지 보장한 건 아니었단 말이다.”
여기까지 말한 노부인이 숨을 고르다 물었다.
“혜아는 요즘 어떠니?”
명청달이 대답했다.
“기분은 좀 나아진 것 같습니다.”
최씨 집안과 명씨 집안은 장 공주의 계획에 따라 혼인을 맺었다. 이에 지금 말하는 혜아는 바로 명란석의 정실부인 최지혜를 말하는 거였다. 범한이 최씨 집안을 공격했을 때 핵심 인물들은 연소을에게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지만 집안은 무너지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에 명씨 집안에 시집온 그녀는 매일 암담한 심경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집안일을 물어보던 노부인이 다시 본래 문제로 돌아와 물었다.
“태평전장 대행수가 그저께 와서는 우리 집안이 요구한 은전이 거의 준비되었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며칠 전에 또 그가 와서는 초상전장 이야기를 하던데······ 무슨 일이 있는 게냐? 어떻게 나는 그동안 들은 소식이 없는 거지?”
“소자가 태평전장에 약간 우려되는 부분이 있어 알아본 것입니다.”
명청달이 미간을 찌푸리며 설명했다.
“이전에 말했던 사천립이란 자가 전장에서 상당한 액수의 은전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만약 조정이나 흠차 대인이 누군가를 심어 두었다면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초상전장은 작년 처음 동이성에서 개업을 시작한 곳입니다. 어머니도 아시다시피 지금 전장은 대부분 동이성에서 나왔습니다. 지분과 배경을 제가 조사해 본 결과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서 흠차 대인이 가격을 올릴 게 분명해 보이므로 앞으로 매상을 담보로 잡아 태평전장 말고 다른 곳에서 돈줄을 마련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부인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냉소를 머금었다.
“배경이 어떻기에 문제가 없으리라 확신하는 게냐?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서 필요한 돈을 그깟 작은 전장에서 조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냐? 범한이 강남에 내려온 것에 겁을 먹고 쓸데없는 짓까지 하는구나.”
명청달은 마음속으로는 반감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은은한 미소를 유지하며 설명했다.
“믿을 만한 배경을 가진 곳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초상전장의 배경이 누구일 거라 생각하십니까?”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아는 거나 빨리 말해라.”
노부인이 눈을 부릅뜨며 제 아들을 노려봤다. 그러자 명청달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한 뒤 입을 열었다.
“조사해 본 결과 초상전장의 지분 대부분은 심씨 집안의 것이었습니다. 북제 조정의 추적이 너무 심해 심씨 집안의 돈을 관리하던 사람이 동이성으로 도망쳐 초상전장을 연 것입니다.”
“심씨 집안이라고?”
노부인이 마침내 흥미가 생기는지 두 눈을 반짝였다.
“북제 진무사 지휘사였던 심중을 말하는 거냐?”
“맞습니다.”
노부인이 한참 말없이 생각하다가 웃었다.
“그 집 여식이 홀로 도망쳤다는 말은 들었는데······. 하물며 북제 조정에서 심씨 집안의 자산을 몰수할 때 일부 재산을 찾아내지 못했다지? 심중은 최씨 집안과 함께 황실 금고 상품을 북제로 밀수하는 일을 했으니 상당히 많은 돈을 모았을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말이 맞는다면 초상전장이라는 데도 재력을 가지고 있겠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초상전장의 진정한 배후가 동이성에서 굉장한 세력을 가진 가문이라는 겁니다.”
명청달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재빨리 말했다.
“심중은 북제 황제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고 이 일에는 작은 범 대인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초상전장은 절대 작은 범 대인이나 북제와는 거래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명씨 집안은 논밭과 장원 안에 숨겨 둔 방대한 은전을 제외하고 장사로 벌어들인 은전은 대부분 태평전장에 보관했다. 그리고 태평전장에서 돈을 찾을 수 있는 인장은 항상 명청달의 어머니가 쥐고 있었다. 그러니 명씨 집안의 주인이라 불리지만 사실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명청달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초상전장을 추천하는 데에는 또 다른 속셈이 숨겨져 있을 수 있었다.
노부인은 제 아들이 다른 속셈을 품고 있다는 걸 아는지 미소를 거두고 차갑게 물었다.
“사천립이란 자가 태평전장에서 돈을 얼마나 찾았는지는 알아보지 않은 거냐?”
허를 찌르는 질문에 명청달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면서 애써 차분히 대답했다.
“태평전장에 물어보니 그곳 대행수가 규정을 어기고 액수를 알려 줬습니다. 사천립이 찾은 돈이 어디서 온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분명 범씨 집안의 돈일 거라 하면서 액수는 대략 5만 냥 정도 된다고 했습니다.”
노부인이 콧방귀를 뀌고는 아무 말 없이 제 아들을 바라봤고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운 명청달은 갈수록 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