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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97화 (397/1,108)

397화

“낭자도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범한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다시 해당타타를 바라봤다.

“저는 항상 낭자의 얼굴이 단정하고 위엄이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말문이 막힌 해당타타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지금 저를 칭찬하시는 겁니까, 놀리시는 겁니까?”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 낭자가 제가 낭자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이유를 말하면서 외모를 언급했기에 하는 말입니다.”

해당타타가 꼴사납다는 표정으로 그를 흘겨봤다. 그런데도 범한은 눈썹을 긁으며 뻔뻔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와 비교하시면 안 됩니다. 이 세상 여자 중에서 저와 비교해서 미인이라 말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그러고는 괴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이어 말했다.

“이건 저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제 아버지의 문제이지요.”

소박하게 생활하는 해당타타도 어쨌거나 10대 아가씨였고, 장님이 아닌 10대 아가씨라면 모름지기 외모에 신경이 쓰이는 법이었다. 이에 그녀는 범한이 위로하는 척하면서 자신을 놀리자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녀가 입술을 삐쭉거리며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고관이 채신머리없이 헛소리를 지껄여서 되겠습니까?”

해당타타가 화난 사실을 모르는지 범한이 진지하게 설명했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 아닙니다. 낭자가 조금 전에 제가 낭자를 좋아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본인의 외모가 예쁘지 않아서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보기에 낭자의 외모가 못나지 않으니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해당타타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범한은 속사포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선례로 제 아내를 말하자면 경도 사람들은 그녀의 외모가 소박하다고 하지만 제가 봤을 때는 절세미인처럼 보입니다.”

그가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아무래도 제가 가진 미의 기준이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는 달라서겠지요.”

마지막 말이 결국 해당타타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녀가 끙 소리를 내며 소매를 세차게 털고는 가버렸다. 소매를 어찌나 세게 털었는지 바람도 불지 않는데 풀들이 흔들릴 정도였다. 아무래도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소매를 털 때 정기가 실린 것 같았다.

놀란 범한이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풀밭 위에서 쓰러지지 않으려 몸을 앞뒤로 흔들며 균형을 잡았다. 곧이어 기쁨에 겨운 그의 웃음소리가 풀밭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해당타타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이런 식으로 놀리면 내가 화를 풀 줄 알았습니까?”

범한이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쉬었다.

“해당타타, 아직도 화가 나 있었습니까?”

해당타타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려 마차로 걸어갔다. 이때 6처 검수들은 이미 마차에서 내려 경호를 서고 있었고, 고달을 수장으로 한 호위 무사들도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해당타타를 주시하고 있었다. 범한을 지켜야 하는 이들은 방금 심상치 않은 바람을 느끼고는 혹시나 해당타타가 공격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나온 것이었다.

범한이 능청맞게 웃으며 해당타타를 향해 소리쳤다.

“나랑 같이 갈 데가 있으니까 마차에 오르지 말아요.”

그가 고달에게 괜찮으니 물러가라는 손짓을 한 뒤 해당타타를 데리고 관도 옆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마차에서 멀리 떨어진 숲으로 들어갔다. 빽빽하게 자라난 나무들 사이로 봄 햇살이 새어 들어오며 두 사람의 옷에 각양각색의 무늬를 만들어 냈다.

“저는 신임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범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건 아마도 믿을 만한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서이겠지요. 그래서 지난번 낭자가 관저에서 나가겠다고 했을 때 약간은 실망했습니다.”

해당타타가 고개만 숙이고 아무 말이 없자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해당타타 낭자도 신입을 중시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나라를 섬기고 있는 만큼 서로를 신임하지 않으면 같이 일을 해나갈 수 없습니다.”

범한의 의도는 비교적 단순했다. 그는 이제 와 다시 해당타타에게 공방을 정말 몰래 염탐하려 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오해했던 것인지를 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두 사람 사이의 신임을 다시 회복하고 싶었을 뿐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주머니가 없어 두 손을 소매 안에 넣고 있던 해당타타가 범한이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는 걸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시선을 느낀 범한이 설명했다.

“사사가 감찰원 관복에 주머니를 달아 줬습니다.”

해당타타가 살며시 웃으며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관도 옆 숲에서 솨솨,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남녀 간에 정은 없고 서로를 향한 신임만 있는 두 사람은 북제 상경성 황궁에서 옥천 강변길을 따라 걸었을 때처럼 발뒤꿈치를 질질 끌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머리 위에는 이제 막 자란 어린잎들이 귀여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명씨 집안을 어떻게 다룰 생각입니까?”

해당타타의 물음에 범한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과거 최씨와 명씨 집안은 황실 금고가 공개 입찰하는 열여섯 개 항목 중 열네 개 항목을 가져갔습니다. 최씨 집안이 무너지면서 주인이 없어진 여섯 개 항목을 인수할 사람은 제가 이미 정해 두었습니다. 올해 안에 북제에 있는 사철이가 최씨 집안의 사업을 인수할 때까지 기다린 뒤에 북쪽과 남쪽을 이어 주던 길을 다시 뚫을 생각입니다. 위 지휘사가 제멋대로 굴지만 않는다면 황실 금고가 북으로 운송하던 운송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겁니다. 다만 그곳으로 얼마나 많은 밀수품을 옮길 수 있을지는 제가 황실 금고를 얼마만큼 장악할지와 아버지 쪽에서 보낸 사람이 얼마만큼의 역할을 하는지에 달려 있겠지요.”

