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390화 (390/1,108)

390화

세세하게 나열된 경국 법률에서 살인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암살한 경우 같은 살인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범한과 같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살인할 경우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만 했다. 만약 그가 소경이 그동안의 불법적인 일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정당성을 주장하려 한다면 전운사 관리들이나 창고 관리인들에게 아주 좋은 반격의 기회를 줄 수 있었다. 합법적인 재판을 거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느 관아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한은 소경의 죄명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낸 뒤 황제의 뜻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그를 참수하였다. 물론 황제의 뜻이란 항상 아리송했기에 해석의 여지는 남아 있었지만 그것을 해석한 권한도 흠차인 범한에게 있었다.

물론 감찰원 조사로 소경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는 일도 반드시 필요했다. 비옥한 토지를 헐값에 사들이고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혀 죽였다는 죄상을 확실히 밝혀 둬야 나중에 경도 조정에서 이 문제가 불거져도 의문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먼저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운 뒤 증거를 수집해 세상 사람들의 의문을 잠재우는 것은 먼 미래를 고려한 계획이었다.

* * *

갑 작업장의 큰 공방에서 파업을 주도하던 소경이 참수당하자 노동자들은 흠차 대인에게 약간의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한편 위풍당당하던 금고 관리인들은 담이 쥐만큼 작아졌고, 전운사 관리들은 마음속에 켕기는 것이 있었지만 대놓고 범한을 지적할 수 없기에 조용히 상황을 지켜봤다.

한편 같이 파업 중인 을과 병 작업장은 섭 참장과 단달이 처리했기에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되었다. 두 사람은 범한만큼 대담하지 않았기에 관련자들을 체포만 하고 죽이지는 않았다.

두 작업장에 있던 금고 관리인들이 군사들에게 잡혀 큰 공방에 끌려 왔고 노동자들은 각 작업장에 감금되었다. 2백여 명이나 되는 청색 옷을 입은 금고 관리인들이 들어오자 큰 공방은 사람들로 붐비게 되었다. 하지만 군대의 창과 감찰원 관리들의 쇠뇌의 화살이 두려워 이들은 감히 자리를 만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광경을 본 전운사 관리들은 비로소 흠차 대인이 사흘령을 내린 뒤 상황을 일찌감치 계획해 두었으며 금고 관리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이미 예상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 범한의 주도면밀함에 혀를 내두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신양 측 심복인 전운사 관리들은 실망한 눈빛으로 이 상황을 지켜봤다. 그들은 사실 오늘 범한이 잔학무도한 방법을 사용하기를 기대했다. 그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범한이 금고 관리인들을 모두 죽여서 황실 금고 생산량이 줄어들고 품질도 하락해 폐하의 미움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공방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린 범한이 일어나자 비옷에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땅에 떨어졌다. 그가 한곳에 모여 있는 금고 관리인들을 바라보았다. 몇몇 금고 관리인들 눈에서는 여전히 굴복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보였다. 특히 을과 병 작업장에서 잡혀 온 이들은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교만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두 모였군.”

범한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젯밤에 비가 많이 내려 여기 공방 아궁이가 식어 버렸는데 다른 곳은 어떠한가? 삼사십 리 떨어진 곳에 있는 공방 금고 관리인들도 오늘 모두 관문 부근에 모여 있던데? 비 때문에 공방 작업이 멈췄더라도 자신이 책임지는 공방에서 상황을 살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아직 시간이 이른데 설마 벌써 갔다가 돌아온 것인가?”

범한이 자문자답을 하는 사이 다른 곳에서 온 금고 관리인들은 동료들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듣고는 얼굴이 점차 창백하게 변해 갔다.

범한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이 파업한 건 엄연한 사실이니 본관도 칼을 휘두를 수밖에 없네.”

