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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401화 (401/1,108)

401화

“됐다. 우리에게 찍힌 낙인이 너무 짙어서 그쪽과 관계를 끊으려 한들 가능한 일도 아니고, 사람들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 문제는 더는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그럼 곽쟁 대인은······ 개인적으로 온 것입니까? 아니면 경도 쪽을 대신해서 온 것입니까?”

명란석이 궁금해하며 묻자 명청달의 눈가에 파인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관리가 이곳을 개인적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더냐?”

말뜻을 알아들은 명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긴장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오늘 곽쟁이 온 것은 장 공주마마의 의견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걱정할 것 없고 경도 쪽 의견을 신경 쓸 것도 없다. 마마께서는 우리가 흠차 대인을 음해하길 바라시지만······.”

명청달이 천하의 갑부다운 차디찬 미소를 지었다.

“그건 곧 우리보고 칼잡이 노릇을 하라는 게지. 내가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따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지 않으냐. 물론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또 장차 용상의 주인이 될 사람이 누구일지 겉으로는 따르는 척해야겠지.”

명란석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 생각했다.

“명령은 이미 내려 두었습니다. 다만 흠차 대인이 강남에 있는 동안 숨죽이며 있어야 한다는 것이······ 소자가 보기에 이렇게 숨을 죽이고 지내는 게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야.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가장 좋은 방법이야.”

명청달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제 아들을 바라봤다.

“범 제사는 주변 여론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탐욕만 채우려 하는 마귀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약점을 보이지 않는다면 강남의 관리와 세도가들의 반항이 두려워서라도 우리를 단숨에 무너뜨리지는 못할 게다. 그러니 우리가 항상 신중하게 행동하면서 범 제사의 체면을 세워 준다면 그도 우리의 체면을 신경 써줄 거야.”

“하지만 작은 범 대인은······ 2 황자마마의 체면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버지의 눈치를 보던 명란석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명청달도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상인은 역사에 이름을 올릴 수 없는 신분이지. 하지만 내가 봤을 때 범 대인은 좀 다른 것 같더구나. 과거 섭가 여사장의 아들이라서 그런지 관리는 공격해도 백성은 해치지 않고 상인에게도 어떤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아. 더구나 2 황자마마가 반격을 한들 뭘 할 수 있겠느냐? 기껏해야 관리들을 이용해서 모함하는 것뿐이지. 반면 우리는······ 민간의 힘을 동원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기까지 말한 명청달은 잠시 생각하다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절대 그를 건들지 않을 거야.”

아버지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있던 명란석은 마음이 답답해졌다. 최근 며칠 동안 아버지는 범한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말을 셀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이번 일에 아버지가 이처럼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마음속에서 울화가 솟구쳤다.

“아버지, 이번에는 어차피 힘들 것 같으니 차라리 손을 놓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현재 강남의 최고 부자인 명청달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반백 년을 산 그가 단호한 눈빛으로 제 아들을 바라봤다.

“손을 놓고 싶어도 놓을 수 없는 일이 있다.”

말하는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우리가 손을 놓으면 우리 가문과 얽혀 있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절대 잊지 말 거라. 경도에 있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 무상주를 가졌는지. 우리가 손을 놓는다고 해서 그분들이 우리에게 은전을 요구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느냐? 장 공주, 황태자, 2 황자, 경도 고위 관리들은 이미 우리에게 돈을 받아먹는 게 습관이 되어 있어.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정말 손을 놓아 버린다면 그분들이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겠니? 황족과 관리들의탐욕을 절대 얕보아서는 안 된다.”

명란석이 동정 어린 시선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강남 최고의 갑부에게 이런 사정이 있다는 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었다. 명청달도 아들의 생각을 아는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명씨 집안은 겉보기에는 휘황찬란한 권세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분들 눈에는 알을 낳는 닭과 다르지 않단다. 만약 닭이 알을 낳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니? 그러면 흠차 대인이 뭘 하려 하기도 전에 원래 우리를 지켜 줬던 사람들이 먼저 우리를 잡아먹으려 할 게다.”

불만 가득했던 표정을 거둔 명란석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경도에 있는 그분들이 매년 은전을 가져가지 않는다면 저희 집안도 정정당당하게 황실 금고 상품 대리 판매만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황실 금고를 흠차 대인이 끊는다고 해도 저희 집안은 강남 곳곳에 있는 산업으로 집안을 유지해 갈 수도 있고요.”

명청달이 손을 내저으며 이 일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를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명씨 집안이 떳떳하지 못한 장사를 해온 건 그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어. 이번에 작은 범 대인이 강남에 내려온 건 어쩌면 하늘이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일 수도 있단다. 이번 기회에 그런 일들을 정리하고 올해를 시작으로 점차 경도로 보내는 액수를 줄인다면 장 공주 쪽도 뭐라 하지는 못할 게야. 이번 공개 입찰에서는 최소한 작년의 6할 정도를 낙찰받는 걸 목표로 해야 한다. 최씨 집안처럼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으려면 정정당당하게 장사를 하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겠니?”

명란석이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대답했다.

“아버지 말씀이 옳습니다.”

사실 그는 말만 그렇게 할 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장부에는 기록되지 않는 동의성으로 보낸 밀수품들과 해외 해적들이 거둬들인 수입은 상당한 액수였다. 경도 쪽에 계속 돈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이런 수입마저 포기한다면 손해를 볼 게 분명했고, 분명 그 손해는 집안의 재산으로 채워야 할 터였다. 만일 흠차 대인이 계속 강남에 머물러 집안의 재산으로 손해를 보충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아무리 부유한 명씨 집안이라도 버틸 수 없을 것이었다.

