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섭 참장, 걱정하지 마십시오. 본관은 경국 법률을 누구보다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시끄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오늘 체포한 저 관리들은 본관이 직접 심사하지 않을 것이며, 공평 타당하게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섭 참장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흠차 대인이 직접 심사하지 않는다면 누구든 경도 눈치를 보며 제대로 심사하려 하지 않을 텐데. 설마 경도에 사건을 넘긴다는 명목으로······ 저 관리들을 계속 황실 금고에 가둬 두려는 속셈인가.’
“저들은 제가 데리고 갈 생각입니다. 황실 금고도 조정에 소속된 기관입니다. 비록 황실 금고가 그동안 다른 조정 관리들과 교류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규정상 강남로에 귀속되어 있습니다.”
그가 불안한 눈빛으로 분위기를 살피는 전운사 관리들을 바라보며 안심시켰다.
“본관도 자네들이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네. 게다가 본관은 앙심을 품고 보복하는 사람도 아니네. 여기 섭 참장에게 말했다시피 이들이 공정한 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본관이 직접 심사하지 않고······ 소주 총독에게 심사를 넘기겠네.”
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서 말했다.
“설 대인이 심사하면 자네들도 의문을 품지는 않을 게 아닌가.”
그러고는 아직도 장 공주 심복들과 대치하고 있는 감찰원 관리들을 향해 그가 버럭 화를 냈다.
“언제부터 체포를 이렇게 어영부영했단 말인가!”
수치심에 얼굴이 살짝 붉어진 소문무가 부하들을 노려보자 감찰원 관리들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절대 물러서지 않으려 하는 황실 금고 관리들을 땅에 넘어뜨린 뒤 거칠게 결박했다.
그 장면에 관리들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흠차 대인에게 관리들의 체면을 생각해 달라고 호소하려 했지만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범한이 온화한 모습을 보이다가 갑자기 무섭게 변하는 모습을 본 그들로서는 겁이 나서 도저히 호소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하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상사는 잔혹한 상사보다 감정 기복이 심해 언제 어디서 칼날을 휘두를지 모르는 상사였다.
황실 금고의 마지막 업무를 끝낸 범한이 부사 마해를 보고 자리에 남으라 말했다. 이후 두 사람은 화창한 봄기운이 가득한 뒤채 정원에서 무시무시한 일들을 논의했다.
“본관이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범한이 마른 눈가를 비비며 말했다.
“먼저 저를 공격하려 움직였기에 그들을 체포한 것이니 저를 탓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공식적으로 범한과 그는 전운사 정사와 부사 사이였지만 품계로 보면 차이가 크게 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 있는 젊은 청년의 손에 들린 권력이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며 심지어 황자들까지도 두려워할 정도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젯밤에 범한이 장 공주가 황실 금고에 심어 둔 측근들을 제거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약간 걱정이 되면서도 반대를 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더구나 마해는 범한이 자신과 둘만 남은 자리에서 솔직하게 입장을 밝히는 걸 보고는 속으로 범한이 자신을 심복으로 삼으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이것은 사실 마해 입장에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운 일이었다. 눈앞에 있는 청년은 분명 상당한 능력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수년 뒤 벌어질 권력 다툼에서 살아남을지는 알 수 없었다.
조정 관리들은 특히나 용상과 관련된 일에 극도로 예민했다. 물론 용상을 물려받을 황태자가 일찌감치 정해진 상태였지만 최근 2년 동안 폐하의 모습을 보면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래서 황태자가 이대로 용상에 오를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어쩌면 범한과 사이가 좋지 않은 2 황자가 즉위할 수도 있었다. 만일 2 황자가 황위를 물려받게 된다면 범한의 심복이 되어서 좋을 게 없었다.
이것이 바로 마해가 줄곧 고민하는 부분이었다. 그는 어느 쪽에 설지 정할 때 다양한 쪽과 접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회주의자처럼 처신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범한이 황실 금고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에 독대할 자리를 마련한 만큼 자신도 태도를 확실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어젯밤 범한을 만난 뒤 고민한 끝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정해 둔 상태였다.
“하관은 이 일에 관한 두 통의 문서를 작성해 한 통은 문하중서에 보내고 다른 한 통은 빠른 말을 이용해 소주 총독부에 보낼 생각입니다. 그러니······ 대인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범한은 곧바로 마해가 자신의 편에 서려 한다는 걸 알았다. 문서 두 부를 작성한다는 것은 범한이 받게 될 언론의 공격을 나누어 받고, 관료 사회에 자신이 범한의 편에 섰다는 걸 공개적으로 알리겠다는 의미였다. 그가 온화한 눈빛으로 마해를 바라보았다.
“마 대인께서는 참 세심하시군요.”
마해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하관은 황실 금고의 부사인 만큼 아래 관리들을 통솔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관리들이 잘못을 저지른 데에는 하관의 책임도 있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마 대인께서는 오늘 본관이 한 일이 적절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마해가 잠시 고민하다가 공손히 대답했다.
“주도면밀한 계책이라 생각합니다. 전운사 관리들은 금고 관리인들처럼 함부로 죽이거나 고문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만약 전운사에서 사건을 심사했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사람들의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대인께서 내일 그들을 소주로 데리고 가 총독 대인에게 심문을 받게 하시는 건 아주 탁월한 선택입니다. 총독 설 대인은 국가의 기둥으로 관리들에게 선망을 받는 분이시니 조정을 대신해 이 사건을 심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 할 수 있지요.”