소 주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된 금고 관리인들은 마침내 흠차 대인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냉혈한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범한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금고 관리인들은 모두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했다. 용서를 빌며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퍼붓는 사람, 흰자를 드러내고 기절하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었다. 그중에는 개구멍을 찾아 도망치려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살겠다고 발악했지만 밖은 군대와 감찰원이 막고 있어 도망칠 방도가 없었다.

그러던 중 금고 관리인들 사이에서 두 사내가 튀어나왔다. 이번 파업을 주도한 을과 병 작업장 주사들이었다.

두 주사는 의기양양하게 가장 큰 공방에 금고 관리인들과 노동자들을 모아 놓고는 청산유수 같은 말들을 쏟아 내며 파업을 주도했었다. 물론 노동자들이야 무기력하게 두 사람의 지시를 따를 뿐이었지만 수백 명의 금고 관리인들은 진심으로 그들의 말을 믿었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지혜를 짜내 생각한 끝에 그들은 조정에서 자신들을 엄벌하지 못할 거라 믿었다. 그러니 두 주사의 주장처럼 흠차 대인에게 공손하게 행동하면 파업을 해도 조정에서 자신들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반란이라고 치부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들은 파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수히 많은 병사와 감찰원 관리들이 들이닥쳐 무기를 겨눌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무기 앞에서 힘을 잃은 두 주사는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붙잡혀 왔지만 여전히 저항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이 분수에 맞게 행동했으니 흠차 대인도 함부로 하지는 못할 거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흠차 대인은 분수를 지키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었다. 무리에 섞여 상황을 전해 듣던 두 주사는 비로소 함께 파업을 도모했던 소 주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 틈에 섞여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던 두 주사는 마침내 아궁이 앞에 널브러져 있는 소경의 시체를 발견했다. 피로 물든 머리 없는 시신을 본 두 사람은 비통함에 소리쳤다.

“소 대인······ 소 대인!”

무기를 들고 서 있는 군대와 감찰원 관리들이 무서워 아궁이 옆으로 가지는 못한 채 울부짖던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독기가 가득 서린 눈으로 범한을 노려보는 그들은 이미 오늘 자신들이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때 범한은 고개를 돌려 고달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병 작업장은 아무 문제가 없으며 혼란 없이 감찰원 3처 기술자들이 이미 모든 걸 인수하였다는 내용을 듣자 그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때 관저를 지키고 있던 호위 무사가 관리들을 뚫고 다가와서는 귓가에 보고했다.

“관저에 계시는 그분이 나가고 싶어 합니다.”

병 작업장이 중요한 이유는 무기나 선박과 같은 중요한 물건을 생산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곳의 기밀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나중에 전쟁에서 경국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 나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범한은 저 때문에 그럼 참사가 벌어지는 걸 용납할 수 없었기에 단달의 보고를 듣고는 안심했다. 하지만 이어서 말을 듣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다.

여종으로 분장해 자신을 따라온 해당타타는 전운사 관리를 비롯해 여러 사람을 속이는 데는 성공을 했지만 매의 눈을 가진 고달까지 속이지는 못했다. 이에 범한은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알았지만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나마 계년조가 은밀히 감시하고 있었고 호위 무사들도 밖으로 소식을 흘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기에 다행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호위 무사가 말하는 그분은······ 당연히 해당타타였다. 아무래도 시골 아가씨는 오늘 소란을 틈타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았다.

“내보내서는 안 되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관저에 머무르게 해야 해.”

호위 무사들은 작년에 습지대에서 해당타타와 대치해 본 적이 있었기에 범한은 걱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단 무력으로 대응한다면 해당타타도 자신의 결심을 알고 조용히 물러날 것이었다.

지시를 마친 범한의 시선이 앞에 서 있는 주사들에게 향했다.

“소란을 일으켜 조정에 대항한 두 사람을 체포해라.”

병사들이 앞으로 나와 두 주사를 포박하자 금고 관리인들은 두려움과 원한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도 따라나서려 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정부 기구에 대항할 힘이 없거니와 그동안 착취한 돈이 너무 많아서 잃을 것도 많았기에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범한도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용기도 적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범 대인!”

