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400화 (400/1,108)

400화

“우리가 작은 범 대인의 그릇을 너무 작게 봤어. 호부 상서의 아들인 걸 망각했던 거지. 40만 냥으로 황자의 마음은 살 수 있겠지만 작은 범 대인의 마음은 살 수 없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아까 이런 방법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거고.”

“장 공주 쪽은 어떻습니까?”

추뢰가 약간 원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명씨 집안이 장 공주를 위해서 이만큼 많은 공을 쏟았으면 그쪽에서도 신경을 써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명란석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매수되지 않는 관리는 원래 경도 조정에서 모함해서 끌어내려야 하는 건데 이것도······ 쉽지는 않을 것 같아.”

“어째서요?”

놀란 추뢰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명란석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작은 범 대인이 어떤 사람이니? 그의 뒤에는 진 원장과 범 상서 대인이 버티고 있어. 임약보 대인도 관직에서 물러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세력을 가지고 있고. 폐하께서 아무런 의향도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 관리가 우리를 위해서 작은 범 대인을 건들려 하겠니? 너희 도찰원에서 두 차례 작은 범 대인을 공격했다가 오히려 폐하의 미움을 받았잖아.”

그때의 일이 떠올라 추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은 이전과는 다릅니다. 작은 범 대인이 멀리 강남에 있어 자신을 변호할 수 없고 또 감찰원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지난날처럼 민첩하게 대응하지도 못할 겁니다. 작은 범 대인과 폐하의 관계가 각별하다고 하지만 황자도 강남에서 소란을 피우면 경도로 불려가는데 작은 범 대인은 다르겠습니까? 그러니 일을 시끄럽게 만든다면 폐하께서 작은 범 대인을 경도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명란석이 빈정거리는 말투로 반박했다.

“이래서 너희 같은 관리들이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거야. 너 같은 관리들은 항상 관직의 등급이나 신분만 보려 하지. 너는 명씨 집안이 황자가 와도 기를 죽여 돌려보낼 방법을 가지고 있는 만큼 폐하의 사생아인 범한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우리 집안에서 문제를 보는 시각은 너희 관리들과는 달라. 우리가 봤을 때 작은 범 대인은 권력, 병력, 돈, 명예까지 모두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감한 방법도 서슴없이사용하는 사람이야. 설사 작은 범 대인에게 오점을 남겨 조정이 모함하게 해도 감찰원에서 전부 말끔하게 처리할 거야. 그러니 그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작은 범 대인은 황자들보다도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야.”

잠시 말을 멈춘 명란석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만약 네 의견대로 강남 백성들을 선동해 소란을 일으킨다면······.”

말꼬리를 늘이던 명란석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작은 범 대인이 흑기들을 이끌고 소주로 와서 우리 명씨 집안을 멸족시킬 수도 있어!”

추뢰가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뒤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럴 수 있을까요? 작은 범 대인이라 해도······ 조정의 체면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경국 법률은 그냥 장난으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놈은 미친놈이니까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명란석이 이를 갈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교양 있는 척 행동하는 미친놈이라고. 그러니까 되도록 건드려서는 안 돼. 정말로 깔끔하게 없앨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건드려야 해.”

그러자 추뢰가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살며시 물었다.

“무림 대회를 이용하면 어떻습니까?”

명씨 집안은 은밀히 강남 무림을 통제하고 있었다. 물론 셀 수도 없이 많은 강호 고수들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었지만 추뢰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흉악범들을 이용한다면 굳이 흠차 대인의 마음을 얻으려 애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명란석이 모자란 백치를 볼 때처럼 가엽다는 눈으로 추뢰를 바라봤다.

“작은 범 대인이 9품 강자라는 걸 잊은 거냐? 설마 폐하께서 가장 뛰어난 호위 무사들을 골라 작은 범 대인과 같이 내려보냈다는 걸 모르는 거야? 감찰원에서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6처 검수들이 항상 작은 범 대인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거야? 북제 해당타타 낭자가 항주에서부터 작은 범 대인과 같이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거냐고!”

명란석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졌다. 그는 평소 총명해 보였던 친척 관리가 오늘따라 정말 바보 같이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지 그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무림 대회? 아버지의 부탁으로 동이성에서 온 운 대가라는 사람은······ 서호에 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정체 모를 자객에게 당했어! 그리고 동이성에서 온 그 거지 같은 고수들은 상갓집 개처럼 괴상한 자객을 피해 도망 다니고 있는 상황이야. 운지란! 동이성! 사고검의 제자들까지 범한을 처리할 여력이 없다고. 설마 강남에 있는 무인들이 작은 범 대인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추뢰는 비로소 범한이란 권신을 처리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천하에서 범한은 분명 다루기 가장 힘든 사람이었다. 세상에 범한보다 돈이 많은 사람은 많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범한처럼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범한보다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은 범한만큼 무공이 높지 못했다. 또 범한보다 무공이 높은 사람은 범한만큼 뻔뻔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범한보다 더 뻔뻔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범한만큼 강한 뒷배경을 가지지 못했다. 범한보다 더 큰 뒷배경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돈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고 모함으로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또 그는 누가 자신을 암살할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도 겁내 하지 않았다. 그저 직접 칼을 휘둘러 눈에 거슬리는 자들의 머리를 베어 버릴 뿐이었다.

이것은 십여 년 전에 만들어진 기형적인 조건 때문이었다. 숨겨진 황자인 그는 그런 기형적인 조건 덕분에 황자도 가질 수 없는 감찰원과 호부를 동시에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십여 년 동안 조정에 암암리에 영향을 끼치고 있던 장 공주와도 대적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명씨 집안이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생각에 잠겨 있던 추뢰가 명란석을 위로했다.