이것이 그가 북제 황제와 맺은 협상이었다. 그러니 해당타타가 남쪽으로 내려온 이유도 당연히 이 일과 엄청난 양의 은전과 관련이 있었다.

해당타타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짧은 시간 안에 황실 금고를 모두 통제할 수 있게 된다 해도 북제에 보내는 상품의 양을 맞출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협의에 따라 장 공주가 이전에 보냈던 밀수품보다 더 많은 양을 북제에 보냈다가 경국 조정에서 요구하는 수량은 맞추지 못하면 어찌합니까? 저는 대인이 협상을 지키기 위해 경국 황제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할까 봐 걱정됩니다. 폐하께서도 올해 안에 북제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다면 서두르지 말고 대인의 자리가 안정될 때까지 2년 정도 기다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쨌든 이건 장기적인 계획이니까요.”

북제 황제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상황을 생각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범한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상황을 보면 올해 황실 금고의 생산량은 지난 몇 년보다 훨씬 많을 거니 경국 조정의 요구를 맞출 수 있습니다.”

해당타타가 의심하는 눈빛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떻게 맞출 수 있다는 말입니까?”

범한이 해당타타에게 천천히 상황을 설명했다.

“첫째, 일단 황실 금고 생산량이 증가하고 운송로가 열린다면 장부를 어떻게 작성하고 상품을 어떻게 운반할지는 섭 대행수들과 소문무 그리고 아버지께서 보낸 호부 관리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낭자도 알다시피 황실 금고의 감찰 권한은 저에게 있는 만큼 흔적을 지우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닙니다. 둘째, 제가 명씨 집안을 건드려 거기서 얻은 재물을 바친다면 폐하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그의 말을 곰곰이 듣던 해당타타는 짧은 시간 안에 명씨 집안을 무너뜨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말에 놀라 물었다.

“명씨 집안을 저대로 둘 생각입니까?”

“최소한 올해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범한이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최씨 집안은 기반이 약해서 감찰원이 일격에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 명씨 집안은 백 년 넘게 명맥을 이어 온 대호족입니다. 황실 금고가 생기기 이전부터 강남에서 명성을 떨친 명문가인 만큼 뿌리도 깊고 구성원도 수백 명에 달하지요. 조정에서 관직에 올라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강력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강남에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말을 잠시 멈춘 그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명씨 집안은 최근 몇 년간 황실 금고에서 상당히 많은 이익을 취했습니다. 한 가문이 이처럼 많은 이익을 얻었다는 것은 분명 뒤에 황족의 그림자가 있다는 겁니다. 장 공주, 황태자, 2 황자가 분명 뒤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고, 낭자는 아마 믿지 않겠지만 범씨 집안 역시 관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해마다 경도에 성대한 예물을 보내는데 그래서인지 각 부뿐만 아니라 심지어 추밀원도 명씨 집안에 대해서는 우호적입니다. 낭자도 만나 봤던 명씨 공자의 경우 명망을 극히 중요시 생각하는 사람이라 민가에서도 안 좋은 평판이 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들을 건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해당타타도 그 일이 절대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범한이 근심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있어 보이는 게 이상했다.

“대인이 가지고 있는 패는 무엇입니까?”

“제가 쥐고 있는 패는 황상입니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는 범한의 눈동자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명씨 집안은 황실 금고의 은전을 탈취해 그중 일부를 공주, 황자, 대신들에게 보냈습니다. 이에 천하 사람들 모두가 명씨 집안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단 한 사람, 폐하께서는 좋아하실 수가 없지요. 그들이 탈취한 은전은 폐하의 것이니까요.”

범한의 분석을 들은 해당타타는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경국 황제의 용인하에서 범한이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실행한다면 명씨 집안은 곧 무너지리라 짐작했다. 아무리 막대한 권력과 견고한 뿌리를 둔 지방 호족이라도 강력한 국가 권력 기구와 맞서는 건 달걀로 바위를 내려치는 격이었다.

“올해의 목표는 명씨 집안의 은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범한이 말했다.

“황실 금고 공개 입찰에 참여하려면 상당한 돈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낙찰된 뒤에는 입찰의 최저 기준 가격의 4할을 미리 남겨 두어야 하지요. 이번에 신춘 공개 입찰에서 저는 명씨 집안과 입찰 경쟁을 벌여 아주 많은 은전을 토해 내게 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최씨 집안이 몰락하면서 비게 된 자리를 두고 저와 경쟁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은전을 빠르게 조달해 텅 빈 국고를 채울 수 있습니다.”

“가격을 얼마나 높일 생각입니까?”

해당타타의 질문에 범한이 슬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높일 수 있는 만큼 높여야지요. 낭자도 아시다시피 제가 욕심이 많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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