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금고 관리인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자 범한은 보일 듯 말 듯 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 사람을 끌고 가서 참수하게.”
“네, 대인.”
을 주사가 고개를 들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펴봤다.
‘누구를 참수하라는 거지? 또 참수할 사람이 남아 있나?’
그는 감찰원 관리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뒤에야 비로소 흠차 대인이 말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에 억울함을 호소하려 입을 열자 진흙 한 덩어리가 입을 막았다.
그가 오줌을 질질 흘리며 감찰원 관리에게 끌려 공방 밖으로 나가자 사람들은 모두 조용히 흠차 대인을 바라봤다. 범한은 무수히 많은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걸 모르는지 태연하기만 했다.
얼마 뒤 공방 밖에서 살과 뼈를 가르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공방 안에 짧은 탄식이 들리더니 곧이어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을 작업장 주사는 이렇게도 간단히 죽임을 당한 것이다.
무거운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 손이 결박된 병 작업장 주사가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에는 절망과 비참함이 그대로 드러났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가 천천히 범한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자신에게 행운이 올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흠차 대인이 파업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재판이나 증거도 없이 주사 세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고, 섭 대행수 네 명에게 황실 금고 기술을 통제하려 하는데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었다. 3대 작업장 주사 중 이미 두 명이 죽었으니 자신도 곧 죽을 목숨이었다.
실성한 듯 웃는 그를 본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병 작업장 주사가 범한을 바라보더니 순간 웃음을 멈추고 이를 갈며 말했다.
“내 끝은 내가 선택할 겁니다. 이 구렁텅이에서 저를 꺼내 주셨으니 대인을 원망하지는 않지만 죽기 전에 한 가지 할 말이 있습니다.”
범한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말하게.”
병 작업장 주사는 고개를 돌려 범한 옆에 있는 열두째 섭 대행수를 바라보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입술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열두째 대행수님, 스승님······ 경도에서 잘 지내셨습니까? 제자가 돼서 지금껏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한 적이 없군요.”
“자네는?”
열두째 섭 대행수가 흐린 눈을 깜빡거리며 병 작업장 주사를 바라봤다. 옆에 있던 일곱째 섭 대행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네, 열세 번째 제자가 아닌가. 과거 자네와 관계가 돈독했으니 안부를 묻는 거겠지.”
열두째 섭 대행수가 화들짝 놀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호금림인가? 자네 아직도 살아 있었어? 나는 그때 자네가 죽은 줄 알았네.”
순간 옆에 있는 범한이 생각난 열두째 섭 대행수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호금림도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열두째 섭 대행수가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께서 항상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지. 그래서 우리도 남은 목숨 부지해 가며 살았는데 내가 어찌 자네를 탓할 수 있겠나. 다만 열세 번째 제자야······.”
그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처음 경도에 스물세 명이 있었는데 이제는 열다섯 명밖에 남지 않았구나.”
그 말을 들은 호금림은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도 잊고 비통함에 눈물을 흘렸다. 한편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범한은 묵직한 슬픔에 숨을 골랐다. 자신이 경도에 오고 난 뒤 채 2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섭 대행수들 중 스물셋째 섭 대행수와 열일곱째 섭 대행수가 세상을 떠났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공방에 쌓여 있는 재료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시간은 물처럼 빠르게 흘러가는데 나는 언제 섭가란 이름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죽어야 할 사람이 죽고 살았어야 할 사람이 경국 사람들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날이 언제 올 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젖어 있던 그가 정신을 차리고는 앞에 있는 병 작업장 주사를 바라봤다.
“자네가 연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옛정이 떠올라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본관을 자네를 죽일 생각이 없네. 그건 자네에게 계속 살 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본관의 마음이 약해서야.”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던 호금림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주사가 죽는 모습을 보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완전히 버린 그는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듣자 너무 놀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범한이 무정한 눈빛으로 그를 차갑게 바라보며 설명했다.
“죄가 큰 자는 참수하고 작은 자는 뉘우치게 하기 위해서네.”
범한이 병 작업장 주사 호금림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병 작업장은 줄곧 황실 금고와 감찰원 3처에서 공동으로 관리하며 군사 무기와 선박 연구를 전문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감찰원 3처를 통해서 호금림이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앞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금림이란 사람은 과거 섭가 여주인이 남긴 설계도를 연구하는 데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소박하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상당한 은전을 착복하기는 했지만 땅을 강제로 사들이거나 여자를 겁박하는 등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 점만 봐도 갑과 을 작업장 주사들과 비교해 그를 죽이지 않을 이유는 충분했다.
물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범한도 완벽하게 청렴한 사람은 없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병 작업장 주사가 호송되고 공방 안에 금고 관리인들만 남게 되자 서로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이들은 파업을 시작할 때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창고 관리인들이 똘똘 뭉쳐서 조정 전운사 관리들에게 맞선 게 처음도 아니었고, 그들이 터무니없는 요구만 하지 않으면 대부분 평화롭게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착복한 은전이 합리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흠차 대인이 칼날을 휘둘러 주사들을 참수하고 황실 금고의 본질을 밝혀 자신들의 행동 정당성을 반박하며 더구나 네 명의 섭 대행수들을 등장시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금고 관리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비장의 카드가 지금 앞에 있는 젊은 관리에게는 먹히지 않는다는 걸 실감했다.
