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폐하께서 내가 섭 대행수들을 데리고 갈 수 있게 허락하셨다는 것은 당분간은 나의 충심을 의심하지 않으실 거란 의미이네. 내가 황실 금고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장 공주의 체면을 깎아도 만약 장 공주가 조용히 있다면 다행인 거고 경도 관리들을 동원해 공격한다면······ 폐하께서도 섭가 문제에 대해 약간은 의심을 하실 수 있겠지만 나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네. 나는 최대한 빨리 황실 금고를 복구시키고 싶은 생각뿐이네. 장 공주는 내가 과격한 방법을 사용해 공격 빌미가 생기는 걸 바라고 있고 나는······ 그녀가 이런 이유로 암암리에 나를 도와주는 걸 이용할 생각이야.”
범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어 말했다.
“내가 황실 금고를 장악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상당히 과격하고 의심을 부를 위험이 있지만 일부러 은폐하려 하지 않는다면 폐하께서도 내 진심을 믿어 주실 거네. 그렇다면 장 공주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고 한들 나를 공격할 수는 없겠지. 어떤 권모술수든 마지막 단계에서는 폐하의 뜻과 심정을 고려해야 하는 법이네. 그러니 나는 폐하께 항상 솔직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이려 하네.”
이 말은 소문무를 설득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이 싸움에서 사위이자 아들인 자신이 반드시 승리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황제는 황태자에게 2 황자를 적으로 세운 뒤 오늘 다시 범한을 가장 강력한 숫돌로 세우는 데 성공했다.
장 공주는 범한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이 두 황자와 황태후와 황후에게 압력을 준다는 것만 알 뿐 이 압력이 본래 경국 황제가 계획한 것이라는 건 알지 못했다. 범한이 조금 전에 진평평의 입을 빌려 말했듯이 장 공주의 시야는 여전히 제한되어 있었다.
이것은 역사의 제한성이 아니라 궁둥이의 제한성이었다. 그녀는 용상에 앉아 있지 않았기에 시선이 군왕에게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3월 중순이 되자 북쪽에서부터 남쪽까지 온 천하가 봄기운으로 물들었다. 북제 상경이든 경국 경도건 들판에 새싹이 돋고 사방에 꽃이 피어나 활력이 가득했다. 한편 강남에서는 산에 푸른 물결이 넘실거렸고 강가에 심어진 버드나무에서는 파릇파릇한 잎사귀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강남로 서남쪽에 있는 황실 금고 역시 이러한 대자연이 만들어 낸 활력을 느끼고 있었다. 올해 처음으로 연녹색 새싹들과 분홍빛 꽃들이 피어나자 그동안의 일들로 분위기가 삭막했던 관아와 공방의 분위기도 부드러워졌다.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관리들이 관아 문 앞에 서서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모아 서로 인사했다. 피비린내 나는 무서운 날들은 이제 끝났다. 내일이면 흠차 대인은 봄에 새롭게 시작되는 황실 금고 입찰 진행을 위해 소주로 돌아갈 것이었다. 이에 오늘 황실 금고 전운사 관리들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홀가분했다.
관아가 열리자 중앙에 앉은 범한이 앞으로의 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사실 이들 중 범한의 심복이라 할 만한 사람은 없었기에 대부분 공방의 안배 문제와 같은 기본적인 내용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전운사 관리들에게 경국 법률을 비롯해 조정이 황실 금고를 위해 특별히 제정한 규정들을 어기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임금과 봉록은 반드시 제때 지급하고 치안과 보안 업무에 특별히 주의하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관리들은 흠차 대인이 말할 때마다 착실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구동성으로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이들은 높이 걸려 있는 다섯 구의 머리가 무서워서라도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떠날 준비를 하면서 범한은 소문무를 이곳에 남겨 두기로 결정했다. 소문무는 전운사 관리가 아니었으므로 임시적으로 감찰원 4처에 전입시켜 단달과 함께 황실 금고 전체를 통솔하는 감찰원 관리 밀정 임무를 맡게 되었다.
관리들은 범한이 소주에서 황실 금고 공개 입찰을 처리한 뒤 항주로 이동해 그곳에서 생활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전운사 정사가 황실 금고에서 지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규정이었다. 그러니 흠차 대인을 대신해 황실 금고에 남게 된 소문무는 결코 가볍게 대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전운사 관리들이 모두 일어나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옆에 있는 마해에게 넌지시 말했다.
“어젯밤에 말했던 일을 실행해야겠습니다.”
자신을 존중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사실을 통보하는 범한을 향해 마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한편 범한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섭 참장은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흠차 대인이 자신에게 말하지도 않고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궁금해하던 그의 귓가에 소문무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소문무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정당으로 걸어 나오더니 관리들을 향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인사했다.
“조사를 통해서 황실 금고 전운사에서 몇몇 관리들이 규정에 어긋나는 일을 벌이고, 금고 관리인들을 선동해 황실 금고의 근간을 흔드는 일을 벌였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이는 모두 불법이며 간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불법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관아 구석에서 일고여덟 명의 감찰원 관리들이 나오더니 꼿꼿하게 앉아 있던 관리 몇 명을 거칠게 붙잡았다. 그러자 관리들이 그들을 밀치며 버럭 화를 냈다.
“감히 어디에다 손을 대!”
한편 다른 전운사 관리들은 자신은 피해 갔다는 사실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감찰원이 그동안 관리들에게 해온 방식을 잘 알고 있는 경국 문관들은 감찰원에 함께 대항해야 한다는 일종의 동맹 의식 같은 게 있었다. 이에 전운사 관리들은 재빨리 일어나 범한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대인, 이게 무슨 일입니까?”