곰곰이 듣고 있던 범한이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부사 마해는 과연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사실 파업을 조종했다는 가장 좋은 핑계가 있는 만큼 범한은 원한다면 장 공주 심복들을 깔끔하게 제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움직여 장 공주와 황자들을 비롯한 황실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일을 총독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유는 첫째로 강남로 총독은 이 일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둘째로 설청이 속으로 자신을 욕하기는 하겠지만 지방 고관인 만큼 멀리 경도에 있는 장 공주보다는 강남에 머물 자신의 눈치를 살필 가능성이 더 컸다. 게다가 설청은 그가 뭘 원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전에 임소안 대인이 나에게 자신에게 세상을 구할 재주를 지닌 사촌 형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며칠 함께 일을 해보니 임소안 대인의 말이 과연 사실이군요.”
범한이 웃으며 화제를 바꿔 다시 임소안을 거론해 두 사람의 거리를 좁히려 하자 마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소안이에게 2년 전 제사 대인께서 처음 경도에 오셨을 때 만나자마자 마음이 맞아 가까워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편지에서도 항상 대인이 가지신 천부적인 자질을 칭찬하며 장래 나라의 발전을 책임질 재목이라 하였지요.”
두 사람은 한참 서로를 추켜세운 뒤 앞으로 황실 금고에 실행할 규정을 상의해 정하고는 작별 인사를 했다.
장원 문 앞에서 마해가 허리를 살짝 숙여 자신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범한은 속으로 조정에 뛰어난 인물이 생각보다 많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뛰어난 인물들이 그동안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이유는 세상에 자신의 재능을 펼쳐 보일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곰곰이 오늘 일을 되새겨 보던 그는 앞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더구나 마해의 도움을 받는다면 매년 전운사에 자신의 측근을 심는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될 터였다.
다만 하나 걸리는 점이 있다면 마해가 명분과 실익을 모두 챙길 수 있는 황자가 아닌 자신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였다. 이것은 분명 태상사 소경 임소안과 자신의 친분을 고려해 선택한 건 아니었다.
사실 마해가 범한의 사람이 되기로 한 이유는 단순했다. 그건 바로 3 황자와 범한의 관계에 자신의 앞으로의 벼슬길과 가문의 흥망성쇠를 모두 건 것이었다.
부사 마해를 배웅한 뒤 범한은 일곱째 섭 대행수를 불렀다. 정말이지 황실 금고를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일곱째 섭 대행수는 이번에 범한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온 네 명의 대행수들의 수장이었다. 더구나 그는 경여당에 있을 때부터 범씨 집안의 재물을 불려 주는 일을 해와서 범사철과도 관계가 좋았고 범한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범한도 다른 섭 대행수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작은 목소리를 앞으로 황실 금고 관리와 생산 문제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범한은 자신이 화학과 물리에는 문외한이었으므로 생산 관리에 대한 권한을 모두 일곱째 섭 대행수에게 넘길 생각이었다. 그는 사람을 잘 믿지는 않았지만 경도에서 4처 언 공자의 음모와 계획을 세우는 능력을 믿고 모든 일을 맡겼듯이 황실 금고에서도 섭 대행수들의 전문 지식을 믿고 맡길 생각이었다.
모든 사항을 확인한 뒤 한숨을 돌렸다. 과거 섭가의 발전을 이끌었던 대행수들이 있으니 최근 황실 금고의 운영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었다. 범한은 먼저 생산품의 질과 수량을 개선해 황제의 첫 번째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금이 체불되는 일이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됩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상품의 질을 향상하는 문제도 신경 써주시고요.”
일곱째 섭 대행수는 그를 바라보며 제사 대인이 왜 이렇게 노동자들 임금에 신경을 쓰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봄빛이 만연한 정원에서 범한의 조각 같은 얼굴을 바라보던 섭 대행수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보기에 제사 대인은 아가씨와 외모 면에서 닮은 점은 별로 없었지만 똑같이 세상의 관행에 물들지 않는 사람인 건 확실했다.
비록 황제를 대신해 관리하는 것이긴 했지만 아가씨의 혈육인 제사 대인이 섭가의 산업을 다시 일으키려 하자 섭 대행수들은 마음이 벅찰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절대 그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유는 20년 가까이 경도에서 갇혀 생활하면서 진심을 드러내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는 데다 자신들 때문에 제사 대인이 곤란한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일곱째 섭 대행수께 북제에 가서 아우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범한은 일곱째 섭 대행수의 마음은 알아채지 못한 채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관들이 계속 따라올 줄은······. 황실 감시가 엄격해 대인을 황실 금고로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곱째 섭 대행수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관들이 대인의 체면을 살피느라 저희에게 부드럽게 대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 도련님께서는 상인의 자질을 타고나신 분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대인께서도 제가······ 황실 금고로 다시 돌아오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범한이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일곱째 섭 대행수를 바라봤다.
“소문무가 계속 머무를 거니 만약 불편한 점이 있거나 반항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에게 말하십시오. 제가 대인들을 경도에서 데리고 나왔으니 속상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일곱째 섭 대행수는 감동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때 거센 바람이 정원에 불자 어린나무의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더니 그만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은 탄식을 내뱉으며 미간을 찌푸리고는 한동안 부러진 나무를 바라봤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담담히 물었다.
“기술을······ 기록할 수 있습니까?”
일곱째 섭 대행수가 몸을 살짝 굽히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규정이 엄격해서 문자로 적을 수는 없고 말로만 전수하고 있습니다.”
“설계도는 입으로 전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보고 외웠는데 지금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범한이 살며시 웃었다.
“몇 개월 뒤에 항주에 와서 알려 주십시오. 제가 기억력이 무척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