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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396화 (396/1,108)

396화

사륜마차가 푸른 나무가 심어진 도로를 나아가자 바퀴가 돌길과 부딪치면서 소리를 내었다. 이 소리가 마차의 삐걱대는 소리와 어우러지면서 마치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황실 금고를 떠나는 길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작은 새들은 멀리 논 옆 나무 위를 빠르게 날고 있었고 푸른 볏모는 부끄러운지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논 옆에는 잡초들이 그런 볏모들을 무시하는 듯 쭉쭉 자라 있었다. 도로에는 마차 행렬이 끊이질 않았고 강에도 화물선들이 계속 오갔다. 황실 금고에서 생산되는 상품들을 천하 각지에 팔기 위해 바쁜 모습이었다.

마차는 관병들이 길을 터주면서 가장 안쪽에 있는 보안 관문을 쉽게 통과하였다. 도로를 오가던 화물 마차들이 알아서 멈춰 서서 마차가 기다리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범한이 오늘 출하량이 많으니 화물 마차들이 먼저 갈 수 있게 마차를 풀밭에 세우라고 명령했다.

나란히 풀밭에 선 마차 두 대 중 한 대에는 어제 체포된 황실 금고 전운사 관리들이 타고 있었다. 장 공주의 심복들인 그들은 범 제사가 부임한 만큼 자신들의 앞날이 순탄치 않겠다고 짐작은 했었지만, 장 공주의 체면도 무시하고 자신들을 막무가내로 체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들이 체포된 이유가······ 파업을 조장했다는 이유라는 걸 알게 되자 범한의 계략에 걸려들었음을 직감하고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범한은 당장 사건을 심사하지 않고 그들을 가둬 두기만 했다. 이에 어젯밤 감옥에서 동료들을 통해서 자신들이 소주로 가서 강남 총독 설청에게 심문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게 된 그들은 약간 안도했다. 최소한 감찰원이 자신들에게 주리를 틀거나 고춧물을 붓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감찰원에서 배신한 금고 관리인들의 진술을 확보해 놓고 있다 하더라도 소주 재판에서 죄를 부인하기만 한다면 설청 대인은 장 공주의 체면을 봐서 심사를 지연시킬 것이었다. 게다가 만약 경도에서 압박이 전해진다면 범한도 어쩔 수는 없을 테니 살아날 구멍은 있는 셈이었다.

“설청 대인에게 심사를 맡기는 이유가 뭡니까?”

의자에 기대 창밖 풍경을 바라보던 해당타타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범한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대답했다.

“이 일은 제가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해당타타가 가볍게 신음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파업 사건 후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지난달 가지고 있었던 서로에 대한 믿음이 살짝 깨지면서 관계가 멀어진 것이다. 나중에 곰곰이 이 일에 대해 생각해 본 해당타타는 자신이 바깥바람을 쐬려던 것이 범한을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해했지만 사과나 변명을 하지는 않았다. 북제 성녀인 그녀는 범한에게 자존심을 굽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지금 어색한 관계를 이어 오는 중이었다.

“확인할 게 있는데, 은전은 도착했습니까?”

범한이 노심초사해하는 모습이 재미있는지 해당타타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지난번에 소주에서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나를 믿지 못하는 겁니까?”

순간 마차 안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범한은 사사에게 몇 마디 지시를 내리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사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해당타타를 바라보았다. 천하에서 명성이 자자한 아가씨가 어쩌다가 도련님의 화를 돋우게 되었을까 생각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사는 범한과 해당타타는 정을 통하는 남녀 사이가 아니라 오히려 오래된 친구 같은 사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요 며칠 왠지 모르게 두 사람의 사이가 이상했다.

해당타타는 사사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아가씨도 저를 보는데 저는 아가씨를 보면 안 되나요?”

해당타타가 웃으며 습관적으로 손을 주머니에 넣으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늘 입던 꽃무늬 저고리와는 다르게 지금 입고 있는 여종 옷에는 주머니가 없었다.

그녀가 사사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범한이 좋아하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는데.”

그 말은 진실이었다. 해당타타는 자신의 친구이자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 자부할 수 있는 사리리 앞에서 범한이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거리를 지킬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더구나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범한은 사리리에 대해 어떤 마음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강남에 내려온 지 열흘이 지나도록 범한은 사리리가 최근 어떻게 지내지는지 안부도 묻지 않았다.

아무리 정이 없는 사람이라도 하룻밤을 같이 보낸 절세 미녀에게 이처럼 냉담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이에 해당타타는 범한에게 북제 황제처럼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더욱이 최근 사사란 여종이 범한과 동침하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사도 아름다운 얼굴이기는 했지만 사리리의 매력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지기 때문이다.

해당타타가 ‘범한이 좋아하는 여자’라고 말하자 사사는 얼굴을 붉히면서 모기 날갯짓만큼 작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도련님이······ 어찌 저 같은 걸 좋아하시겠어요.”

해당타타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를 좋아하지 않으면 방에 들였겠어? 범한처럼 무정한 사람에게 이런 정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그러자 사사가 고개를 번쩍 들고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건 아가씨가 잘못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이 세상에 도련님만큼 정이 많으신 분도 없어요.”

“정이 많다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비꼬던 해당타타는 사사가 어린 시절부터 범한과 함께했다는 걸 떠올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범한처럼 잔인한 계략을 꾸미기 좋아하는 권신에게도 정이 있단 말이야?’

그녀가 한숨을 쉬며 허전한 손을 주머니 대신 소매에 넣으며 물었다.