금고 관리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이들 중 누가 죽게 될지 가늠했다.
얼마 뒤 소문무가 이름과 죄명을 이야기하자 세 명의 금고 관리가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평상시 온갖 악행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소주 관리와 결탁해 서슴없이 경국 법률을 위반한 자들이었다.
소문무가 건네준 서류를 받아 든 범한은 겁에 질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금고 관리인들을 바라봤다. 바지가 흥건하게 젖은 걸 보니 오줌을 지린 모양이었다.
“자네는 첩을 열두 명이나 얻었군?”
범한이 세 명 중 한 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듯 떠는 금고 관리인은 고개를 끄덕일 힘도 없는지 가쁜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범한이 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첩을 열둘이나 얻었다는 건 돈이 많고 밤일에 엄청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짓이지. 게다가 첩 열두 명 중에 아홉 명은 강제로 빼앗은 거로군. 설마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남편을 죽인 것인가? 정말 대단하구먼. 경도에서 가장 악명 높은 귀족가 자제들보다 더 제멋대로야.”
나머지 두 명은 이것보다는 죄가 가벼웠지만 그렇다고 살려 둘 정도는 아니었다. 범한이 손을 휘두르자 감찰원 관리들이 세 명을 끌고 갔다. 얼마 뒤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묵직하면서도 참혹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 명이 참수를 당한 것이다.
감찰원 관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이었고 공방에 있는 병사들도 내키지는 않아도 감당할 수는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황실 금고 전운사 관리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처럼 참혹한 광경을 거의 볼 일 없었던 그들은 너무 놀라 등이 땀으로 젖어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공방 안팎에서 나는 피비린내를 참지 못해 구역질하기도 했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부사 마해가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으며 범한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대인, 며칠 뒤 공개 입찰을 앞둔 상황에서 사람을 많이 죽이는 건 좋지 않습니다.”
자신이 계속 사람을 죽일까 봐 걱정하는 마해를 향해 범한이 씨익 웃어 보였다.
“마 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6년 전 제 장모······ 장 공주마마께서 처음 황실 금고에 왔을 때도 몇 명이 죽었습니다.”
마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손가락 여섯 개를 펴 보였다.
“여섯 명이지요. 장 공주마마보다 아랫사람인 제가 이보다 더 많이 죽일 수는 없습니다. 이미 다섯 명을 죽였으니 더는 죽이지 않을 겁니다.”
뒤에 있던 관리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금고 관리인들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피가 뚝뚝 떨어지는 참수당한 머리를 볼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반면 소문무만이 범한의 말에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겼다.
부사 마해가 미간을 찌푸리며 흠차 대인이 방금 한 말을 곰곰이 곱씹었다.
‘장 공주마마께서 여섯 명을 죽였으니 자신은 다섯 명만 죽이겠다는 건······ 나중에 이 문제를 두고 어사들이 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죽였다고 공격할 걸 대비한 것이겠지. 이제 보니 흠차 대인은 나이는 많지 않지만 생각은 굉장히 치밀한 사람이야. 이종사촌 임소안이 연줄을 만들려 노력한 이유를 알 것 같군.’
이런 생각을 하던 마해는 범한이 앞으로 임명할 사람과 해야 할 조치들을 지시하자 조금의 싫은 내색 없이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그 말을 듣던 황실 금고 전운사 관리 중 몇몇은 내키지 않았지만 정사와 부사가 정한 일에 반대할 수는 없었다.
범한은 공석이 된 3대 작업장 주사의 자리를 섭 대행수들에게 임시로 맡게 했다. 그리고 감찰원에 동료들의 죄를 밀고한 금고 관리인들을 부주사로 임명해 20여 년 동안 떠나 있어 황실 금고가 낯설 섭 대행수들을 보좌하도록 했다.
동료를 밀고한 금고 관리들을 부주사로 임명한 건 이후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동료를 밀고했다는 부담이 있는 부주사들은 이후 보복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엄격히 관리하고 조심히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고 관리인들은 부주사들이 엄격하게 굴수록 반감이 커질 것이므로 양측은 결국 충돌할 게 분명했다. 만일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범한이 원치 않는 일이 생기는 건 시간문제였다.
“사흘령이 끝나기까지 아직 반나절 정도 시간이 있으니 죽지 않은 자들은 은전을 뱉어 내고 장부를 내놓은 뒤 자신이 저지른 잘못도 상세히 적도록 하게. 반성하라는 의미에서 하는 거니 나에게 보여 줄 필요는 없네. 왜 멍하니 서 있는 겐가? 집이 여기 공방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은 은전을 챙겨 다시 공방으로 돌아오려면 서둘러야 할 텐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창고 관리들은 화들짝 놀라 헐레벌떡 큰 공방에서 빠져나갔다.
섭 참장이 이끌고 온 병사가 천천히 길을 비켜 줬고 감찰원 관리들도 각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4처가 공방에 심어 놓은 밀정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전운사 관리들은 소리 내 말할 엄두는 내지 못한 채 남몰래 눈빛만 주고받았다. 한편 맨 뒤에 서 있던 노동자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예전과 달리 고분고분해진 금고 관리들을 바라보았다.
밖에 내리던 빗줄기는 거의 멈춘 상태였다. 시끌벅적했던 황실 금고 파업 사태는 범한의 무서운 칼날과 섭 대행수들의 등장으로 싱겁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