“지금 소주에 계신 곽 대인의 의견을 듣고 경도에 있는 장 공주마마가 힘을 쓰실 겁니다. 형님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범한이 지금 저렇게 오만하게 굴고 있으니 황태자와 2 황자께서도 마음이 편치 않으실 테니, 작은 범 대인을 경도로 돌려보내지는 못해도 황실에서 말이 나온다면 그의 기세를 누를 수는 있겠지요.”

명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는 가까스로 상황을 유지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가 ‘곽’ 자를 듣자마자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네 상사를 이 일에 끼어들게 해서는 안 돼! 예전에 형부 관아에서 범한에게 매질을 했다가 강남으로 쫓겨났으면서······ 아직도 보복을 생각하고 건가? 흠차 대인이 뒤끝이 긴 사람이라는 걸 잊은 거야? 곽쟁이 이 일에 끼어들었다가는 결과가 어떻게 되든 우리도 덩달아 미움을 받게 될 거라고!”

천하 사람 중에서 감찰원 원장 진평평 대인이 거주하는 진원을 볼 자격이 있는 사람이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이에 사람들은 민간에서 가장 아름답고 진귀한 건축물로 신양의 이궁, 동이성의 검려, 강남 명씨 집안의 명원을 손꼽았다. 물론 북제 상경성에 있는 검은색과 푸른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신선이 사는 궁정과 같은 매력을 지닌 황궁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궁 안에는 황족이 살고 있었고, 검려 안에는 대종사 중 한 명인 사고검이 살고 있었기에 일반 백성들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다만 강남 소주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명원은 천하 백성들도 가까이서 즐길 수 있었다.

명씨 집안은 자신들의 세력을 믿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명문 귀족 집안의 신비감을 유지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남의 지식인이나 멀리서 여행을 온 여행객들은 소주성을 구경한 뒤 숲 사이로 나 있는 넓은 대로를 따라 성 밖을 둘러보다가 멀리 아름다운 명원을 구경할 수 있었다. 들어가서 놀아볼 수는 없었지만 워낙 아름다웠기에 멀리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웠다.

지은 지 거의 40년이 된 명원은 항상 겸손하고 거리감 없이 행동하는 명씨 집안을 대표하는 건축물이었다. 안에 있는 계단과 정자, 벽돌 하나, 기와 한 장, 심지어 심어진 풀과 나무들까지 어느 것 하나 눈을 자극하는 화려함은 없었다. 오히려 은은하게 친근한 분위기를 풍겼다. 게다가 산을 따라 둘린 담은 높지 않아서 여행객들이 도로에 서서 안에 처마를 볼 수 있었고, 담 가까이 다가가면 졸졸 물 흐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명원은 친근하지만 일반적이지 않았고, 검소하지만 단순하지 않은 곳이었다. 만일 전문가가 보았다면 이 거대한 장원은 세밀한 부분까지도 흠잡을 데가 없으며 최상의 목재와 가장 정교한 설계로 지어졌다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군인이 이곳을 봤다면 겉보기에는 방어 능력이 없어 보이지만 간단한 개조를 거친다면 반년 넘게 함락되지 않을 성루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 낼 것이었다.

오늘 날씨는 그리 좋지 않았다. 꽃샘추위에 바람이 매서운 데다가 안개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명씨 집안 공자가 탄 마차는 외롭게 집으로 가는 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아서 그런지 항상 보이던 여행객이나 나들이 온 여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대문으로 가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명란석이 마차 창문 발을 걷어 음침함이 가득 피어난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의 집 대문 쪽을 바라봤다. 관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화가 잔뜩 난 얼굴을 하고 자신의 마차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명란석이 발을 내려 창문을 다시 가린 뒤 고개를 돌려 추뢰를 노려봤다.

“곽쟁이 왔어. 곽쟁이 여기까지 왔다고. 네 상사는 정말 이렇게까지 눈치가 없는 사람이야?”

추뢰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작년에 경도에서 도찰원 좌도 어사로 부임한 곽쟁은 그의 직속 상사로 춘시 사건 이후 곽쟁은 형부 3사를 이끌고 범한을 심문했었다. 당시 장 공주의 지원을 받고 있던 그는 범한에게 매질을 해 자백을 받아 낼 생각이었지만 범한은 예상했던 것보다 어마어마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범한을 무너뜨리지 못한 건 물론이고 임 재상과 범씨 집안, 감찰원의 미움을 받게 된 그는 찍소리 한번 내보지 못하고 경도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와 함께 범한을 공격한 형부 상서 한지유는 관직에서 강등당했고 곽쟁은 강남으로 쫓겨났다.

어사 대부 곽쟁은 자신의 인생이 꼬인 건 모두 범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속 깊이 범한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던 그는 범한이 이번에 강남에 내려온 걸 기회로 명씨 집안을 이용해 공격할 생각이었다.

이게 바로 명란석이 똥 씹은 얼굴로 추뢰를 노려보고 있는 이유였다. 곽쟁이 오늘 이곳까지 온 것은 분명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자신의 집안을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 * *

“아버지, 모두 만나 보았습니다.”

명란석이 공손히 명원 한쪽에 위치한 작은 건물 돌계단에 서서 안에 대고 말했다. 방 안에서 명씨 집안의 주인인 명청달의 피곤함과 안도감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어떻게 해서든 이번 한 해는 견뎌야 하니 가족들에게도 관부에 약점이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하거라. 그리고······ 란석이 너야 항상 침착하게 행동하지만 이번에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명란석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방 안에서 느릿느릿한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명청달이 피곤한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오면서 곽쟁을 만났느냐?”

명란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네, 아버지. 저렇게 당당하게 찾아오니 혹여나 흠차 대인의 눈에 띌까 걱정됩니다.”

명청달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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