을 작업장 주사는 자신의 두 손을 결박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범한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죽이려면 죽여 보십시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조정에서 이 일을 묵인하지 않을 테니!”

“지금 본관을 겁박하는 겐가?”

범한이 빙그레 웃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되는 법. 금고 관리인이 줄어든다고 본관이 황실 금고를 관리하지 못할 것 같은가?”

을 작업장 주사가 비웃으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렇습니까? 저희가 흠차 대인의 의지를 얕보았듯이 대인도 작업장에서 하는 일을 얕보고 계시는군요!”

그가 절망해 내뱉는 최후의 말에는 귀신이 되어서라도 범한이 황실 금고를 망가뜨리는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는 비장함이 느껴졌다.

범한이 소문무에게 눈짓하자 그가 옷 안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종이에 적힌 이름들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장삼, 이사, 왕팔, 용구······.”

금고 관리인 중 이름이 불린 십여 명의 사람들의 안색이 순간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이들은 자신들도 갑 작업장 소 주사처럼 머리가 잘려 나가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바짓가랑이가 축축해졌다.

소문무가 무서운 얼굴로 그들을 힐끗 보았다. 제사 대인이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그가 마른 침을 꼴깍 삼킨 뒤 마지못해 말했다.

“이름을 불린 자들은 앞으로 나오게. 자네들은 무죄이니 흠차 대인께서 내일 조정에 상소를 올려 죄가 없음을 보증해 주실 것이네.”

‘무죄라고? 조정에 상소를 올린다니?’

이름이 불린 금고 관리인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지옥에 있다가 천국에 온 것만 같았다.

의문과 질투가 뒤섞인 금고 관리들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범한의 앞에 선 그들은 엎드려 감사의 절을 올리면서도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자신들도 알지 못했다.

범한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금고 관리들에게 일어나라는 표시를 했다.

“주사 세 명의 죄상을 파악하고 황실 금고에서 자행되었던 여러 불법적인 일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여러분이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대의를 따르지 않았다면 본관은 황실 금고가 얼마나 엉망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 파업이 일어날 거란 사실도 알지 못했을 겁니다.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만큼 본관도 섭섭지 않게 대해 드릴 것입니다.”

범한의 말에 공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름이 불린 십여 명의 금고 관리들은 사실 밀고자들이었다. 범한 뒤에 있던 전운사 관리들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실 금고에 온 지 사흘도 되지 않은 흠차 대인이 어떻게 자신의 편을 포섭할 수 있었단 말인가. 감찰원 밀정이 뛰어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이름을 불린 동료들이 몰래 자신을 팔아먹은 밀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금고 관리인들은 당장이라도 그들을 흠칫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상황상 그럴 수는 없었기에 이를 갈며 나지막이 욕을 퍼부었고 이 말은 앞에 나온 밀고자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범한에게 감사해하던 밀고자들은 순간 그가 원망스러워졌다. 몰래 재산을 반납하고 알고 있는 정보를 밀고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파업이 일어날 거란 사실은 자신들이 말한 게 아니었다. 자신들도 어젯밤에야 그 사실을 알았는데 무슨 수로 알릴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그들은 상사인 주사들의 눈 밖에 날 용기는 없었으므로 애초에 갈대처럼 양쪽에 붙어 상황에 따라 처신한 생각이었다.

동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게 된 밀고자들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서로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흠차 대인이 밀고 사실을 말했으니 이제 동료들을 어떻게 본담?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장삼이 이삼을 바라봤고 왕팔은 옆에 있는 용구를 바라봤다.

“자네도 밀고했나?”

“응, 나도 밀고했네.”

그들이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범한은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말을 내뱉었다.

“이 열세 명의 금고 관리인들은 용감히 폐단을 폭로해 공을 세웠으므로 본관은 이들을 3대 작업장 부주사로 임명하기로 했네.”

범한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부사에게 물었다.

“마 대인은 다른 의견이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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