사실 그들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범한이 감찰원을 동원해 체포하려는 이들은 모두 신양 장 공주가 황실 금고에 심어 놓은 심복들이었다. 그러니 흠차 대인은 장 공주가 심어 놓은 뿌리까지 말끔히 제거한 뒤 자신의 묘목을 새로 심으려는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체포당하는 관리들이 이렇게 거칠게 반항하는 이유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체면을 잃게 되는 것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다.
범한이 전운사 관리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관의 뜻을 의심할 필요도 인정에 호소할 필요도 없네. 저 관리들은 반드시 체포될 것이니.”
그 말에 오른쪽에 앉아 있던 섭 참장이 어두운 안색으로 부사 마해를 바라보았다. 그는 부사 마해가 그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서 속으로 어젯밤에 범한에게 미리 말을 들었을 거라 짐작했다. 자신만 소외되었다는 생각에 울컥한 섭 참장이 간곡하게 호소했다.
“대인, 저 관리들은 오랜 시간 전운사에 근무하며 황실 금고를 위해 헌신한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을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거칠 게 체포해서는 안 됩니다.”
범한이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황실 금고를 위해 헌신한 자들이란 말입니까? 참 가당치도 않은 말이군요.”
섭 참장이 물러서지 않고 계속 설득했다.
“저들이 부당한 짓을 저질렀을지는 모르지만 사흘령이 내려졌을 때 대인의 지시를 모두 따랐습니다. 그러니 대인께도 지시를 따른 자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저들의 죄를 물어서는 안 됩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그도 섭 참장을 비롯한 관리들이 반대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건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지난번 금고 관리인들이 일으킨 파업을 진압할 때 섭 참장이 말리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 막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황실 금고가 하루 멈추면 조정에 상당한 손실을 입히는 만큼 파업은 반드시 진압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전운사 관리들을 체포하는 건 달랐다. 이것은 관리들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는 것이었고, 이에 섭 참장은 자신이 감찰원 제사이자 흠차 대인인 범한과 공모해서 전운사 전체를 뒤집으려 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 반대하는 것이었다.
섭 참장의 집안은 황제에게 미움을 받는 데다가 섭령아와 2 황자가 혼인을 하면서 그쪽에 기대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정주 섭씨 집안은 그에게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에 대한 어떤 밀서도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장 공주가 황실 금고에 심어 놓은 심복을 모두 제거하려는 범한의 행동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범한이 황실 금고에서 세력을 확장하면 할수록 자신이 앞으로 처신하기가 힘들어질 거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범한은 품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받은 서류를 읽어 보던 섭 창장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서류에는 체포된 관리들이 암암리에 저지른 불법적인 일들이 적혀 있었다. 게다가 재물을 탐했던 일들뿐만 아니라 이번 파업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모든 증거가 명확하게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금고 관리인들의 증언까지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어느 관리가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시각과 장소, 인물까지 아주 자세하게 적혀 있는 것이 감찰원에서 조사를 진행한 게 분명했다.
증거까지 명확하게 나와 있는 서류 뭉치를 읽어 보던 섭 참장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황실 금고에 온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흠차 대인이 어떻게 전운사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이처럼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거지? 게다가 감찰원은 어떻게 신양의 심복들이 금고 관리인들과 비밀리에 나눈 대화의 내용까지 알아낼 수 있었던 걸까. 설마 금고 관리인 안에 감찰원 밀정이 숨어 있는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섭 참장은 말로만 듣던 감찰원의 공포스러운 면모가 무엇인지 실감했다. 독사처럼 어디든 틈만 있으면 잠복해 염탐하는 감찰원 밀정들이 어딘가에서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황실 금고 보안을 관리할 권한이 있는 참장인 그는 감찰원이 소스라칠 정도로 두렵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3품 관리인 그를 황제의 지시 없이 감찰원이 멋대로 조사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둘째로 자신이 군대에 소속되어 있는 만큼 파벌과 상관없이 감찰원은 군대의 체면 때문에라도 자신을 함부로 건들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번에 발생한 파업에서 스스로 괜찮은 능력을 발휘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일은 장 공주의 체면을 손상할 뿐만 아니라 경도 황자들에게도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이에 후환이 두려워진 그가 마음속에 치솟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범한에게 간곡히 말했다.
“대인, 이 일은······.”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제게 저들을 용서하라 말하지 마십시오.”
섭 참장은 정주 쪽에서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아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범한이 먼저 과감한 결단을 내리자 없던 용기까지 모두 짜내어 말했다.
“하지만 대인, 저들은 전운사 관리들입니다. 대인은 저들을 전운사 정사로서 체포하시려는 겁니까? 아니면 감찰원 제사로서 체포하시려는 겁니까?”
고개를 돌려 주위 분위기를 살핀 뒤 목소리를 낮추었다.
“대인께서 흠차의 신분이고 증거도 명확할지라도 사람을 체포하려면 며칠 동안 재판을 열어 사건을 심사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대인께서는······ 곧 있을 황실 금고 공개 입찰 때문에 그럴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그가 과감하게 자신의 주장을 밝힐 거라 생각하지 못한 범한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사실 섭 참장은 범한이 어떤 위치에서 행동하냐에 따라 관리들을 체포하는 방법이 달라진다는 걸 지적한 것이었다. 만약 범한이 감찰원 제사의 신분으로 사건을 조사해 체포한 것이라면 경도에 보고해 조의를 열어야 했다. 하지만 만일 그런다면 조정 대신들이 장 공주를 공격하기 위해 그가 일부러 일을 꾸몄다고 공격할 수 있었다. 반면 전운사 정사나 흠차의 신분으로 사건을 조사한 것이라면 직접 사건을 심사해야 해야 하는데 그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범한이 누구인가? 그는 경도 여론 같은 건 발톱의 때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가 씩 웃으며 섭 참장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