“아까 왜 나를 쳐다봤던 거야?”

사실 사사는 그동안 바늘과 실처럼 해당타타가 범한과 함께 다니는 게 눈에 거슬렸다. 해당타타는 그녀가 모셔야 할 사람도 아닌 데다가 경국 사람들이 적대시하는 북제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후 사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항상 부드럽게 말하고 공정하게 행동하면서 성격은 시원시원한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해당타타는 고귀한 신분임에도 모두에게 평등하게 대했다. 한마디로 그녀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뼛속까지 존중과 평등이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해당타타의 질문에 사사가 입꼬리를 올렸다.

“저도 아가씨처럼 도련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서 쳐다본 거예요.”

마차가 조용해졌다. 해당타타의 크고 밝은 두 눈동자가 귀여운 동물을 보는 것처럼 사사를 바라봤다. 잠시 뒤 그녀가 소매에 넣었던 손을 빼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랑캐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오랑캐 서호와 북만이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양민을 죽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사사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불가능하죠.”

해당타타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미소 지었다.

“같은 이치야.”

* * *

지금이 봄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듯 포근한 산들바람이 범한의 얼굴을 스쳤다. 그가 두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어 바람 속에 가득 담긴 생명의 활력을 마셨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논 옆 나무에서 들려오는 솨솨, 하는 소리를 듣던 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다른 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건 분명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려 나는 소리도 아니었고 거리를 쓸어서 나는 소리도 아니었으며, 주사위를 굴리거나 연필로 글을 쓰거나 봄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어서 나는 소리도 아니었다. 이건 분명 시골 처녀가 발을 질질 끌며 걸을 때 나는 소리였다.

범한이 눈을 뜨지 않고 부드럽게 물었다.

“왜 불가능하다는 겁니까?”

“응?”

해당타타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되물었다. 말투가 담백하고 간결한 게 오래전 장님이 진평평에게 의문을 표시했을 때와 상당히 비슷했다.

범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왜 제가 낭자를 좋아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하는 겁니까? 북제 황태후가 낭자의 혼사를 서두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해당타타는 양손을 소매 안에 넣고는 그의 옆에 서서 논에 있는 소를 바라봤다. 자신과 사사가 마차 안에서 나눈 대화를 범한이 전부 엿들었을 거라 생각하며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정기 회복이 상당히 잘되었나 보군요.”

범한이 눈을 뜨고 논에서 일하는 소 등에 있는 작은 새를 바라봤다.

“왜······ 제가 낭자를 좋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해당타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범한이 장난기 없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항상 그렇게 입에 발린 소리 하는 걸 좋아하면 어떤 이익도 가질 수 없습니다.”

순간 범한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일곱째 섭 사장과 대화를 나눴던 게 생각났다. 그가 다시 태어난 뒤 겪은 여러 일은 할 수만 있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해당타타는 자신에게······ 하지는 못하면서 말만 앞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설명했다.

“저는 그냥 낭자가 이처럼 확신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한 것뿐입니다.”

해당타타도 살며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상경성에서 제가 사내들을 비롯한 수컷들은 모두 아랫도리를 사용해 생각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저는 대인의 마음을 끌 외모도 아니고 신분도 평범하지 않으니 대인이 꺼릴 거라 생각했던 거지요. 어떤 이익도 얻을 수 없는데 무엇 하러 저를 좋아하겠습니까?”

해당타타는 북제 성녀였고 범한은 경국 권신이었다. 두 사람이 친구로 서로를 알고 지내는 건 문제가 없었지만 만약 정말로 마음을 주고받게 된다면 북제 황태후와 경국 황제가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계획에도 손해를 불러올 것이었지만 범한은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은 이익과 무관한 겁니다. 좋아하는 감정도 이익으로 계산하다니 채 반년도 안 된 사이에 낭자의 마음씨도 이전보다 훨씬 고약해졌군요.”

이 말을 하면서 범한은 항주에 있을 때도 해당타타에게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하던 해당타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일도는 사람과 하늘이 서로 감응하는 겁니다. 위로는 천하를 우러러보고 아래로는 만백성을 굽어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난 반년 동안 천일도와는 어울리지 않는 여러 계획에 얽매이다 보니 혼란스럽습니다.”

범한이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략 같은 일은 저와 어울리는 일이지요. 낭자는 시골 처녀처럼 지내는 게 더 어울리고요.”

그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면 저도 참 고약한 사람입니다. 제가 상경에 있을 때 낭자를 계획에 끌어들이지만 않았다면 낭자는 지금 정원에서 닭을 키우고 당나귀를 끌며 여유롭게 살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해당타타를 바라보았다.

“제가 낭자를 그릇된 길에 끌어들인 건 아닌지요?”

“그릇된 길이 뭐라 생각하십니까?”

해당타타가 되묻고는 담담하게 이어 말했다.

“바로 마음이 어지러운 것이지요. 욕심을 부리면 잃는 것도 있는 법입니다. 무언가를 얻으면 반드시 무언가는 잃게 되는 것이 바로 자연의 길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낭자는 계속할 생각입니까?”

“당연하지요. 저는 범 대인이 한 말에 깊이 공감했으니까요.”

“무슨 말에 공감했다는 겁니까?”

“이 세상에 전쟁이 좋았던 적도 없고 평화가 나빴던 적도 없다고 했던 말 말입니다. 이 목표를 위해 저는 대인을 돕고 싶습니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눈앞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진흙 바른 소 위를 한참 날아다니던 새가 지렁이 같은 먹이를 찾지 못하자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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