명청달은 제 아들이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상황을 설명하거나 괜찮다고 안심시키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들의 걱정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명씨 집안이 과거의 일들과 결별하고 자력으로 살아남으려 한다면 앞으로 2년 동안은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할 거였다.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명란석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소자, 요 이틀 동안 대가들을 만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가들이란 황실 금고 입찰 공고에 참여할 수 있는 강남 일대 거상들을 말하는 거였다. 그가 아버지를 힐끗 쳐다본 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잘 알고 지내던 몇몇 집안을 찾아가 본 결과 영남 웅(熊)씨 집안과 천주 손(孫)씨 집안에서도 현재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 집안 모두 황실 금고 판매권을 탐내는 눈치였으나 최씨 집안이 남긴 몫에만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저희와 가격 경쟁을 벌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청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입이 좋으니 어느 집안에서든 가지고 싶어 하겠지. 하지만 강남에서 계속 장사를 할 생각이라면 우리와 대놓고 경쟁하지는 못할 게다.”

이 말을 하는 그의 얼굴에서 비로소 강남 최고의 부자에 걸맞은 자신감과 거만함이 보였다.

“중요한 건 소금 밀수 상인들입니다.”

명청달이 미간을 찌푸리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소금 밀수 상인들은 이득 앞에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다 보니 상당한 여윳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공개 입찰에 참여해 기존의 관행을 어지럽힌다면······.”

강남에서 가장 부유한 건 뭐니 뭐니 해도 황상과 염상들이었다. 그동안은 양쪽 모두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최씨 집안이 무너지면서 소금 상인들이 황실 금고 영역에 눈독을 들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만일 정말로 자금이 많고 조정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소금 상인들이 입찰에 참여한다면 명씨 집안으로서는 상당한 골칫거리가 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소주성에 있는 몇몇 소금 상인들을 제가 만나 봤습니다.”

그가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이 이틀 동안 겪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만난 소금 상인들 모두 올해는 황실 금고 쪽 일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 이들이 왜 포기한 것인지 소자도 잘 모르겠습니다.”

의외의 소식에 놀란 명청달이 잠시 생각하다가 무언가 이해한 듯 착잡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작은 범 대인이 상품 출하 경로를 손보려 한다는 소식을 모두가 들은 모양이구나. 그러니 이익을 눈앞에 두고도 싸우려 하지 않는 거겠지. 소금 상인들은 올해 우리 명씨 집안과 흠차 대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내년 입찰에 나설 생각일 거다.”

명란석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하지만 소금 상인들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신중하게 움직일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을 뒤에서 받쳐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느냐?”

명청달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강남로를 담당하는 설청 대인이시다. 설청 대인은 범 대인의 생각을 빤히 알고 있으니 최소한 올해 한 해 동안은 소금 상인들이 황실 금고 일에 참여해 범 대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막으시겠지. 이로써 설 대인은 작은 범 대인과 경도에 있는 범 상서와 진 원장의 체면을 세워 주는 게야.”

놀란 명란석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은 없다.”

명청달이 잠시 생각하다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흠차의 위세가 대단하니 아무도 판세에 끼지 않으려는 게지. 우리도 어떻게든 입찰 문서를 손에 쥐고 올해 한 해를 순탄하게 보내야 한다.”

“흠차 대인이······ 우리를 어떻게 하려 할까요?”

아들이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묻자 명청달이 대답했다.

“모든 일이 분명한데 흠차 대인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느냐? 장사 일에서만큼은 우리가 흠차 대인보다 한 수 위야.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의 경우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르는 사람이 가져가는 거니 문제 될 게 없지. 황궁에서도 사람이 오고 강남로에도 보는 눈이 많은 데다가 황실 금고 전운사가 조작할 수 있는 일도 아니야. 그러니 우리 명씨 집안이 당당하게 은전으로 승부를 보려 한다면 작은 범 대인도 어쩌지는 못할 게다.”

“소자의 말은 흠차 대인이 몰래 다른 집안을 동원해 공개 입찰에서 일부러 가격을 올리지 않겠냐는 겁니다. 이거야말로 흠차 대인은 손해를 보지 않고 저희만 손해를 보게 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아닙니까.”

명청달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강남로에서 작은 범 대인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사람이 없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흠차 대인을 제외하고 우리 명씨 집안의 미움을 살 만한 배짱을 가진 사람도 없어. 네가 이틀 동안 알아본 대로 주변 상인들은 올해는 방관자로 상황만 지켜보려 할 게다.”

아들을 안심시키던 명청달이 미간을 찌푸리며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만일 허수아비를 세워 가격을 올린다면 입찰 경쟁할 만한 돈이 있어야 하는데 흠차 대인에게 그만큼의 돈이 있겠니?”

명청달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비웃는 듯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상자에 들어 있는 13만 은전을 만약 우리 집안을 공격하는 데 쓰려 한다면 관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게야.”

돈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은 사실 명씨 집안이 가장 잘하는 거였고 이번에도 은전 40만 냥으로 범한을 쓰러뜨리려 시도했었다. 물론 이번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정도 수준이면 돈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제 편으로 이끌 수 있었다.

“흠차 대인의 아버지는······ 경국 국고를 담당하는 호부 상서입니다.”

명란석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상기시켰다.

“돈으로 말한다면 저희 집안보다야 호부 상서가 가진 은전이 더 많겠지요.”

“범 상서 말이냐?”

명청달이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으며 거만하게 말했다.

“호부는 움직일 수 없다. 만약 흠차 대인이 우리 명씨 집안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호부 상서의 힘을 사용한다면······ 이 일은 끝난 거나 다름없지. 장 공주마마께서 계속 조용히 계시는 건 분명 그 순간을 기다리기 때문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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